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편 미생(未生)
“어서 북방으로 돌아가야 한다! 배편이든 마차든, 가장 빠른 것으로 준비하라!”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치는 동가휴의 모습에 하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달렸다.
“달려라! 달리라고!”
그런 하인들의 뒷모습에다가까지 채근하는 동가휴였다.
'이렇게 된 이상, 당장에는 그 대공자 놈의 수족이 되어 살아남는 방법밖에 없다!’
그는 아직도 떨려 오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면 놈도 나를 쉽게 처분하지는 못할 것이야. 내가 유능하게 일을 처리하면 처리할수록 나의 수명은 길어진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길이 열리리라.
사실 모든 것을 버리고, 해외로 떠나 버리는 것이 가장 살아남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이제까지 이루어 놓은 것을 모두 버린다니?
애초에 그의 머릿속에 그런 선택지 따윈 없었다.
'살아남는다! 여기까지 와서 패배하는 일은 없다! 결국, 마지막에 웃는 것은 내가 될 것이다!’
과연 그가 마음먹은 대로 성공할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 * *
'우구라이 부족'은 반평생을 북방에서 살았던 염 장로마저도 익숙한 이름은 아니었다.
그저 이름만 들어 봤을 뿐.
그만큼 위치상으로도 역학상으로도 중원국과는 관계가 없는 부족이었다.
비단길을 이용하는 상단이나 알까.
그런데 지금 자신 앞에 앉아 있는 대공자는 그런 부족에 대해서 너무나 자세히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부족 내에서 있었던 사건마저 알 정도였으니.
게다가 그 사건의 범인과 북방의 전쟁대상이 일치하는 인물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그런 의문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이 대공자가 그를 향해 미소 지어보였다.
“본 대공자는 여기저기 친구가 아주 많다오.”
“그렇습니까….”
불충분하기 짝이 없는 설명이었지만, 더 물어보기도 어려운 대답이기도 했다.
신뢰도 높은 정보를 제공하는 정보원들로 이루어진 인맥(人脈)은 금맥(金脈)과도 같은 가치를 가졌다고들 했다.
출저를 묻는 것 자체가 그 인맥을 거저먹으려는 것과 같은 행위였으니, 말문이 막힐 수밖에.
"...."
낮은 침음과 함께 생각에 잠긴것 같은 아버지의 모습에, 염백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감히 소녀가 궁금한 것을 여쭈어도 되겠사옵니까?”
“얼마든지.”
연소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가휴는 어째서 대공자님께 그리도 저자세로 굴었던 것이옵니까? 처음에 들어왔을 때, 그자는 대공자님께서 그의 비밀을 알고 계신줄은 전혀 몰랐던 것처럼 보였사옵니다만.”
그녀는 대단히 영리한 재원(才媛)이었으나, 결국 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는 '특정 정보'가 없이는 도무지 추측조차 힘든 영역의 물음이었으니.
대공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염 장로께서 짐작하고 계신 것 같군.”
대공자가 염 장로를 바라보았다.
“한번 염 장로께서 직접 말씀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소?”
'그런 기색은 충분히 감추었다고 생각했는데….'
염 장로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대공자에게 물었다.
“…아시겠지만, 대공자님과 관련된 기밀 사항인데 제 딸에게 알려도 괜찮겠습니까?”
“물론 괜찮소. 그대의 후계자가 아니오?”
허락이 떨어지자 염 장로는 간단히 설명했다.
“대공자께는 예전부터 혼약(婚約)이 있다는 이야기를 장로회에서 들은 적이 있다. 장로회 외부로는 통제되고 있는 정보이지.”
“혼약요?! 대공자님이?!”
염백하가 연인의 비극적인 소식을 들은 여인처럼 반응하자, 대공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딸의 마음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염 장로는 쓴웃음을 지으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이제까지 그 상대 가문이 어딘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오늘 동가휴의 반응을 보니, 알겠더구나.”
“…대공자님이 혼약? 대공자님이 혼약? 대공자님이 혼약? 대공자님이 혼약?”
막상 질문을 던진 것은 염백하였지만, 현재 그녀는 상태가 안 좋아보였다.
염 장로는 딸에게 내상을 회복할 시간을 잠시 주기로 하고, 대공자에게 물었다.
“제 추측이 맞습니까?”
의아한 눈으로 염백하를 바라보던 대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다시 염 장로에게 시선을 돌린 대공자가 물었다.
“보아하니, 그 혼약처가 어딘지도 눈치채신 모양이오.”
“그렇습니다.”
“어디라고 생각하시오?”
짧게 침묵했던 염 장로가 입을 열어 답했다.
“북부 대장군(北部大將軍)의 가문, 모용가(慕容家)."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오.”
* * *
어느새 정오가 되었고, 대공자는 식사도 할 겸,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자고 했다.
염 씨 부녀에게는 두 사람만 따로 조용히 식사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했는데, 이는 대공자의 배려였다.
그가 아는 염백하는 환자였고, 길어지는 대화와 끊임없는 긴장 속에 그녀의 안색이 점점 나빠졌기 때문에 내린 판단이었다.
"하아…."
물론 염백하는 환자였지만, 정작 그녀의 안색이 나빠진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
“휴우….”
깨작거리며 식사를 마친 염백하는 길게 한숨을 연발했다.
“하필이면 '그 모용가'라니.”
그녀는 투덜거리듯이 중얼거렸다.
“저 같은 건 상대도 되지 않네요…. 싸워 보기도 전에 패배했어요. 그것도 대패(大敗).”
식사를 마치고 입을 닦던 염 장로가 쓴웃음을 지었다.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다니. 너답지 않구나.”
“으으…,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염백하가 볼을 잔뜩 부풀렸다.
“모용가는 천 년이 넘게 북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온 가문이잖아요.”
현재에 이르러서는 '모용가가 없이는 북방 영토도 없다'고 할 정도로, 중원국에서 차지하는 모용가의 위치는 중요했다.
“중원국의 황실에서도 왕족(王族)급의 대우를 해 주는 대가문인데. 왕가(王家)라고요! 왕가! 그런 모용가의 여식(女息)이라면, 공주(公主)라니까요!”
염 장로가 그런 딸을 놀리듯이 말했다.
“그러는 너 또한 어엿한 한 명의 공주가 아니더냐?”
집법희(執法姬)라는 그녀의 별명을 가지고 한 농이었다.
“아버지!”
딸이 쌍심지를 켜자 염 장로는 직접 차를 준비하며 딸의 기분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머리를 식힌 염백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대공자님과의 본격적인 협상만 남았어요.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요?”
무거운 주제였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주제이기도 했다.
한참을 생각에 잠겼던 염 장로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는 힘들겠구나.”
"...."
염백하는 무어라 말을 꺼내려다 그저 입술을 깨물었다.
“대공자의 능력이 내가 상정했던 바를 한참 넘었다.”
염 장로는 한숨 섞인 어투로 말했다.
“나는 세간의 소문 따위에 흐려지지 않았고, 대공자의 능력을 얕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말을 흐리는 아버지 대신 염백하가 입을 열었다.
“…오늘 본 대공자님은, 제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대공자님과 너무나 달랐어요.”
염 장로는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본가(本家)의 장로들조차, 대공자의 힘은 신산(神算)이라 할 만한 지략에서 나오니, 칩거가 끝난 이후에는, 세력이 없는 독자(獨自)로 남아 판을 흔드는 계책에 집중할 것이라고 봤다.”
그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하지만 전부 틀렸어.”
그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연령(年齡)과 연륜(年輪)을 초월했어.”
그의 말소리는 조곤조곤했지만, 염백하에게 그것은 비명처럼 들렸다.
“그는 이미 한 명의 완성된 군주(君主)나 다름없다.”
좌중을 쥐고 흔드는 기이하고 압도적일 정도의 기백(氣魄).
대화에서 주도권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언변(言辯).
도무지 그 심중을 짐작할 수가 없는 깊은 심계(心界).
그렇다고 대공자가 고독한 군왕(君王)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밀려드는 축하 서신과 선물에서도 알 수 있는, 도대체 어떻게 형성했는지도 모를 드넓고 깊은 인맥.
그리고 아마도 그 인맥으로 형성된 강력한 정보망.
어머니인 태상대부인의 유산(遺産)에서 비롯된, 낙양 하층민에게 받는 압도적인 지지.
검가 내부는 또 어떠한가.
원각정을 지키는 특임대에서 드러나는, 원로원(元老院)과의 관계.
염 장로는 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어째서인지 대공자라면 학을 떼고 보는 늙고 오래된 장로들.
그나마 무사들에게는 무시를 당하는 대공자였지만, 무슨 재주인지 이미 그는 검가의 수위무사 중 일인인 탈명귀검의 충성을 얻었다.
우수한 시녀들과 잠재력이 뛰어난 하녀들로 이루어진 검대도 가졌다.
원래부터 우애가 좋던 사공자와의 끈끈한 협력 관계는 말할 필요 도 없었다.
그것이 이제 막 칩거를 끝낸 대공자가 드러내 보인 전력이었다.
“그러나….”
염 장로의 눈가에 결연함이 솟아 올랐다.
"이 아비는 모든 것을 내어 주고 끝내지는 않겠다.”
* * *
같은 시각, 원각정의 식당.
원각정의 인원들이 교대해 가며 어울려 식사를 하는 넓은 공간.
"...."
염 장로의 무사장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는 아까부터 밥 한술을 제대로 입에 넣지 못하고 있었다.
“왜 안 먹나?”
그 이유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인물 때문이었다.
“맛이 없어?”
대공자의 말에 주변에 앉아서 재잘거리며 밥을 먹던 하녀들의 시선이 일제히 무사장을 향했다.
“아, 아닙니다! 맛있습니다!”
그는 허겁지겁 입에 음식을 구겨 넣었다.
무슨 맛인지 구별도 되지 않았다.
“체할라. 물이라도 좀 마셔.”
대공자가 인자한 표정으로 손수물을 따라 주자, 무사장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당신만 없으면 안 체한다고!’
* * *
염 장로는 원각정의 시녀에게 건네어 받은 쪽지를 말없이 딸에게 보여 주었다.
“대공자께서 독대(獨對)를 원하시는군요.”
염 장로의 후계자를 위한 참관은 이제 끝이었다.
그 이야기는 곧 염 씨 부녀의 운명이 걸린 일전(一戰)의 끝이 다가온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염 장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오마.”
염백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새로운 전략은 있으신가요?”
기존에 준비해 온 전략들은 이미 쓸모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염 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가 멀리, 창밖으로 보이는 대공자의 집무실로 시선을 향했다.
“일단 솔직하게 부딪쳐 볼 요량이다.”
염백하는 떨려 오는 손을 식탁 아래에 감추며, 최대한 밝게 웃어 보였다.
“다녀오세요!”
그녀의 안색은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 * *
원각정 집무실.
정아가 다기를 새로 준비하며, 보고했다.
“주인님께서 그 상인의 정신을 굴복시킨 순간, 염 장로 또한 전의(戰意)를 거의 상실했었사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버텨 냈고 꺾이지 않았다.”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 있던 연소현이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사지(死地) 속에서도, 활로(活路)를 찾아내고야 마는 자.”
결코 포기하지 않는 정신.
“상승(常勝)의 장수들이 공통으로 가지는 미덕이기도 하지.”
찬사였다.
현재로서는 적일지 아군일지 정해지지 않은 자를 칭찬하는 연소현이었다.
“…또 그런 속 편한 말씀을.”
바닥을 청소하던 일령이 입술을 비죽였다.
“주인님께선 염 장로를 휘하에 두고 싶으셨던 것이 아니셨사옵니까?”
당돌한 그녀의 말에 연소현이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본가의 정치판에서 장로 한 명이 가지는 힘은 천군만마(千軍萬馬)와도 같다.”
정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께서는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장로원에서는 한 명의 우군도 없으시니 말이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건지, 전혀 모르겠네요.’
일령은 한숨을 쉬고, 마저 바닥을 닦았다.
동가휴가 홀린 식은땀에서 나는 냄새에 그녀의 심기는 매우 불편한 상태였다.
“염 장로가 이쪽으로 향하고 있사옵니다.”
정아가 벽 너머 먼 곳을 바라보며 고했다.
연소현은 손바닥을 천천히 비비면서, 활짝 미소 지었다.
“자. 염 장로. 그대가 찾아낸 활로는 무엇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