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포석(布石) (2)
염 장로에 의해 원각정 내로 함께할 인원이 호명되었다.
염 장로 본인, 염백하 그리고 염백하를 호위할 무사장.
모두가 들어와도 된다는 시녀장 정아의 말에도 염 장로는 '같은 식구끼리 폐를 끼칠 이유가 없다'라 며 최소한의 인원만을 선택했다.
노군사가 빠졌다는 점을 아버지께 말씀드리려던 염백하를 붙잡은것은 노군사 본인이었다.
“아가씨.”
원각정의 하녀들에 의해 행렬이 유도되기 시작한 어수선함을 타서 노군사가 빠르게 말했다.
“평생 군략만 파고 살았던 이 늙은이를 데리고 대공자의 안방이나 마찬가지인 원각정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초청이 아닌 이상, 시비를 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지만….”
노군사는 빠르게 말을 이어 염백하의 말을 끊었다.
"주군께서는 아가씨가 환자라서 대공자께 보여 드리려 데리고 들어가시는 것만이 아닙니다.”
노군사의 긴 눈썹 아래 깊은 눈이 염백하의 두 눈을 마주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가씨가 주군의 '후계자'이기 때문입니다.”
“...!"
염백하는 자신의 등줄기에 벼락이 타고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원각정의 하녀 중 하나가 웃는 낯으로 다가오자 노군사는 흘흘 하고 웃으며 그녀에게 당나귀의 고삐를 넘겼다.
“노군사….”
노군사는 염백하를 돌아보지도 않고, 하녀가 이끄는 대로 당나귀에 몸을 맡긴 채 멀어졌다.
'내가 아버지의 후계자….’
이제까지 해 본 적이 없는 생각이었다.
아버지가 점지해 주는 데릴사위와 결혼하여 자신의 명이 다하기 전에 아이를 낳는 것이, 자신의 자식 된 도리라 여겼던 그녀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인 노군사는 말했다.
'이 염백하가 아버지의 후계자다.'
그것은 곧 아버지의 뜻이리라.
그녀의 등줄기가 한결 꼿꼿이 펴졌고, 자신이 동경하는 대상과 상대한다는 생각에 위축되었던 그녀의 정신이 일시에 맑아졌다.
정문 바로 앞에서 기다리는 아버지를 향해 나아가는 백호의 발걸음도 덩달아 힘차게 움직였다.
* * *
염 장로 일행이 시녀장 정아의 안내를 받아 원각정 안쪽으로 사라지자, 정문을 지키던 특임대원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살벌하군.”
그에게 다가온 동료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그의 눈에는 아직도 담담하게 서있던 염 장로의 고요하고도 강렬한 기도(氣道)가 남아 있었다.
“염곽추, 아니. 염 장로는 끝도 없이 강해지는 것 같군.”
식은땀을 몰래 훔친, 동료 중 하나가 피식하고 웃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역시 본가의 수위무사라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다들 동감한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염 장로의 훈련소 동기였던 이가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과연 이 오른손이 남아 있었다면, 나도 그처럼 될 수 있었을까….”
원로원에서 마련해 준 최고급 의수가 덜그럭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동료 하나가 이죽거렸다.
“아마 자네 수준으로는 오른손이 남아 있는 게 아니라, 손이 하나 더 있었어도 무리가 아닐까 싶군.”
“뭐?!”
그때 안쪽에서 하녀 하나가 도도도 달려와 말했다.
“시녀장께서 말씀하시길 근무 중에 잡담은 금하라 하셨습니다.”
말을 마친 하녀는 고개를 꾸벅숙여 보인 뒤 다시 원각정 안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전해 준 말에 다들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정아 소저는 천리안이라도 지닌 것인지....”
주의를 받은 탓에 자세를 바로 한 동료 하나가 전음으로 대답했다.
'염 장로와 함께할 수준의 재능이라면, 정아 소저 같은 무사의 재능을 일컫는 것이겠지.'
다른 동료가 전음에 끼어들었다.
'그 나이에, 검을 잡은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여인이, 섬영찰나(閃影刹那)를 익혔다니.'
'아마 수년 안에, 어쩌면 그보다 빠르게 고수의 반열에 들게 될 걸세.'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 불리는 이공녀님의 뒤를 잇는 또 한 명의 천재가 본가에 탄생한 것인가…!’
* * *
원각정의 숲이 이루고 있는 강력한 결계급 진법(陣法)에 겁을 먹은 백호를 달래느라 시간을 허비하기는 했지만, 결국 숲길로 들어서는것에 성공했다.
“엄청난 진법이군요….”
염백하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에 시녀장 정아는 그저 미소를 지어 보이고,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생문(生門)이라고는 보이지도 않아.’
법전만큼이나 병법서에 익숙한 그녀였지만, 이 끔찍한 진법은 생문을 찾기는커녕, 읽어 내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그저 길이 있는 그대로 안내하는 정아의 뒤를 따를 뿐.
군략(軍略)에 통달(通達)했다는 노군사를 데려온다고 하더라도, 과연 여기서 생문을 찾을 수 있을지 그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아가씨, 저 하녀들을 보셨습니까?’
무사장의 전음에, 전음을 할 수 없는 염백하는 작게 고개만을 끄덕여 보였다.
정아의 뒤를 따르는 원각정의 하녀들은 누구랄 것 없이 모두 검을차고 있었다.
내공을 사용할 수 없는 염백하였지만, 군문(軍門)에서 자란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녀였기에, 눈짐작으로나마 하녀들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무사장의 전음이 이어졌다.
'다들 몇 년 안에 본가의 웬만한 검대에는 충분히 지원하고도 남을만한 수준입니다.'
염백하는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대공자가 저런 수준의 무사들을 하녀로 두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가 충분히 생각을 해 보기도 전에 숲이 끝났고, 본격적으로 원각정의 선경(仙境)과도 같은 경치가 펼쳐졌다.
하지만 염백하에게도, 무사장에게도 그 아름다운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자, 선물들의 분류는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나요?”
“시(詩), 서(書), 화(畵)는 이쪽, 이쪽으로 부탁드립니다.”
“선임시녀님. 장군가에서 보낸 선물은….”
수십의 하녀들이 정신없이 쌓여가는 선물들을 능숙한 솜씨로 처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하녀는 검을 차고 있었다.
’…저들 전부 비슷한 수준의 무사입니다. 특히 시녀복을 입은 이는."
무사장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전음을 이었다.
'…못해도 저희 검대의 무사들과 비슷하거나 우위에 있는 수준입니다. 저들의 숫자를 대강 추산해 본다면, 대략 저희의 두 배 정도로, 전체 전력은 웬만한 검대 하나와 비슷할 겁니다.'
그랬다.
이미 대공자는 직속의 검대를 소유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가씨도 아시다시피, 애초에 본가의 검대는 조금씩 모자란 개개인의 능력을 집단 전술로 극복하는것이 그 운용의 목적입니다.'
무사장이 뻐근하게 느껴지는 자신의 목덜미를 주무르며 전음을 이었다.
'그런데 제 눈짐작이 옳다면, 저 하녀들 개개인의 자질은 일반적인 검대에서 요구하는 수준을 상회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공자와 운명을건 협상을 벌여야 할 아버지, 염 장로의 가장 중요한 패(牌) 중 하나인 검대가 빛이 바랬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염백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 * *
아버지, 염 장로가 대공자와의 협상을 통해 얻어 낼 수 있는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물론, 최선은 딸도 치료받고, 정치적인 타격도 받지 않는 것.
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도저히 그럴 방법은 없어 보였다.
'아버지께 그런 절묘한 수가 있었다면, 이리도 비장하지는 않으실터.’
일이 잘 흘러가도, 다음과 같이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딸인 자신을 치료해 주기로 약조를 받고, 원각정에 맡긴다.
완전한 치료를 위해서는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발작이 일어날 때 치료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 외부의 사람들이 보기엔 딸이 대공자의 볼모로 잡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염 장로는 대공자의 세력으로 여겨지게 된다.
즉, 현재까지 중립파로서 쌓아온 염 장로의 정치적 입지는 모두 박살이 나고, 이후 고립된다.
문제는 이 경우가 '최악(最惡)'이 아닌 차악(次惡)이라는 점이었다.
최악은 대공자가 딸인 자신을 볼모로 삼고, 염 장로를 꼭두각시 장로로 이용하는 경우였다.
'그런 경우는 결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결국에 그녀의 판단 상, 자신의 아버지에게 현실적인 수준에서 가장 좋은 결과는, 대공자에게 '귀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다른 정치적인 입지가 무너지더라도, 적어도 대공자의 편에서 후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면.
기사회생의 가능성이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대공자님께 아버지의 값어치를 높이 평가받아야 하는데….'
가장 큰 값어치를 하는 것은 바로 장로 직위를 가진 아버지 자신과 전쟁 자문단이라 불리는 검대였다.
하지만 이미 대공자는 하녀들로 이루어진 검대를 소유한 것이나 마찬가지 였다니.
염백하의 시선이 순간 아버지의 기색을 살폈지만, 염 장로는 그저 묵묵히 걸을 뿐,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아버지….'
이제 남은 것은 검악파산이라 불리는 아버지의 무력과 장로 위뿐이었다.
낙양검가의 수위무사 중 한 사람인 염 장로의 무력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고, 그녀가 알기로 아직 대공자에게는 그런 무력의 소유자가 없었다.
'아직 패는 남아 있어.’
하지만 잠시 후 그런 그녀의 생각 또한 보기 좋게 무너져 내렸다.
“이곳이 바로 대공자님의 집무실 입니다.”
그것은 고아한 분위기의 전각이 었다.
그리고 그 전각 앞을 지키고 있는 것은 특임대의 정복을 착용한 한 명의 무사였다.
특이하게도 그는 다섯 자루의 검을 패용(佩用)하고 있었는데, 무사장이 그 검들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는 것이 아닌가.
“다섯 자루의 검이라니…, 서, 설마, 당신은 탈명귀검(奪命鬼劍)?!”
그 말에 염백하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검가의 가장 흉포(凶暴)한 검!”
그 이름을 지닌 이가 활동했던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한참 전이었지만, 아직 묘령(妙齡)에 불과한 염백하가 알 정도로 유명한 이름이었다.
탈명귀검이라 불린 중년의 무사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짧게 염 장로를 향해 묵례를 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행동이, 그의 정체가 탈명귀검이 맞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탈명귀검. 이런 곳에 있었소?”
이제까지 극한의 평정심을 보여주던 염 장로의 말에도, 감정의 편린이 섞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곳'이라니…. 말조심하시오, 염 장로. 이곳은 대공자님의 거처인 원각정이오.”
장로라는 신분에 있는 염 장로에 게 감히 할 법한 말투가 아니었지 만, 누구도 탈명귀검의 말투를 지 적하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염 장로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시절, 이미 낙 양검가의 수위무사였던 이가 보여 줄 수 있는 태도였으니.
“사과하오. 그런 뜻은 없었소. 그저 상상치도 못한 곳에서 이름 높은 무사를 만나 놀랐을 뿐.”
그것은 북방(北方)에서 위명(偉名)을 떨친 염 장로와 강남(江南)을 흉명(凶名)으로 떨게 했던 탈명귀검의 첫 만남이었다.
“그렇소? 그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실로 그렇군.”
두 사람 사이에 흐르기 시작한 긴장감은 순간적으로 주변의 기온이 떨어지는 것 같은 정도였다.
백호가 얼른 뒤로 물러났고, 무사장이 그 앞을 막아 염백하를 지켰다.
두 수위무사에게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가공할 만한 기운에 원각정 전체가 깊은 침묵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 두 사람이 자아내던 일촉즉발의 긴장감을 거짓말처럼 끊어낸 것은, 나지막하게 들려온 한 줄기의 목소리였다.
“문지기! 헛짓거리하지 말고, 손님을 안으로 모시도록 해라.”
그 순간이 얼마나 절묘하던지, 경지를 헤아리기 힘든 두 고수가 서로 숨을 삼키고 물러났을 정도였다.
염 장로는 치밀어 오른 고양감을 억누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문지기?”
그 말에 탈명귀검은 고개를 팩! 하고 돌리더니, 퉁명스러운 태도로 집무실의 문을 열어 주었다.
“주인님. 손님이 도착하셨습니다.”
그 와중에 냉정함을 유지하던 정아가 정중히 안을 향해 고개를 숙여 고하자,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들라 하라.”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딸, 염백하를 안아 든 염 장로가 무사장에게 말했다.
“자네는 대기하고 있게.”
“예, 주군.”
염백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소곳하게 아비의 품에 안겨 있었다.
언제나처럼 대범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염 장로의 품은, 언제나처럼 든든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시점에 깨달았다.
탈명귀검의 등장으로 수위무사의 무력이라는 아버지의 패가 무너져 내렸다는 것을.
이제 남은 것은 본가의 장로 위(位)가 가지는 가치뿐이었다.
염백하는 소름이 끼쳤다.
이제까지 만났던 이들의 배치는 혹시 대공자가 의도한 것이 아닐까.
결국에 맨몸으로 자신의 앞에 서게 하려는 깊은 심계가 아니었을까.
단언컨대.
지금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대공자 연소현이라는 인물은 이제까지 아버지가 상대했었던 어떤 적과도 비교할 수 없으리라.
아버지가 꺾어 왔던 어떤 상대보다도 두려운 인물이리라.
하지만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을 결코 놓치지 않으리라, 그렇게 마음먹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딸이었고, 대낙양검가 장로인 염곽추의 후계자였으니까
부녀는 마치 거대한 괴물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집무실 입구를 거침없이 통과했다.
그리고 어둡고 짧은 복도의 끝에는 집무실의 문을 양쪽으로 활짝 열어 두고 있는 한 소년이 있었다.
“어서 오시오.”
소년은 무미건조한 미소를 짙게 지으며, 그들을 환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