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편 단수(單手)
“이 서신들을 원하시오?”
염백하는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대공자의 미소는 마귀의 유혹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녀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를 생각했다.
하지만 두 번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 염 장로의 선에서 어떤 수를 동원하더라도, 결국 사업권을 따낼 요령은 없었다.
그것은 거의 일 년째 손발 놓고있는 수준이나 마찬가지인 아버지의 현 상황만을 봐도 알 수가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대공자의 말처럼, 남은 것은 바닥 모를 추락뿐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대공자에게 빚을 지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 또한 뻔했다.
현재 염 씨 부녀는 앞으로의 운명을 결정짓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그 협상이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에 구명지은(救命之恩)에 가까운 빚을 진다는 것은, 협상의 의미조차 상실하게 됨을 뜻했다.
하지만.
지금은 빚을 지든 말든, 당장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뒤가 없다면, 대공자와의 협상이 어떻게 되든, 검가 내 정계에서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됨을 뜻했으니.
그리고 염백하의 마음이 대공자가 내민 손을 잡는 쪽으로 기울었을 때, 염 장로의 입이 열렸다.
“거절하겠습니다.”
담담한 표정 속에서, 단호한 거부의 의사가 드러났다.
'아버지?!’
염백하의 얼굴에는 경악이 드러났고, 대공자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정말이오? 이 서신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오?”
'아버지! 지금이라도…!’
염 장로는 아예 두 눈을 감고, 팔짱을 꼈다.
“필요 없습니다.”
그 말에 대공자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옳소. 옳소. 그대의 선택이 실로 옳소이다.”
그 말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은 것은 염백하뿐이었다.
'어째서?’
그때 대공자가 염백하를 바라보았다.
“소저는 이유를 아시겠소?”
“이유 말입니까…?”
잠시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염백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소, 소녀는 잘 모르겠사옵니다.”
대공자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0'과 '0과 가까운 수'의 차이요.”
수수께끼의 답이 또 다른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지만, 영민하기 짝이 없는 염백하는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여기서 대공자님께 빚을 지는 것은 완전한 패배이지만, 임무의 경우엔 대공자님께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셨기에 아주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존재한다는 말씀이시옵니까?”
“훌륭하오.”
대공자는 우아한 태도로 짧은 박수와 함께 말했다.
“역시 염 장로가 후계자로 선택한 인물다운 답변이었소.”
“과, 과찬이시옵니다.”
그렇게 겸양을 표하면서도, 염백하의 머릿속에는 또 새로운 의문이 자리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대공자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후계로 선택했다는 것을 알아채신 것일까?’
그녀는 곧 스스로 대답을 찾았다.
'이 자리에 동석하고 있으니까.'
대공자는 마치 그녀의 마음속이라도 읽은 것처럼 말을 이어 나갔다.
"그대는 알아야 하오, 소저. 지금 그대의 아버지는 염씨 가문의 전체 그리고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수하들 모두의 운명을 그 등에 지고 있다는 것을.”
염백하가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
자신은 아버지의 장로직 하나만을 놓고도 마귀의 손을 잡는 선택으로 마음이 기울었었다.
하지만 자신의 아버지는 대공자가 말했던 그 모든 부담 속에서도, 활로를 찾는 선택을 해냈다.
"기억하시오. 그대의 아버지가 내렸던 그 선택. 그 선택이 바로 진짜 승부사의 선택이라는 것을.”
염백하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사옵니다."
그랬다.
자신의 아버지는 이 불리한 협상 자리에 자신의 후계자를 데려왔다.
운명이 걸린 협상에서 자신의 바닥이 얼마나 드러나게 될지, 얼마나 굴욕을 겪어야 할지, 알 수 없으면서도.
그 모든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그녀를 데려온 것이었다.
염백하의 눈에 모든 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명백한 의지가 한층 더 깊어졌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잠시 지켜본 대공자는 염 장로를 향해 가볍게 미소 지었다.
“사실 물어보기는 했지만, 이 일에 그대의 의사는 상관없소.”
황당한 대공자의 발언에, 과연 그 염 장로라도 당황한 기색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때 마치 노린 것처럼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께서 말씀하신 명단을 가 져왔나이다.”
“들라.”
시녀에게 명단이 적힌 명부를 건네받으며, 대공자가 말했다.
“앞서 말했듯이 이것은 그대의 축하에 따른, 내 나름의 보답을 하는 것일 뿐.”
염 장로는 그 호의조차 거절할 수는 없었다.
'도대체 대공자는 무슨 생각을…?’
염 장로가 도무지 알 수 없는 대공자의 심중을 헤아려 보려 생각에 잠긴 동안, 대공자는 빠른 속도로 명부를 넘겼다.
“음. 이자가 좋겠군.”
대공자는 시녀를 불러, 자신이 고른 이를 데려오라 일렀다.
* * *
대기소의 구석 자리.
북방의 전쟁대상이 앉은 그 자리 주변에는 누구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멀리서 가끔 흘끔거리며, 노인의 동향을 살필 뿐, 감히 노인에게 접근하는 이는 없었다.
북방 영토에서 가장 거대한 군수 상단 중 하나의 주인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명성과 두려움이라는 것은 그러한 것이었다.
묵묵히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는 노인을 향해 그의 충직한 하인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식사도 거르시고 그리 앉아 계시기만 하시다가는 건강이 상하십니다.”
하지만 노인은 딴소리를 할 뿐이었다.
“혹시 아직 아무 곳에서도 연락은 없는 것이냐?”
“없습니다.”
“역시 대공자를 만나게 해 줄 연줄을 가진 자가 쉽게 연결을 해 줄리가 없는가.”
"...."
노인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그저 텡게르께서 가호라도 내려 주시길 바라며, 기다려 보는 수밖에.”
노인은 탄식처럼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 오랜 세월을 초야에 파묻혀 있던 이를 이렇게 만나기가 어려워서야.”
주인의 고집에 한숨을 쉰 하인이 물었다.
"그 대공자라는 이를 만나는 것이 그리도 중한 일입니까?”
“그렇다.”
노인은 단언했다.
“대공자가 칩거를 풀고 나온 이 시기에 내가 낙양을 지나가고 있었던 것부터가 천운이다.”
노인이 이죽거렸다.
“다른 북방의 상단 놈들도 지금 쯤이면,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채비를 갖추고 있겠지.”
“대체 검가의 대공자와 북방이 무슨 관계가 있기에….”
그때 하인의 말을 끊는 목소리가 있었다.
“당신이 북방의 전쟁대상이라 불리는 동가휴입니까?”
낭랑하면서도 꾀꼬리 같은 목소리였다.
그때야 동가휴와 그 하인들은 그들이 자리 잡고 있던 층 전체가 조용한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인들이 급히 비켜서자, 이전까지 그들이 볼 수 있었던 원각정의 하녀복과는 격이 다른 복식을 갖춘 여인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 이 노부가 동가휴다.”
원각정의 선임시녀, 일령은 오만한 눈으로 노인을 내려다보며 통보했다.
“나의 주인이신 대공자님께서 그대를 보고자 하시니 즉시 따라오시지요.”
노인의 두 눈이 번뜩였다.
* * *
대공자가 시녀에게 일러 준 이름을 들은 염 장로는 깊게 침음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시녀가 다시 데워 온 차를 음미하는 대공자에게 입을 열었다.
“대공자님. '그 노괴'는 다루기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 차라리 제가 직접 대공자님의 서신을 들고 북방에 가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대공자는 고개를 저었다.
"이 일은 단지 수완이 좋은 것이상으로, 상대의 자존심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오.”
그는 염 장로를 바라보았다.
“북부 전쟁의 영웅이자 낙양검가의 장로는 그 존재만으로 곽규 장군과 총독의 자존심을 자극할 거요. 누가 먼저 손을 내밀기 더욱 어렵게 만들 뿐이지.”
대공자가 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이 '매파(媒婆)' 역할을 해야 할 이는 스스로를 낮추고, 때론 진홁탕을 뒹굴 수도 있어야 하는바. 그대와는 맞지 않소.”
염 장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노괴는 북방에서 위세가 등등하고, 오만방자하니, 이런 섬세한 작업에는 맞지 않는 인선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소?”
대공자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대가 말하는 노괴를 본 대공자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할 인물이라고 생각하오만?”
염백하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일찍이 아버지로부터 북방의 전쟁대상이 가진, 자자한 악명을 익히 들어 왔기 때문이었다.
염 장로가 답답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그 괴팍한 노괴가 그럴 리가….”
그때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명하신 대로 동가휴라는 자를 데려왔사옵니다.”
“들라 하라.”
대공자가 한번 직접 보라는 뜻으로 손을 들어 집무실의 출입구를 가리켰다.
이윽고 집무실의 문이 열리자마자, 노인의 그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성량이 집무실에 울려퍼졌다.
“대-낙양검가의 적손(嫡孫)이신, 대-공자님의 칩거가 끝난 것을 경축(慶祝)-드리며, 앞으로 부디 운수대통(運數大通)하시어, 만수무강(萬壽無疆)하시옵고-, 만사형통(萬事亨通)하시기를-, 기원하옵나이다-!”
입구에서 들어서지도 않은 채, 그 악명이 자자한 노괴가 넙죽 큰절부터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염백하는 맹세컨대, 태어나서 그 근엄한 자신의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황당해하는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 * *
집무실 안에 들어오고 나서도, 한참 동안 도가(道家)의 온갖 신(神)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대공자를 찬양하다시피 한 동가휴였다.
그러면서도 이미 북부 전쟁을 통해 인연이 있었던 염 장로를 향해서는 그저 까딱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원래 그의 성정을 짐작하게 했다.
“내가 왜 너를 불렀는지, 짐작하고 있겠지?”
그러자 노인은 다시 한번 우렁찬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감히 이 비천한 상인은! 높디높으신 대-공자님의 지혜를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으니…!”
대공자가 혀를 찼다.
“영 쓸모가 없는 자였군.”
대공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 엎드린 노인이 외쳤다.
“물론 북방 사(四) 개 지역의 군사시설 보수 사업권 때문이 아니겠사옵니까!”
집무실에 앉아 있는 염 장로의 얼굴을 보자마자, 추측해 냈던 동가휴였다.
과연 북방의 전쟁대상이라는 말은 허명(虛名)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 그렇다.”
대공자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동가휴를 향해 물었다.
“네가 일을 해낼 수 있겠느냐?”
잠시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노인이 단장(斷腸)의 고통을 토하듯이 외쳤다.
“…소인을 죽여 주시옵소서!”
대공자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동가휴에게 두 통의 서신을 던졌다.
“그렇다면 이것이 있다면 가능하겠느냐?”
엎드린 자세 그대로 얼른 서신을 펼쳐 내용을 읽어 내린 동가휴가 외쳤다.
“대-공자님의 뜻을 받들어一, 이- 한 몸 바쳐 반드시! 그 큰 뜻을 이루어 내겠사옵니다!”
“역시 두 통을 전부 주는 것은 과했나…?”
대공자가 슬쩍 다가가 한 통의 서신을 뺏으려 들자, 노인이 바닥에 머리를 찧기 시작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대공자님! 부디 이 불쌍한 노인을 가엽고 불쌍하게 여기시어…!”
대공자가 낄낄거리며, 염 장로를 바라봤다.
“염 장로. 이미 문제는 해결된것 같소만?”
염 장로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무어라 말을 꺼내려 할 때, 동가휴가 다시 한번 외쳤다.
“부디! 대-공자님의 충실한 수족이나 마찬가지인 이 동가휴만 믿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