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편 봉수(封手)
염 장로가 한숨을 푹 쉬었다.
“것참. 이건 반드시 통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방금 기세를 뿜어내면서, 몸 안의 주정(酒精)조차 전부 날아가 버린 탓인지, 취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대의 전략은 훌륭했소.”
염 장로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저 대공자님께서 저보다 한수 위였을 뿐이라는 말씀입니까?”
연소현은 대답을 하지 않고, 빙긋 웃었다.
그러자 염 장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제가 잘못했으니, 슬슬 이들을 물려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탈명귀검이 자신의 검을 염 장로의 목에 점점 가까이 들이밀고 있었던 탓이었다.
"...."
그 얼굴에는 뭔가 엄청난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그리고 염 장로의 연기에 화가난 것은 탈명귀검뿐만 아니라, 여전히 검을 겨누고 있는 모두가 마찬가지 였다.
연소현이 웃으며 수하들을 칭찬했다.
“수고했다. 다들 훌륭한 대처였어.”
그러자 그때야 하나둘씩 검을 거두어들였다.
집무실이 한동안 검을 검집에 밀어 넣는 소리로 시끄러워졌다.
“이제 모두 각자 위치로 돌아가도록.”
그러자 인원들이 썰물처럼 집무실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저 순순히 나가지만은 않았다.
다들 눈에 쌍심지를 켜고 염 장로를 흘겨보며 물러나는 탓에, 출입구를 등지고 앉아 있던 염 장로는 뒤통수가 따끔한 것을 느꼈다.
“하하. 이거 두 번만 이런 짓을 했다가는 목이 남아나질 않겠습니다.”
최대한 능글맞게 웃어 보이는 염 장로였지만, 그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다시 한번….”
그 대답은 대공자가 아니라 마지막에서야 검을 거둔 탈명귀검에게서 들려왔다.
“...이딴 짓을 하면, 장로고 뭐고, 그냥 실수인척 목을 날려 버릴 거요.”
“미안하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염 장로가 쓴웃음을 지으며 솔직하게 사과하자, 탈명귀검은 김이 빠졌다는 표정으로 물러났다.
'역시 탈명귀검. 명불허전이로군.'
그의 별호는 과거에 염 장로가 있던 북부까지도 자자했을 정도였다.
뒷모습을 보이며 껄렁한 자세로 걸어 나가는 탈명귀검에게 염 장로가 말했다.
“언젠가는 제대로 한번 붙어 보는 것이 어떻겠소?”
“살아남을 자신이 있다면, 얼마든지.”
나직하게 코웃음을 친 탈명귀검이었다.
그렇게 무게를 잡고 밖으로 나가는 탈명귀검의 뒤로 대공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문지기.”
'또, 왜?!’라는 표정으로 그가 돌아보자, 대공자가 박살이 난 문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네가 부쉈으니, 오늘 내로 네가 고쳐 놔라.”
“이익…!”
무어라 육두문자가 목 끝까지 올라온 듯한 탈명귀검은 결국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나가 버렸다.
그 모습에 염 장로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 흉신악살(凶神惡煞) 같은 사내를 그리 험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중원국 전체에 대공자님밖에 없을 겁니다.”
“흉신악살은 무슨, 그냥 문지기일 뿐이오.”
대공자의 목소리를 밖에서 들었던 것일까, 밖에서 탈명귀검이 뭐라 괴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대공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염 장로는 쓴웃음을 지으며, 탈 명귀검보다 더 신경이 쓰이던 인물을 가리켰다.
“…이쪽 소저는?”
탈명귀검이 마지막에 검을 회수한 자라면, 아예 검을 넣지도, 밖으로 물러나지도 않은 이도 있었다.
“이쪽은 본 대공자의 시녀장인 정아라오. 본 대공자의 수석 전담 시녀이기도 하지.”
그녀는 귀신과 같은 형상으로 염 장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기운을 흩었지만, 여전히 여파가 남았는지라, 눈에서는 금빛 광채를 흘리고 있었다.
“예, 뭐….”
염 장로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개는 전에 들었습니다만….”
대공자가 자신을 바라보자 정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물러나는 대신, 주인의 뒤에 자리 잡고 섰다.
검은 넣지도 않은 채.
그녀는 자신의 용안을 속인 자 앞에 주인을 혼자 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공자는 염 장로를 향해 어쩔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부디 그대가 양해를 해 주게. 아무래도 그대를 신용하지 못하는 것 같군.”
그 말에 염 장로가 이제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바로, 대공자님께 전음으로 조언을 하던 '독심술사(讀心術師)'였군요.”
“독심술사?”
“예, 북방에서는 그리 불렀었습니다.”
그러자 대공자 또한 알겠다는듯 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군. 그대는 이전에 북방에서 그 '독심술사'라는 자를 상대해 본 적이 있었던 것이로군. 그래서 그리도 능숙하게 대처가 가능했던 것이었어.”
염 장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당시에 경고를 미리 받았었지만, 미신이라고 믿지 않다가 한번 크게 쓴맛을 봤었습니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해 봐야 허황한 이야기라고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소.”
"그러게 말입니다.”
“…감히 두 분의 대화에 끼어드는 것을 사죄드리겠습니다.”
그때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정아가 참지 못하고 나섰다.
“혹시 그 '대처'라는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사실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라오.”
염 장로는 선선히 대답을 해 주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독심술사의 존재를 눈치채야 한다는 것이오.”
대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대처가 가능하니.”
“맞습니다.”
정아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제 존재를 어떻게 눈치채신 겁니까?”
대답은 대공자에게서 나왔다.
“아마도 본 대공자가 동가휴, 그 늙은이에게 했던 질문들을 듣고 알아챘던 것이겠지. 전에 상대를 해본 경험이 있었으니 말이지.”
“정확합니다.”
대공자의 추론 능력에 속으로 혀를 내두른 염 장로가 정아에게 계속 설명했다.
"겪어 보니, 그 독심술이라는 것이 그리 만능(萬能)하지만은 않았었소. 특히 부분적인 사실과 완전한 진실을 구별하지 못하더군.”
“부분적인 사실과 완전한 진실….”
듣고 있던 대공자가 간단히 설명을 보충해 주었다.
“조금 전에 염 장로의 이야기는 전부 사실이었다. 단지 염 장로는 '전부'를 말하지 않은 것뿐이지.”
“아…!”
정아가 탄식하는 소리에, 대공자가 미소 지었다.
"과거 그가 어떤 마음가짐이었는지도, 어떤 감상을 느꼈었는지도, 전쟁터를 그리워한다는 것도, 전부 사실이라는 말이지. 결정타는 장로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말이었지.”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는 말씀이군요.”
“그래.”
대공자는 염 장로를 바라보았다.
“염 장로. 그대는 권력의지를 모두 버렸기 때문에 장로직에서 물러 나겠다는 것이오?”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염 장로가 대답을 회피하며 쓴웃음을 짓는 모습에 정아는 작게 한 숨을 쉬었다.
“정아, 너의 잘못이 아니다. 그저 그 짧은 시간에 대책을 세워, 심지어 역이용까지 시도한 염 장로가 그만큼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뿐.”
염 장로 또한 정아를 치켜세웠다.
“본인이 만났던 독심술사는 바로 눈앞에 서지 않으면, 능력을 사용할 수조차 없었소. 그런데 소저는 내 기감의 감지 범위에 걸리지도 않았었소. 그래서 몇 번이나 내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닌지 의심을 했었지.”
염 장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진심을 담은 칭찬이었기에, 그나마 정아의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만약 대화 도중 대공자께서 전음을 받는 것을 몰랐다면, 아마 끝까지 본인은 그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오.”
“아…. 그랬군요.”
아쉬워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대공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위로했다.
“염 장로 정도의 고수에게 전음의 존재 여부를 완전히 감추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예, 주인님.”
대답은 순순히 하는 그녀였지만, 여전히 불만스러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렇게도 분했던 것일까.
대공자는 그녀가 용안을 각성한 이후, 오랜만에 보여주는 솔직한 감정 표현에 미소 지었다.
“너는 아직 무공을 익힌지 이제 한 달밖에 되지 않았으니, 욕심낼것 없다. 때가 되면 내가 너를 위해 소림(少林)의 혜광심어(慧光心語)라고 할지라도 구해 줄 터이니.”
“예, 주인님.”
그의 말에 만족한 표정을 지은 정아였다.
그런 그녀를 쳐다보며, 염 장로가 멍청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한 달?”
염 장로가 뭔가 자신이 말을 잘못 들었나,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있는 사이, 정아가 대공자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주인님께서는 염 장로가 제 능력을 역이용하고 있다는것을 어떻게 꿰뚫어 보신 것이옵니까?”
그녀의 말에 염 장로 또한 강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것은 저 또한 궁금합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독심술을 역이용까지 한 자신의 전략을 대공자가 꿰뚫어 보았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던 염 장로였다.
대공자는 작게 미소 지었다.
“아까도 말했듯, 그것이야말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소. 그것은 한 가지의 가정을 하는 일이지.”
“한 가지의 가정, 말입니까…?”
대공자는 염 장로에게 시선을 던졌다.
“본 대공자가 아는 염 장로는, 상승불패(常勝不敗)의 무장. 사지에서도 반드시 활로를 찾아내는 인물이오.”
대공자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그런 인물이 이 난국(亂局)에서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날리 없다. 그라면 반드시 활로를 찾을 것이다.”
"...."
대공자의 말에 염 장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단순해지지.”
대공자는 의자에 등을 붙이고 다리를 꼬았다.
“여기서 본 대공자와 협상을 하는 순간, 패배는 확정적이다. 하지만 장로 위(位)를 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것은, 작지만 분명 다시 일어설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것은 대공자가 염백하에게 했던 말과도 같았다.
'0'과 '0과 가까운 수' 의 차이.
그 차이를 구분해서 선택을 내리는 것이 진짜 승부사의 선택이라고.
그리고 염 장로는 그런 인물이라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있던 염 장로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대공자께서는 저에 대해 확신을 하고 계셨던 것이로군요. 처음부터.”
대공자가 빙긋 웃었다.
“그것은 그대도 마찬가지이지 않소, 염 장로.”
“…예?”
“그대 또한 본 대공자에 대해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아까와 같은 전략을 시도한 것이지 않소?”
대공자는 손을 들어 스스로를 가리 켰다.
“장로 위에서 물러난 그대가 딸을 데려오면, 본 대공자가 군말 없이 치료해 줄 것을 확신하지 않았소?”
그랬다.
'나는 한낱 의원이자 무검자일 뿐인데, 그대는? 그대는 그저 한 아이의 아버지일수 있소?’
그것은 대공자 스스로가 했던말.
염 장로는 그런 대공자에게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과감한 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염 장로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거 참. 도저히 이길 방법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염 장로는 두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결단을 위한 장고(長考)에 든 것이리라.
대공자는 그런 염 장로를 채근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가 마음을 잡길 기다릴 뿐.
'이제 앞으로 한 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