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편 자충수(自充手)
원각정의 외딴곳에 있는 한적한 정원.
'결국 아버지가 대공자님과 충돌하고야 만 것일까?’
하얗게 질린 염백하가 이령에게 한참 소리치는 중이었다.
“당장! 아버지께 무슨 일이 있다면, 나를 당장 아버지께로 갈 수 있게 해 다오!”
이령이 무언가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동안, 하녀들이 철벽처럼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안 된다면 여기 무사장이라도…!”
하녀들은 철저하게 상황별 비상 사태의 대응 수칙대로 임했다.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이곳에 계셔야 합니다.”
대공자가 직접 작성한 대응 수칙은 이들에게 있어서 법 이상의 무언가였기 때문에, 아무리 염백하가 매달려 봐야 소용이 없었다.
"무사장…!”
그녀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묵묵히 그녀를 지키고 서있는 무 사장에게 외쳤다.
“아가씨….”
하지만 무사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 통제를 따르지 않겠다는 것은 일전(一戰)을 치르겠다는 말과 동일했으며, 상황 파악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혼란만을 가중할 뿐이었다.
“저는 주군께 아가씨를 호위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염백하는 무어라 외치려 했지만, 무사장의 얼굴에 노골적으로 떠올라 있는 괴로움에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온몸이 떨려 오는 것을 억누르며, 헐떡이는 숨을 달래는 것 밖에.
현재 수하 중 그녀의 아버지를 가장 오래 섬긴 이가 바로 이 무사장이 아니던가.
그가 지금 느끼고 있을 자괴감과 고통은 그녀 이상이리라.
싱황 종료.”
이령이 전음을 받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염백하를 돌아보았다.
“아가씨. 이제 안심하셔요. 그저 두 분이 대화하던 중에 잠시 오해가 있으셨던 모양이에요.”
이런 상황에 주인 곁에 있지 못해 분했던 것은 이령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아….”
긴장이 풀린 염백하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런 그녀를 무사장이 정중히 받쳐 주었다.
그녀의 몸은 식은땀에 젖어, 차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 물리적인 충돌은 없었던것인가요?”
이령이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기세를 일으키셨던 염 장로님께서는 곧 큰 소리로 웃으셨다고하니, 별일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
염백하는 그 말에 안심하면서, 동시에 낙담했다.
'무공을 모르는 대공자님 앞에서 아버지께서 기세까지 일으킨 다음 결국에 웃으셨다고?’
그런 상황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패배를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
그때 이령이 죄송한 표정으로 염백하에게 양해를 구했다.
“저는 일단 이런 상황에서 돌아가 봐야 해서, 죄송하지만 잠시 자리를 비워야겠어요.”
그녀가 손을 들어 하녀 두 명을 가리켰다.
“그래도 이 아이들은 여기 남겨둘 테니,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자리에 앉은 염백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이 하녀분들도 데려 가시죠. 잠시 제게 혼자 있을 시간을….”
고양이 모습의 백호가 그런 주인을 걱정하며, 그녀의 뺨을 핥아 주었다.
“예, 그럼 저희는 잠시 자리를 비우겠어요.”
원각정의 인원들이 정중히 인사를 한 후, 경공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던 무사장이 미소를 지으며, 염백하를 돌아보았다.
“아가씨. 주군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안심하 시고…."
“이제 한계….”
하지만 염백하는 그런 무사장의 미소를 보지 못했다.
“아가씨?!”
몸의 떨림이 너무 커져, 이제 제대로 앉아 있지도 못할 지경이 된 염백하가 앞으로 고꾸라졌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아가씨!”
그때까지 억누르고 있던 발작을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된 그녀였다.
다행히 무사장이 몸을 날리다시피 하여, 그녀를 받아 냈지만, 그녀의 상태는 대단히 안 좋아 보였다.
이전까지는 그저 너무 긴장하여 그런 것으로 생각하던, 무사장은 그 순간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깨달았다.
창백한 안색, 시퍼렇게 물들어 가는 입술, 걷잡을 수 없이 떨려 오는 가녀린 몸.
“발작?!”
그것은 틀림없는 지병의 발작 증세였다.
눈앞에서 그녀의 발작을 직접 본것은 처음이었지만, 이런 상황에 대비해 충분히 교육을 들었던 그가 자신의 품을 뒤졌다.
“아가씨, 조금만 버티시죠! 지금 즉시 환약(丸藥)을…!”
과거 약왕이 그녀를 위해서 조제하여 준 환약은, 이전부터 그녀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필하는 이들이 인수인계받아 왔다.
“아가씨?!”
하지만 그런 그의 손목을 붙잡는 연약한 손길이 있었다.
“아, 안 됩니…다….”
그 주인은 다름 아닌 염백하였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지금 즉시…!”
발작 때문에 정신이 혼미한 상황으로 보였다.
그렇기에 그는 그런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이어서 들려오는 염백하의 말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이, 이것은, 아…버지께서, 이기실 수 있는… 유, 유일한 방안.”
“그게 무슨 말씀-?!”
무사장은 자신을 바라보는 염백하의 시선에 담긴 기백에 숨이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내, 내가, 죽으면…, 협상…할 필요, 없어지는….”
그녀는 지금도 실시간으로 죽음에 다가가고 있었지만, 그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아가씨! 그런 말도 안 되는…!”
염백하가 죽으면, 염 장로는 대공자에게 아무런 약점을 잡히지 않는다.
애초에 대공자와 협상을할 필요 자체가 없어진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굴러온 단순한 무사여도, 그 말을 알아듣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안 됩니다. 저는 그런 청은 들 어 드릴 수….”
“내 말 들어-!”
짜랑짜랑한 염백하의 목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다.
“내가, 내가, 아버지의…, 후계자야. 한 번이라도, 내가, 후계자 역할을 하게 해 주….”
그녀는 입에서 피를 왈칵 쏟았다.
백호가 구슬프게 울었다.
“아가씨!”
“내…가, 모두를 위해, 희생할, 차례가, 온, 것, 뿐….”
사실 식사가 끝나고부터, 염백하는 자신의 몸에 이상이 있음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때 그녀는 마음먹었다.
최악의 상황이 닥쳐오면, 자신이 가문의 후계자로서 책임을 다하자고.
한 번이라도.
이 쓸모없는 몸뚱이가 한 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계획이 성공할지는 알 수가 없었다.
조건이 까다로웠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협상이 사실상 패배로 끝나 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했으며, 또 자신이 설득할 수 있는 사람만이 주변에 있어야 했다.
희박한 가능성이었지만, 결국 운좋게도 그녀는 이렇게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병약하고 지켜 줘야만 하는 대상이 아니라, 나도 모두의 전우(戰友)가 되고 싶었어.'
모두와 함께 전투에 나서고 싶었다.
나란히 서고 싶었다.
단 한 번이라도.
이런 방식으로라도.
“아가씨!”
그녀의 각오를 알게 된 무사장은 그저 오열하며 눈물을 쏟을 뿐, 결국에 환약이 든 주머니를 어쩌지 못했다.
“나, 나도, 이제 전우….”
백호 또한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뚝뚝, 홀리며 식어 가는 주인의 뺨을 핥아 댈 뿐.
“아, 버지, 께서, 자랑스, 러워, 해 주셨, 으면….”
시야는 점차 흐려졌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그녀의 눈에 선경(仙境)이라 불리는 원각정의 아름다운 풍경이 들어왔다.
온화한 햇볕, 평화롭게 흔들리는 나뭇잎들, 사방에 흐드러지게 핀 꽃들과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
'대공자님….'
그때 그녀의 귓가에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랑스러워하긴, 세상 어느 아비가 딸이 자살했다는데 자랑스러워한단 말이더냐?”
그저 넋 놓고 있던 무사장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다, 당신은…?!”
노인은 부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그래. 나 약왕이다.”
약왕은 성큼성큼 다가와 무사장의 손에 들린 환약 주머니를 뺏어 들었다.
“약왕께서 여긴 어떻게…?!”
약왕이 주머니에서 환약을 꺼내어 보존 상태를 확인하며 대답했다.
“원각정 안에서는 모든 것을 듣고 지켜보는 이가 있어서 말이지.”
약왕이 환약을 들고 다가오자, 염백하가 몸을 비틀며 거칠게 저항했다.
“아, 안 돼…!”
저 약을 먹는 순간 그녀의 계획은 실패였다.
하지만 천하의 약왕이 자신의 눈앞에서 병자가 죽어 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리가 있겠는가.
“어허! 가만히 있어!”
“읍”! 읍...!"
약왕은 능숙하고 부드럽게 그녀를 제압하고, 환약을 먹이려 했다.
“아니, 그러고 보니….”
염백하는 약왕의 손이 멈추자 의아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약왕은 그런 염백하의 시선을 무시하고 주머니에 환약을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르신…?”
약왕은 자신의 품에서 곰방대를 꺼내어 물었다.
“생각해 보니, 지금은 이 약을 먹일 때가 아니다. 실수를 할 뻔했어.”
“그게 무슨…?”
그때 멀리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백하야! 백하야!”
그것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나무들을 박살 내며 직선으로 달려오는 아버지의 애타는 외침이었다.
“어르신!”
염 장로는 약왕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제발! 제가 이렇게 빌 테니, 제 딸을 살려 주십시오!”
약왕이 그저 곰방대만 빨고 있는 모습을 보고 뭔가 오해한 것일까.
“전에 있었던 일은 제가 이렇게 사죄드립니다! 어르신!”
“예끼! 이 사람이!”
그러자 약왕이 벌컥 화를 냈다.
“이 약왕을 겨우 그런 일 때문에 환자를 내팽개치는 속 좁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인가!”
"예?"
염 장로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들고 약왕을 바라봤다.
“잊었는가? 발작이 왔을 때야말로, 이 지독한 병을 완전히 잡을수 있는 시술을 펼칠 기회라는 것을."
“아…!”
약왕이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침술은 나보다는 내 제자 녀석이 쪼오오끔 나으니, 그 녀석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게. 내 보아하니, 이 아이는 아직 충분히 버틸 수 있으니.”
그때 수풀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항상 이야기하지만, 나는 당신의 제자가 아니오.”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니나 다를까, 언제나 여유로운 모습의 연소현이었다.
“하지만 당신이 내 침술 실력이 더 뛰어나다고 인정한 것은 잘 들었소.”
“난 그런 말 한 적 없다!"
연소현은 펄쩍 뛰는 약왕의 모습을 무시했다.
'아….'
그리고 염백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언제나 그녀가 가장 보고 싶어했던 연소현의 얼굴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대공자!"
염 장로가 대공자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 염곽추! 앞으로 대공자의 명이라면, 지옥에라도 뛰어들 테니, 제발, 제발 제 딸을 살려만 주십시오!”
그렇게 그녀의 아버지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아버지….'
염백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자신이 가장 피하고 싶었던 순간이었다.
그녀의 계획이 최악의 형태로 망가지는 순간이었다.
결국, 자신의 쓸모없는 몸뚱이 때문에 아버지가 무릎을 꿇는 것을 보게 된 그녀였다.
“대공자님!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연소현은 그런 염 장로를 무시했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군….”
차분히 그녀의 용태를 살피던 연소현이 날렵한 몸놀림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하녀들에게 명했다.
“이 환자를 즉시 옮기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