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편 사석(死石)
염 장로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 다.
“…북방의 전쟁대상이 가진 수완이라면, 충분히 해 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허나….”
북방의 전쟁대상, 동가휴가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염 장로의 말을 끊었다.
“이 동가휴가 반드시 해내겠나이다!”
자신의 말을 끊어 버리는 태도에 화가 나기도 하련만.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염 장로는 동가휴의 말이 끝나자 자신이 하던 말을 이었다.
“허나, 이자의 실력과는 별개로 그 신뢰성에서는 문제의 소지가 다분합니다. 이자는….”
그때 다시 동가휴가 외쳤다.
“이 동가휴가 아니면 북방의 어떤 상인도 믿을 수가 없는…!”
“동가휴.”
우렁차게 외치던 동가휴는 대공자의 한마디에서 느껴진 한기(寒氣)에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예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슬며시 고개를 들어 눈치를 살피려던 그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대공자와 두 눈이 마주쳤다.
“히, 히익?!”
동가휴는 다시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주, 죽을죄를…!”
대공자는 염 장로를 바라보며 손짓했다.
“계속해 주시오."
염 장로는 침착하게 다시 한번 말을 이어 나갔다.
“…이자는 북방 전쟁 당시, 적대 부족에도 군수품을 납품했다는 혐의를 받았으며, 증거가 부족해 처벌하지 못했을 뿐.”
"이, 이이...!"
동가휴는 몇 번이고 염 장로의 말을 끊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했지만,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대공자의 시선에 결국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지금 이 시각까지도 여전히 북방의 군사 당국에서는 이자에 대한 조사를 이어 나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염 장로의 발언이 끝나자, 대공자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끔찍한 일이군. 전쟁 중인 적대국에 군수품을 판매하거나 대여한 행위는 반역죄에 해당하지.”
그 말에 동가휴의 낯빛이 썩어 들어갔지만, 대공자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북방 군사 당국의 조사라고 했소?”
예. 대장군부(大將軍部) 직속의 정보기관이 조사를 담당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 대장군부의 직속 정보기관이라면 유능한 조직이지.”
“그러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이자가 임무를 수행한답시고, 대공자님의 이름을 등에 업은 채, 북방에서 무슨 짓을 벌일지는 하늘만이 아시겠지요.”
염 장로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몇몇 인사를 추천하려 했지만, 대공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장군부의 유능한 조직이 몇 년째 수사 중인데도, 여전히 이자가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을 보니. 이자의 능력이 생각 이상으로 유능한 듯하오.”
동가휴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유능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염 장로는 표정을 굳힌 채로 잠시 말을 고르다가, 이내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반드시 제어를 위한 '고삐'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염 장로는 가증스럽다는 표정으로 동가휴를 바라봤다.
“이자는 그런 약점 따위 남겨 두지 않을 정도로 유능하기도 합니다.”
대공자는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잠시 실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염백하는 무릎을 꿇고 엎드린 늙은이가 눈알을 이리저리 데룩데룩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느꼈다.
'매우 유능하나, 삿되게 유능한 자.’
그녀는 대공자에게로 눈을 돌렸다.
'과연 대공자께서는 이자를 통제할 방도가 있으실까?’
지금 동가휴는 그녀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과할 정도로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추한 늙은이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상 그는 북방의 상인중 손에 꼽히는 영향력을 지닌 자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지금처럼 염 장로의 눈치를 보지 않을 정도로 강한 금력(金力)의 소유자였다.
보통은 당연히 그런 이를 중한 임무에 쓰는 것을 재고하는 것이 맞겠다.
그러나 염백하는 대공자라면 '무언가' 방도가 있으리라 기대했다.
“동가휴.”
대공자가 동가휴를 호명했다.
“예! 대공자님!”
“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어떤 사사로운 이익도 탐하지 않겠다고 맹세할 수 있겠는가?"
그랬기에 대공자의 이 어처구니 없는 물음이 나왔을 때, 염백하는 당황했다.
동가휴는 즉시 답했다.
“물론이옵니다, 대공자님! 원시천존(元始天尊)께 맹세코, 이 동가휴만 믿어 주신다면 반드시….”
“이상하군.”
대공자가 말을 끊었다.
“자네는 텡게르를 믿는 자가 아니던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던, 동가휴가 재빨리 입을 놀렸다.
“무, 물론, 텡게르께도 맹세할 수 있사옵니다요! 저 같은 천한 상인의 신앙이 무엇 그리 특별할 것이 있겠습니까? 금전운만 따르게 해주신다면야, 그것이 텡그리이든, 원시천존이든, 아미타불(阿彌陀佛)이든 주워섬기는 것이지요!”
“그렇겠지.”
“그러믄요!”
헤헤헤, 하고 웃으며 무릎을 꿇은 채로 손을 비비는 동가휴였다.
대공자의 두 번째 질문은 더욱 황당했다.
“그렇다면 자네는 이 임무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더러운 오물이 가득한 진창이라도 뒹굴 정도로 헌신적일 수 있겠는가?”
그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그 얼굴 가죽 두꺼운 동가휴의 시선마저 흔들릴 정도였다.
“무, 물론이옵니다.”
“그렇군.”
대공자는 자신이 질문해 놓고도 딱히 동가휴의 대답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자네는 이 맹세를 반드시 지키겠지?”
"물론이옵니다! 이 맹세를 지키지 못한다면,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타 죽을 것이옵니다!”
보다 못한 염 장로가 나서서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무언가가 그의 기감(氣感)을 건드렸다.
밖에서부터 날아든 전음(傳音)이었다.
하지만 대처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공자에게로 향한 전음을 도청(盜聽)하는 것은, 그 정도 되는 고수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그가 전음을 도청하는 데 성공했다면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으리라.
'전부 거짓말입니다, 주인님.'
용안(龍眼)을 지닌 시녀장, 정아의 전음을 들은 대공자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대공자는 방금 떠올랐다는 듯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꺼냈다.
“갑자기, 머나먼 북부 초원의 어느 만호장(萬戶長)에 대한 소문이 떠올랐다.”
대공자는 어딘가 과장된 동작으 기억을 되짚는 시늉을 했다.
“그는 아버지를 비겁하게 살해한 숙부(叔父)를 사로잡아 살점을 만갈래로 찢기 전에는 손에서 칼을 놓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더군.”
염백하는 뜬금없는 대공자의 말도 의아했지만, 이제까지 틈만 있으면 떠들어 대던 동가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에 더욱 큰 의문을 느꼈다.
“그 만호장에겐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있는데, 만호장의 맹세에 따라 칼과 함께 자신들의 오른손을 붉은 천으로 묶고, 복수가 끝날 때까지 풀지 않겠다고 했다고 들었네.”
몸을 돌려 먼 곳을 바라보는 대공자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짙은 미소가 어렸다.
“그들은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 붉은 천을 풀지 않고 있다 하니, 놀랍지 않은가?”
그녀는 동가휴를 돌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
노인은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얼굴에서는 핏기라고는 찾아볼수도 없었다.
게다가 식은땀은 또 얼마나 흘리는지, 의복 전체를 흠뻑 적실 정도였다.
염백하는 깨달았다.
'이자가 그 이야기 속의 그자로구나!’
경악한 것은 염 장로도 마찬가지였다.
'동가휴는 애초에 중원국 출신이 아니었던 것인가!’
그의 시선이 대공자를 향했다.
'도대체 대공자는 이런 정보를 어떻게 손에 넣은 것이지?’
대공자를 향한 시선이 흔들렸다.
'대공자는 이 정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동가휴를 미리 대기시켜 놓았던 것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염 장로가 오늘로 방문일을 잡은것은, 오늘 염 장로 본인이 단독으로 결정을 내린 사안이었다.
'애초에 북방에서 동가휴가 전언을 듣고 낙양에 와서 대기하려면 아무리 적어도 몇 달의 시간이 걸렸을 터.’
게다가 애초에 대공자가 동가휴를 준비했다면, 그 사실을 숨길 이유도 없었다.
염 장로가 생각하면 할수록 복잡해지는 머리를 채 정리할 시간도 없이, 대공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가휴.”
동가휴는 급히 대답하려 했지만, 입에서 나오는 건 바람 새는 소리뿐이었다.
대공자는 천천히 책상을 지나쳐 초라한 노인 앞에 섰다.
“이 임무에 네 가치 없는 목숨을 걸라고까지는 명하지 않겠다.”
대공자는 그에게 결코 거절할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반드시 너는 이 임무를 성공시켜 낼 것이다.”
대공자가 노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렇지, 동가휴?”
대공자의 눈동자가 칼날처럼 가늘어졌다.
“아니. ’우구라이 부족'의 '아루쿠타이'라 불러야 하나?”
노인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대공자의 목소리는 어째서인지, 오래전 자신이 뒤에서 찔러 죽였던, 형님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자신을 세상 누구보다도 신뢰했던 형님의 목소리!
노인은 발작처럼 외쳤다.
“바, 반드시 명을 받들어 성공시켜 보이겠나이다!”
노인은 단단한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반드시!”
찧고 또 찧었다.
“반드시!”
피가 튀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반드시!”
그때 대공자의 귓가에 다시 전음이 날아들었다.
그가 기다리던 내용이었다.
'진실입니다, 주인님.'
대공자 연소현의 입가에 지극히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언뜻, 상어의 그것을 연상하게하는 톱니 칼날 같은 이빨들이 드러났지만, 집무실 내의 누구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
제암진천경이 들려주는 원혼의 목소리와 금안의 마녀가 가진 용안이 어우러져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연소현은 방을 가득 메운 원혼들에게 마음속으로 고했다.
'이 벌레 같은 자는 유산을 독차지하기 위해 친족을 살해한 배신자이며, 탐욕을 위해 수많은 마을을 불태웠던 학살자이고, 영향력을 얻기 위해 국가를 배반한 반역자.'
그것은 선고(宣告)였고,
'결국, 그 쓸모가 다하는 날이 오면, 몸이 만 갈래로 찢어져 죽게 될 것이니.’
그것은 선언(宣言)이었다.
무심한 하늘을 대신한 천벌의 지상 대행자.
암천존자(暗天尊者)의 시퍼런 귀기(鬼氣)가 그 눈 깊은 곳에서 선명하게 불타고 있었다.
* * *
동가휴라는 가명을 쓰던 북방의 전쟁대상은 구르듯이 집무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체통 하나 없는 모양새는 물러난다기보다는 사지(死地)에서 도망치는 꼴이었다.
묵직한 침묵의 시간이 흐른 뒤, 염 장로가 입을 열었다.
“목줄을 채운 것은 분명하나….”
그의 말투는 조심스러웠다.
“...저자가 겁을 먹고, 잠적하지는 않겠습니까?”
집무실 내에서 유일하게 편한 자세로 있던 대공자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우구라이 부족의 '만구다이'들은 아주 약간일지라도 신뢰할 만한 단서만 주어진다면, 지옥 끝까지라도 저자를 쫓을 것이오.”
대공자의 입가에 띤 미소는 명백히 즐거움을 담은 그것이었다.
“이미 죽었다면 사체라도 매달아 끌고 갈 것이고, 백골이 되었다면 뼛가루 한 움큼이라도 찾아갈 것이오.”
그 미소에서는 혈향(血香)이 짙게 풍겼다.
“그리고 저자는 자신이 손에 넣은 부(富)를 결코 버리고 달아날수 없을 것이고.”
대공자는 자신의 손을 펼쳐 보였다.
“저자가 이 집무실에 들어선 그 순간부터, 저자의 목숨줄은 이미 내 손 위에 있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