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04화 (104/350)

제4편 기력(棋力)

최소한의 자연광만이 들어오게 설계된 집무실 내부는 놀라울 정도로 정갈했다.

그 흔한 서화(書畫) 한 점 걸려있지 않았고, 사치스러운 공예품(工藝品)도, 실내를 장식하기 위한 비단조차도 없었다.

지극히 실용적이고 사무적인 공간은 그렇게 텅 비다시피 하여, 그 주인의 성정을 추측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염백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오히려 이 풍경 자체가 그 주인의 심상(心象)을 투영하는 것일지도:'

운남(雲南)에서 들여온 검은 대리석이 바닥 전체에 깔려 위압감을 형성하고, 기둥들은 귀한 흑철목(黑 鐵木)을 통째로 사용했으며, 묵직하고 거대한 책상은 수령을 짐작하기 힘든 편백나무를 통으로 가공하여 옻칠한 작품이었다.

'극도의 절제 속에 명백히 존재하는 위엄.'

그녀의 예리한 눈이 실내장식의 의도를 추측하는 사이, 염 장로는 정중한 태도로 대공자 연소현에게 인사했다.

“본가의 장로, 염 모(某)가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염백하 또한 목소리의 떨림에 주의하면서 양해를 구했다.

"본가의 집법사자이자, 염 모의 여식이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몸이 불편하여 예를 충분히 표하지 못함을 가엽게 여기시어 부디 용서와 이해를 바랍니다.”

“이해하고말고. 전혀 개의치 않네.”

연소현은 빙긋 웃으며 손을 펼쳐, 염 씨 부녀를 위하여 준비된 의자를 가리켰다.

“그럼 이쪽으로.”

의자에서 일어나서 맞이하되, 방정맞게 앞으로 직접 나와 반기지 않고, 옷자락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로 손을 펼쳐 안내하는 동작.

그러면서도 꼿꼿하게 유지하는 등줄기의 반듯한 자세까지.

그 모든 동작은 정도에 맞추어 우아하며, 절도 있는 위엄이 깃들어, 그의 출신 성분(岀身成分)을 명 백히 드러냈으며, 그에 걸맞은 높은 교양 수준과 엄격한 교육 수준을 보여 주었다.

'그때와 완전 다른 사람이다.’

염백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전에 호두 마을에서 직접 만났던 무명옷의 소년 의원(醫員)과 지금 눈앞의 이 인물은 완전히 다른 인물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지금 자신과 아버지의 앞에 있는 인물은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대낙양검가의 '대공자' 연소현이었다.

* * *

대화는 순조롭게 이어져 나갔다.

염 장로는 대공자의 칩거가 끝난것을 축하했다.

준비해 온 선물을 직접 건네어 받은 대공자는 기뻐하며 감사를 표했고, 염 장로는 대공자의 건승(健勝)과 성취(成就)를 기원했다.

예민하거나 노골적일 수 있는 요소들이 곳곳에 있었지만, 두 사람은 교묘히 그런 소재는 피했다.

대화는 지극히 사교적인 수준에서 머물렀으며, 필요한 경우,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수사를 통해 완만하게 치러졌다.

염백하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호의적인 분위기였다.

그녀는 속으로 기뻐하면서도, 두 사람의 대화 한 마디 한 마디를 귀담아들었다.

이러한 경험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었고, 그녀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염씨 가문의 가주가 되었을 때, 틀림없이 그 빛을 발하리라.

“그러고 보니, 염 장로의 업무쪽은 어떻소?”

대공자는 품격 있는 태도로 시녀가 준비해 준 차향을 음미하며,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내 듣자 하니, 북방에 관련된 매우 중요한 임무를 수행 중이시라고?”

염 장로 또한 차를 즐기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제 사적인 일이라면야 사소하다 치부하겠으나, 본가의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보니, 무엇이든 중요한 업무라 생각하여 임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점이 있다고 들었소만?”

“경중(輕重)을 떠나 모든 일에는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지요. 그저 최선을 다해 수행할 뿐입니다.”

대공자는 간결하면서도 진정성이 느껴지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훌륭한 자세요 염 장로같은 분이 있으니, 본가의 미래가 참으로 밝다 하겠소.”

“부끄럽습니다.”

어쩌면 방금의 대화는 아직 실권이라고는 없는 대공자가 하기에는 경우에 맞지 않는 말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자리에 맞는 태도로, 염 장로는 그저 부드럽게 넘겼다.

하지만 대공자는 한 걸음 더 들어왔다.

“한번 어떤 임무인지 말씀이나해 보시지 않겠소? 본 대공자가 힘이 없다 하나, 북방에 본가와 관련하여 어떤 문제가 있는지 궁금해서 그러하오.”

찻잔을 다시 올려놓던 염 장로의 손이 잠시 멈춰 섰다.

그러나 자신이 맡은 임무 자체가 딱히 기밀 사항도 아니며, 대공자가 알아보려 하면 얼마든지 알아볼수 있는 사항이었기에, 최대한 자연스럽게 설명을 해 나갔다.

약간 몸을 당겨 앉아 염 장로의 설명에 조금씩 추임새를 넣어가며 듣던 대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정리하자면, 북방 전쟁이후 대대적인 보수공사에 들어가야 할 성곽(城廓)및 관문(關門)에 대한 사업권을 따내야 하는 임무로군.”

“그렇습니다.”

대공자가 한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사업자 선택에 대한 최종 권한을 가진 곽규 장군(將軍)과 해당 지역의 행정적 책임자인 북방 자치구 총독(總督) 사이에서 난항을 겪고 있다고요?”

염 장로는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렇습니다.”

“황도(皇都)에서는 결정권을 현장으로 미루는 상황이고?”

“아무래도 섭섭하게 해선 안 될 정도의 권력을 가진 두 사람이다보니….”

“어려운 문제가 되었구려.”

“그저 최선을 다할 따름입니다.”

염백하도 속으로 한숨을 깊게 쉬었다.

사실 이 문제는 대화에서 드러난것보다 훨씬 더 깊고 어려운 문제였다.

원래도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장군가와 총독 간의 골은 이번 전쟁을 계기로 견원지간이 되었다.

그 사이에서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는 기실,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한쪽을 선택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한쪽의 승낙을 받아 봤자, 자존심이 상한 반대쪽에 의해서 영영 공사는 진행되지 않을 테니.

게다가 저 막강한 권력자들의 알력 다툼 앞에서는 '북부 전쟁의 영웅'이라는 이름과 '낙양검가의 장로'라는 직위는 큰 소용이 없었다.

“이거 곤란하시겠소.”

염 장로는 다시 부드럽게 넘기려했다.

“제게 협력하는 장로들이 몇 있으니, 가까운 시일 내에 좋은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하지만 연소현은 그 대화를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다면, 그대가 곤란해지겠지?”

염 장로는 여기서 덜컥, '고견이 있으십니까?’라고 물어볼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하하. 그렇게 된다면 다 제 복이 부족한 탓이겠지요. 이번에 복채를 든든히 내고 굿이라도 크게 벌여 보겠습니다.”

농으로 소재를 넘기려 한 염 장로였지만, 대공자는 이례적으로 집요했다.

“이번 임무를 실패한다면, 장로로서의 정치적인 역량을 크게 의심받게 되겠지. 그러니 이미 타 파벌에서는 이 문제를 물고 늘어지고 있을 것이고….”

염 장로는 더 이상 대화를 돌리려는 시도를 멈추고 가만히 대공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대공자는 염 장로의 시선을 모른 척한 채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파벌 내에서도 염 장로의 위치가 위태로워지겠어. 여타 파벌과는 달리 중립 계파에서는 명분보다는 실리가 중하니.”

대공자는 은근한 눈빛으로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를 지었다.

그 스산한 미소에, 염백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지금 대공자가 드러낸 저 표정은, 처음으로 대공자가 내보인, '날것' 그대로의 표정이었다.

“화산의 검군(劍君)을 꺾고 이례적인 승진으로 장로가 되었고, 이후 북방 전쟁에서의 공훈은 훌륭했지.”

대공자는 자신의 찻잔을 긴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시라도 읊듯이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전쟁 자체의 의미가 사라졌고, 공훈은 퇴색했지. 이후 '전쟁 자문관'으로 활약할 상황 하나없이, 낙양에 갇힌 용장(勇將)은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난제,속에 휘말려 위태로운 형국이 되니….”

염 장로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고자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대공자.”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고, 위협적이었다.

부드러운 분위기는 끝났다.

염백하는 침을 삼키는 것도 잊었다.

두 사람은 어떤 기세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창칼이 직접 오가는 것보다도 살벌한 분위기가 집무실을 짓눌렀다.

잠시 염 장로의 묵직한 표정을 마주하던 대공자가 입을 열었다.

“도와주겠소.”

"무슨...."

염 장로가 무어라 말을 꺼내려다, 그대로 삼켰다.

쉬이 대답해도 좋을 상황이라는 판단이 전혀 서질 않았다.

염백하도 눈에 불똥이 튈 정도로 머릿속 주판을 튀겼다.

“도와주겠다는 말이오.”

대공자가 길고 곧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본 대공자가….”

그러고는 염 장로를 가리켰다.

“그대를.”

한참 후에야 염 장로는 말라오기 시작한 자신의 입술을 달싹일 수있었다.

“…대공자께서는 무엇을 원하십니까?”

하지만 대공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대가는 필요 없소.”

대공자는 자신의 의자에 몸을 묻으며 두 손으로 깍지를 꼈다.

“염 장로는 본가의 장로 중, 나의 칩거가 끝난 것을 처음으로 직접 와서 축하해준 이가 아니던가.”

대공자의 입가에 길게 호선이 그어졌다.

“그러니 감사함을 담은 본 대공 자나름의 답례라고 여겨 주시오.”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에 염 장로는 급히 시간을 벌어 보려 했다.

“그것은 너무 과한….”

하지만 대공자는 들은 척도 하지않고, 밖을 향해 외쳤다.

“게 누구 있느냐?!”

즉시 시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원각정 대기소에 있는 이들의 명단을 가져오거라.”

“명 받들겠사옵니다.”

“대공자님….”

염 장로가 무어라 말을 꺼내려했지만, 대공자는 책상 위의 문방사우(文房四友)를 당기더니 거침없이 무언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곽규 장군은 곽씨 가문의 장자로, 현재 북방 네 개 구역의 방위를 담당하고 있지. 그의 가문 내에서도 이례적으로 크게 출세한 인물이지.”

대공자는 글을 쓰면서 동시에 입을 놀리는 신묘한 재주를 선보였다.

“허나, 곽씨 가문의 가주는 아직 생존해 있는 곽규 장군의 아버지요. 과거, 모두가 불가능할 것이라던 북방 자치구의 평야 일대를 남김없이 개척했고, 전대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황도의 정치계에서 은퇴한 대단한 인물이지.”

염 장로가 얼떨떨해하며 답했다.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다만….”

대공자가 말을 가로챘다.

“다만 정계 은퇴 이후, 차기 가주인 장남의 입지를 위해서 가문의 일에 절대 참여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오?”

“그, 그렇습니다.”

연소현이 미소 지으며, 작성을 마친 문서에 자신의 낙관(落款)을 찍었다.

“하지만 내 서신을 받는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염백하는 자신도 모르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대공자님의 서신요?”

끼어들어서는 안 될 자리에 끼어 들었지만, 대공자는 개의치않고 대답해 주었다.

“과거 개척 사업이 난항에 봉착했던 그는, 본 대공자와 북방 대평야의 일괄적이고 체계적인 개간을 위해 많은 서신을 주고받았었지. 생산적이고 훌륭한 시간이었어.”

"예...?"

그 서신을 주고받았을시의 대공자가 몇 살이었는지를 계산해 보고는 당황한 부녀였다.

“그는 고집쟁이인 만큼이나 신의가 있고, 결코 은혜를 저버릴 자가 아니니, 조금의 수완만 발휘한다면, 겨우 토목공사 따위의 요청은 반드시 들어줄 것이오.”

대공자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두 번째 서신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염 장로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렇다면 총통은 어떻게…?”

“그는 더 쉽소."

대공자는 붓을 놀리며 말했다.

“그의 애정을 독차지하고 있는 어린 첩이 그를 움직여 줄 테니.”

“그 어린 첩과 대공자님의 관계는 어떻게…?”

그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어릴 적 작은 연이 있어 만난 이후, 지금도 그녀는 내게 연서(戀書)를 보내고 있다오. 나는 매번 그림으로 보답하고 있고.”

내용을 모두 쓴 대공자는 귀퉁이에 난(蘭)과 나비 한 쌍을 그려 넣었다.

순식간에 걸작이라 불릴 만한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치를 내게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총통을 설득해 내겠지.”

대공자는 두 부의 서신 위에 손을 올려놓고 염 장로를 바라보았다.

“어떻소?”

대공자가 짙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 서신들을 원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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