제11편 장생(張生)
이공자 진영.
수많은 접객실 중 하나.
말이 접객실이지, 손(孫) 장로가 방문할 때마다 고정적으로 사용하는 그곳은, 사실상 손 장로의 집무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항상 사람 좋아 보이는 표정을 짓고 다니는 손 장로답게, 언제나처럼 '허허' 하고 웃으며 두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맞아 주었다.
"...."
"...."
하지만 두 사람은 그저 서서 고개를 조아릴 뿐, 감히 손 장로를 마주 보지도 못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인자한 표정의 손 장로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둘 다 고개를 들게. 본디, 승패(勝敗)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 했네.”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두 사람이었다.
그런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손 장로는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다음번엔 이런 일이 없겠지?”
그때야 두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대공자 담당의 한명휘와 사공자 담당의 최 책사였다.
"예.”
“물론입니다.”
손 장로의 가늘게 웃고 있는 눈이 그런 그들의 얼굴을 살폈다.
그들의 눈에 떠올라 있는 결연함과 독기(毒氣)는 만족스러웠다.
“좋아, 아주 좋네.”
손 장로는 두 사람에게 앉을 자리를 권했다.
두 사람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착석하자, 그때가 되어서야 두 사람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을 꺼냈다.
“주군께서는 그대들을 한 번 더 신용해 보기로 하셨네. 그대들의 지위도 그대로 유지해 주시기로 하셨지.”
두 사람의 책사는 속으로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툭 하고, 두 사람이 안도하는 순간 손 장로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애초에 초기부터 대공자와 사공자의 합작 사업을 틀어막는 것은 이제 힘들어졌네. 지금은 좀 더 제 대로 된 작전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네.”
두 책사가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합작 사업을 무너뜨리는데 집중적인 역할을 할 인재를 모셨지. 그가 낙양에 도착하는 대로 함께 머리를 짜내 보도록 하게.”
"...."
한참을 망설이던 한명휘가 입을 열었다.
“…저희 위에 지휘관이 생기는 겁니까?”
손 장로가 손사래를 쳤다.
“아닐세, 아닐세. 그는 단지 자네들 두 사람이 좀 더 유기적이고 건설적인 대응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도울 뿐. 어디까지나 실질적인 책임자는 여전히 그대들일세.”
그 말이 그 말이었다.
두 책사는 썩어 들어가려는 표정을 간신히 통제했다.
손 장로는 그런 그들의 반응을 모른 척하며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그래, 염 장로가 원각정에 들었다고?”
“예.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구먼….”
손 장로는 몇 번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다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아마도 장로원에서 주어진 그의 임무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대공자라…. 머리를 잘 썼군.”
그는 혼자서 묻고 답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듣자 하니 대공자의 인맥이 꽤 괜찮은 수준은 된다 하더군. 장로들과 빠르게 안면을 트고 싶을 대공자의 입장을 고려하면, 빨리 찾아갈수록 싸게 거래할 수 있겠지. 확실히 영리해, 염 장로는.”
한명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염 장로가 대공자에게 충성 맹세를 하지는 않겠습니까?”
잠시 눈을 휘둥그레 떴던 손 장로가 곧 폭소를 터트렸다.
* * *
어느덧, 불게 물든 태양이 뉘엿 뉘엿 서편을 향해 몸을 뉘어 가고 있었다.
“간단히 요기라도 좀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자리에서 떠날 줄을 모르는 염 장로에게 일령이 정중히 물었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럼 일단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안쓰러운 표정의 일령은 준비해온 주먹밥을 탁자 위에 두고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주먹밥은 윤기가 자르르 흘러, 보는 것만으로도 먹음직스러웠다.
하지만 바닥에 엎드린 백호조차도, 칼을 안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무사장도, 그저 목적 없이 방을 서성일 뿐인 염 장로도, 누구도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이 겹치는 경우는 없었고, 그저 무의미하게 허공을 배회할 뿐이었다.
“…내 딸이.”
문득 걸음을 멈춘 염 장로가 입을 열었다.
“백하가, 그런 말을 했다고…?”
얼마나 그 침묵이 길었는지, 초인의 육체를 가진 염 장로의 목소리가 갈라졌을 정도였다.
"...예"
짧은 대답에 염 장로가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가….”
북방의 험지와 잦은 출장으로 어릴 적에는 아이에게 얼굴조차 거의 보여 주지 못했던 염 장로였다.
가끔 볼 때면, 겁을 먹었는지, 그저 제 어미의 뒤에 숨어 치맛단을 붙들고 있던 아이였다.
“그 아이가…….”
염 장로의 말끝에는 너무나 많은 의미가 담긴 한숨이 이어졌다.
그때. 가만히 엎드려만 있던, 백호의 귀가 쫑긋거렸다.
인기척이 었다.
문이 벌컥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깔끔한 백의(白衣)를 입은 대공자 연소현의 모습이었다.
“대공자님!”
어딘가 지쳐 보이는 그의 모습에 실내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염 장로가 그런 대공자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던 차에, 마찬가지로 백의를 입은 약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은근슬쩍 연소현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 약왕께서 여기 계시는데, 뭐가 그리도 걱정인가?”
“그 말씀은…?!”
약왕이 히죽 하고 웃었다.
그때, 연소현이 은근슬쩍, 약왕의 앞을 가로막으며 대답했다.
“시술은 성공적이오. 이제….”
약왕이 말을 가로챘다.
“이제 그 아이는 앞으로 걱정 없이 건강하게 잘 살 날만 남았다는 말일세.”
그 말에 염 장로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숨도 쉬지 못하고 있던 무사장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백호는 마구 꼬리를 휘저으며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어허, 왜 자꾸 말을 끊고 그러시오?”
“그 시술법을 창안한 것은 이 약왕 어르신이 아니냐? 너야말로 다된 밥상에 숟가락을 은근슬쩍 밀어 넣고 있으면서?”
“이 시술은 내가 성공시켰지 않소? 노인네야말로, 뒤에서 보조나한 주제에….”
“보조가 아니라 감독이다! 감독! 어디까지나 제자 녀석이 제대로 시술을 하는지 감독을 한 것이지!”
“나는 당신 제자가 아니라고 몇번을 말해야 알아듣소?!”
아니나 다를까, 티격태격하기 시작한 두 사람.
두 사람이 그러든 말든, 그저 한 아이의 아버지는 엎드려 감사만을 표할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 *
어둠이 내려앉고, 원각정 곳곳에서 하녀들이 유등에 불을 밝히고 다녔다.
문을 열고 작은 마당으로 나선 염 장로는 혼자 서 있는 대공자의 모습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공자님?”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 나와 본 것이지만, 그것이 대공자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염 장로였다.
“염 소저는 좀 어떻소?”
달을 올려다보고 있던 대공자가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은은한 달빛이 그 미소에 드리워 있었다.
그 미소는 대공자의 것일까, 아니면 의원 연소현의 것일까.
습관처럼 상대의 생각을 짚어 보던 염 장로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부터 다른 사람들처럼 일반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들떴더군요. 뭐부터 먹을지, 그 명단을 쓰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맛없는 영양식만을 먹어야 했던 염백하였다.
작게 웃음을 터트린 연소현의 모습에 염 장로도 미소를 지으며, 그의 곁에 섰다.
“다시 한번, 이렇게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지나치게 정중한 염 장로의 모습이 부담이었는지, 연소현은 뒤를 돌아서서 대답했다.
“인사는 지금쯤 술을 퍼마시고 있을 늙은이에게나 하시오. 그 늙은이가 없었다면, 애초에 불가능했을 시술이었으니.”
왕후장상(王侯將相)들도 어떻게 든 한번 모셔보려 기를 쓰는 천하의 약왕을 늙은이라 부르는 것은, 연소현밖에 없으리라.
염 장로는 작게 미소 지으며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대공자님께서 제 딸을 치료해 주셨으니, 저는 이전에 드린 말씀 대로 이제 그 맹세를 지키….”
“염 장로.”
연소현이 그의 말을 끊어 버렸다.
“대공자님?”
염 장로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자, 연소현의 차분한 목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그대의 딸은 비침습적인 방법으로 치료했기에, 따로 회복 기간도 필요 없소. 곧 상태가 안정된 것이 확인되고 나면, 왔을 때처럼 그대가 안고 돌아가면 되오.”
“아, 예.”
염 장로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에 걸을 수 없는 것은, 병 때문이 아니라, 근력을 키워 해결하면 될 문제이니 걱정할 것 없소.”
“예, 대공자님.”
아무래도 의원으로서 할 말이 남은 모양이라고 그렇게 수긍하고는 연소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의원으로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니 조금 있다가 딸과 함께 돌아가면, 아무도 그대가 내 세력에 들어왔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오.”
“그게 무슨…?”
더 이상 표정을 감추지 않는, 염 장로의 얼굴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그런 그에게 대공자가 미소 지었다.
“본 대공자가 그대의 딸을 치료한 것은 누구도 모를 것이고, 그대는 딸을 맡겨야 하는 것도 아니니, 의심받을 일도 없다는 말이오.”
"...."
대공자는 손을 들어 원각정의 정문 방향을 가리켰다.
“이 협상은 끝났소. 승부는 없었던 것이 되었지. 그대는 유일한 약점을 잃었고, '나'는 병자 하나를 성공적으로 치료했소.”
염 장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대공자님….”
불러 놓고 아무런 말도 제대로하지 못하는 염 장로의 모습에, 연소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표정을 화폭(畫幅)에 남겨 두면, 약점을 하나 잡을 수는 있겠군.”
연소현은 키득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대공자님! 저는”!”
염 장로가 외치자 연소현의 발걸음이 멎었다.
“염 장로, 신중하시오. 그대는 지금 너무 감상적이오.”
"...."
돌아보지 않은 연소현에게서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대는 단지 한 명의 무사도 아니고, 그저 한 명의 아버지도 아니오. 그대는 수많은 수하의 식구를 책임지고 있는 한 명의 지도자요.”
연소현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본 대공자의 곁에 선다는 것은, 그들 모두를 위태롭게 하는 길. 그대는 과연 그들 모두를 걸고 도박을 할 수 있겠소?”
"...."
“내 명령에 따라 수하들을 사지로 밀어 넣을 수 있겠소?”
염 장로는 대답하지 못했다.
연소현은 애초에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잠시 후 늙은이가 들러 예후를 봐줄 것이오.”
작은 마당을 벗어나는 그 발걸음에는 조금의 미련조차 보이지 않아, 가볍기 짝이 없었다.
그의 목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밤길 어두우니 조심해서 귀가하시오. 나중에 따로 배웅은 하지 않겠소.”
염 장로는 그저 멍하니 서서, 그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 * *
손 장로의 접객실.
“염 장로가 원각정을 떠났다고?”
“예.”
“그의 딸은? 함께였다고 하던가?”
문사(文士)가 고개를 숙였다.
예 모든 인원이 동일한 것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알겠다. 가 봐.”
문사가 깊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역시 예상대로 그저 단순한 거래 였군.”
한명휘가 물었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그렇군. 자네들은 책사이니 모를 만도 하지.”
서류를 들여다보던 손 장로가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상대를 신뢰하려면, 상대를 신뢰하고 있어야, 신뢰할 수 있다. 그러니 결국 누구도 신뢰할 수 없다.”
손 장로의 입가에 인자한 미소가 걸렸다.
“그것이 권력자의 본질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