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편 승부수(勝負手)
대공자의 목소리가 집무실에 들어선 염 장로를 반겼다.
“식사는 마음에 드셨소?”
자리에 앉은 염 장로는 곧은 시선으로 대공자를 마주 보았다.
“훌륭했습니다.”
“그거 기쁜 이야기로군. 우리 하녀들의 실력은 훌륭하다오.”
대공자는 그 호의적인 태도와는 다르게, 시퍼런 날이 선 수술칼과도 같은 눈빛으로 염 장로를 꿰뚫고 있었다.
마치 염 장로의 모든 것을 헤집어 그 속을 낱낱이 들여다보겠다는 듯이.
염 장로는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고, 먼저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경황이 없어 제 임무를 위해 힘써 주신 부분에 대해 감사도 표하지 못했습니다.”
손을 살짝 들어 감사를 받은 대공자가 물었다.
“그대가 보기엔 어떠했소? 본 대공자의 수완은.”
“인상 깊었습니다.”
“그랬소?”
“예, 무척.”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교차 했다.
"그렇군. 그렇다면….”
대공자가 무어라 말을 꺼내려는 그때, 염 장로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렇기에 대공자님께는 죄송하다고 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무슨 뜻이오?”
염 장로는 고개를 숙인 그 자세로 답했다.
“아무래도 대공자님의 그 호의가 이제 저에게는 쓸모가 없어질 듯합니다.”
“그 말씀은…?”
염 장로는 눈을 감았다.
* * *
대공자의 세력에 들어가는 순간, 그 순간에 장로원에서 자신이 가졌던 입지는 사라지게 된다.
단지 치료만을 위해 딸을 대공자에게 맡긴다고 해도, 그것은 인질이 잡힌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사실관계와 상관없이 자신은 대공자의 세력이나 마찬가지로 간주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자신이 얼마나 스스로를 비싸게 팔 수 있느냐뿐이었는데, 대공자가 드러낸 힘을 보아하니 이젠 그마저도 힘들었다.
눈을 감은 염 장로는 그날 호두마을의 자애원에서 들었던, 대공자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나는 한낱 의원이자 무검자일 뿐인데, 그대는? 그대는 그저 한 아이의 아버지일 수 있소?’
그는 마음을 굳혔다.
* * *
염 장로는 감았던 눈을 뜨고 숙였던 머리를 들어, 곧은 시선으로 대공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결연한 눈빛에 대공자의 표정 또한 흥미로워졌다.
과연 염 장로는 어떤 결정을 내린 것일까.
이윽고 염 장로의 입이 열렸다.
“저는 이만 장로직에서 물러날까합니다.”
* * *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제 염 장로를 바라보는, 대공자의 시선은 거의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
"...."
하지만 염 장로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최대한 담담히 그 시선을 마주할 뿐.
“…그렇소이까?”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대공자였다.
염 장로는 대답 대신, 대공자에게 물었다.
“실례인 줄은 알고 있습니다만, 혹시 술을 한잔 얻어 마실 수 있겠습니까?”
대공자는 책상 밑에서 술 한 병을 꺼냈다.
그리고 새로 준비되어 있던 찻잔을 가져와 손수 술을 따라 주며 말했다.
“이 술은 어머니께서 담그셨던 술이라오.”
염 장로는 공손한 태도로 잔을 받았다.
“감히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술이군요. 감사합니다.”
술을 들이켰다.
잔이 비자, 대공자는 다시 잔을 채워 주었고, 염 장로는 그 자리에서 석 잔의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제가 이제까지 마셔 본 술 중에 가장 훌륭한 술입니다.”
대공자는 대답 대신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는 가만히 앉아 염 장로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철이 들기 전부터, 저는 검을 쥐었고, 북방의 동토(凍土)에서 약탈자들의 피로 그 검을 다스렸습니다.”
알싸한 취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염 장로는 시선을 먼 곳으로 향했다.
“젊어서는 공을 세우는 것에 매달려 보기도 했고, 동기들보다 앞서서 나가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낙양검가 역사상 최연소 대주가 되었지 요.”
그의 어조는 음울했다.
“하지만 그런 치기 어린 생각이 사라진 것도 금방이었습니다.”
대공자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북방 특유의 끝이 없는 산발적(散發的) 교전, 이어받은 원한조차 절대 잊지 않는 전사들, 본거지도 존재하지 않아 결착을 지을 수 없는 전투의 연속…!”
염 장로의 거대하고 두꺼운 손이 떨려 왔다.
"…결국, 사지 멀쩡하게 살아남은 건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그가 새로 채워진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싸우다 죽는다면 검가의 영광(榮光)을 위해 죽을 것이고, 싸워서 산다면 검가의 영예(榮譽) 속에 살아가리라!”
그것은 현재는 사라진 낙양검가 북방 전투 순찰단(北坊戰鬪巡察團)의 구호였다.
쩌렁쩌렁한 무사의 목소리가 넓은 집무실 공간을 메아리치다 흩어졌다.
“화산의 검군(劍君)은 실로 두려운 상대였습니다.”
그는 눈만 감으면, 지금도 그날의 검격(劍擊)을 선연하게 기억할수 있었다.
첫수부터, 그 마지막 수까지.
"그는 대화산파(華山派)의 정수(精髓)를 한 몸에 담아낸 희대의 천재.”
그날을 회상하는 염 장로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그날 쓰러지는 것은 틀림없이 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북방 전쟁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암울했던 전쟁의 기록을 되새겼다.
“아군의 보급선은 길고 가늘어, 언제나 끊기기 일쑤였고, 너무나도 넓은 전선(戰線)은 유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길어지는 전쟁. 사기가 밑바닥을 치는 징집병. 손발이 맞지 않는 군과 총독부.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 수 없는 태도로 일관하는 자치구내의 부족들.
“하지만 결국 살아남았고, 또 승리했더군요.”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상처뿐인 승리였지만, 살아남은것만으로 만족했고,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들떴지요.”
그는 연소현이 따라 준 술을 깨끗하게 비우고는 말을 이었다.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귀환했지만, 돌아온 본가는 또 다른 전쟁터나 마찬가지더군요.”
그것은 그가 더 이상 한 명의 무사가 아니라, 낙양검가의 장로였기 때문이었다.
“뭐, 그래도 열심히 버텼습니다. 수하 놈들의 허벅지에 살이 붙고, 하나둘씩 혼례를 올리고 자식들을 키우는 것을 보는 재미가 있었으니까요.”
그가 흐흐, 하고 웃었다.
“제 측근들은 모두 싸움에 관련된 것밖에 모르는 자들이라, 사실상 저 혼자만 좌충우돌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러다 보니 한낱 집사놈 따위가 대공자님께 폐도 끼치고 말입니다.”
또 한 잔이 비워졌다.
“하지만 어느 날 깨달았습니다.”
그의 취기 어린 시선이 대공자를 향했다.
“제 몸이 피와 살이 튀는 그 전쟁터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공자는 염 장로의 시선에서 진심을 느꼈다.
“저는 죽으나 사나, 결국 사신(死神)들과 한바탕 어울려 검을 쥐고 흔드는 것을 가장 사랑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가 마지막 잔을 비웠다.
술병엔 이제 술이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
대공자가 물었다.
“…그래서 다시 일개 무사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인가?”
염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가장 잘하는 것이 그것이니까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대공자에게 한 줄기 전음이 날아들었다.
’…그가 말한 것은 모두 진실입 니다, 주인님.'
시녀장 정아의 확신이 담긴 전음이었다.
염 장로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모처럼 호의를 베풀어 주셨지만, 쓸모없는 수고가 되게 되어 버려서….”
“…짓말이로군.”
“예? ”
대공자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미소 지었다.
“거짓말은 그쯤 해 두는 것이 어떤가, 염 장로.”
염 장로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대공자님의 말씀. 모욕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밖에서 급히 전음이 날아들었다.
'방금 염 장로의 이야기는 모두 진심이었습니다, 주인님.'
정아의 전음은 다급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실력이 부족해, 제대로 전음에 문제가 생겼다고 판단했으리라.
하지만 전음은 선명하게 대공자에게 들렸었다.
단지 그가 전음을 무시했을 뿐.
“거짓말은 좀 심했을지 모르겠군. 하지만….”
대공자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적어도 어머니의 귀한 술을 낭비했다고는 생각하네.”
'주인님!'
잠시 염 장로가 그대로 얼어붙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내 그의 입이 열리고, 벼락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대-공-자-!!”
지축이 흔들리고, 문풍지들이 터져 나갔다.
대리석 바닥이 들썩이고, 거대한 기둥들이 진동했다.
낙양검가의 수위무사답게 실로 가공할 기세가 집무실을 한바탕 뒤 흔들었다.
* * *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탈명귀검이었다.
세 자루의 검이 자아낸 검광(劍光)이 번뜩임과 동시에 집무실의 문이 터져 나갔다.
그리고 일반인은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할 순간에 그는 이미 집무실 내에 있었다.
그의 양손에는 검 한 자루씩 들려 있었고, 세 자루의 검이 공중에 떠서 염 장로를 겨누었다.
두 번째로 들이닥친 것은 정아였다.
두 눈에서 금빛 광채를 줄기줄기 홀리며 모습을 드러낸 그녀에게서는 이제까지 본 적 없을 정도의 살기(殺氣)가 몰아치고 있었다.
한계까지 밀어 넣은 기운 때문에 그녀가 염 장로를 겨눈 검은 마치 백열(白熱)하는 것처럼 번뜩였다.
* * *
원각정의 외딴곳에 있는 한적한 정원.
염백하는 정원에 마련된 정자에 앉아 고양이의 형상을 한 백호를 쓰다듬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잘하고 계시겠지?
원각정의 하녀들 덕분에 질 좋은 고기로 포식한 백호가 갸르릉하고 기분 좋게 동의했다.
그녀가 마음을 다스리려고 하는 동안에도 그녀의 손은 가늘게 떨려왔고, 얼굴은 창백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백호가 그녀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녀는 그저 백호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 뒤에서는 염 장로의 무사장이 원각정의 시녀, 이령에게 물었다.
“…혹시 소화를 돕는 약이 있소?”
이령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물었다.
“혹시 아가씨께서…?”
무사장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오. 우리 아가씨가 아니라, 내가 점심을 좀 과식하여….”
그러자 하녀들을 보내 약을 가져오라 시키려던 이령이 한숨을 쉬었다.
“무슨 본가의 무사라는 양반이, 겨우 그 정도 가지고 약부터 찾는 것인지.”
혀를 차는 시녀의 반응에 무사장이 발끈했다.
"이게 다 따지고 보면, 그대의 주인이...!”
그때 백호가 염백하의 품에서 벌떡 일어나, 온몸의 털을 곤두세웠다.
무사장 또한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전부 그 자리에 가만히 계세요!”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은 집무실의 방향.
“…설마 아버지?”
염백하의 두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 * *
집무실의 대들보에 쌓였던 먼지가 천천히 흩날렸다.
먼지가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가운데, 수십 개의 검이 번쩍였다.
탈명귀검에, 정아에, 삼령에, 하녀들까지.
모두의 검이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사내, 염 장로를 겨누고 있었다.
"...."
염 장로의 기세는 누그러들었지만, 누구도 검을 거두지 않았고, 누구도 방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수십 개의 검광과 수십쌍의 안광이 그를 주시하는 가운데, 염 장로의 어깨가 천천히 들썩거렸다.
그의 입에서는 천천히 소리가 흘러나왔다.
“ 흐, 흐흐...."
그리고 그 소리는 곧 커다란 웃음소리가 되었다.
한참을 웃던 염 장로는 자신을 겨누고 있는 수십 개의 검을 무시하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대공자?”
느긋한 자세로 미소 짓고 있던 대공자가 답했다.
“그리 어렵진 않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