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편 포석(布石) (1)
염백하의 특임대에 대한 설명에 군사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전원이 고수(高手)…?”
“수위무사가 될 수 있을 정도의 가능성을 지닌 이들이라고? 저들 전체가?”
군사들이 놀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내공에 대한 재능을 타고 나지 않으면, 아무리 우수한 내공 심법을 익혀도 무림인이 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 중에 '벽을 넘어' 고수가 되는 이들은 드물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저들은 그저 단순히 고수도 아니고, 검가의 간판이라 불리는 수위무사가 될 정도의 자질을 지녔다니.
"하지만, 조금 이상하군요….”
군사 하나가 짧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이들이 모여 있는 조직이라면, 충분히 이름 정도는 들어 보았을 법도 한데 말입니다.”
그 대답은 백호의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그것은 아마도 저들의 출신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가래가 끓고 쉰 목소리는, 목소리 주인의 나이를 짐작하게 했다.
“출신… 말입니까?”
노(老)군사님. 후학(後學)들을 위해 가르침을 주시지요.”
늙은 군사라 불린 이는 머리가 허옇게 세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한 늙은이였다.
“혹시 자네들은 '이름 없는 무사'에 대해 들어 보았는가?”
자그마한 체구에 이미 굽을 대로 굽은 허리를 가진 늙은이는, 당나귀 위에서 위태롭게 그 노구를 지탱하는 중이었다.
노령도 보통 노령이 아닌지라, 특이 사항이 없다면 가문 내에서 모두가 제 발로 걸어야 하는 검가라 하더라도 예외가 될 수밖에 없어 보이는 늙은이였다.
“…이름 없는 무사라면, 혹시 '암부' 대해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암부'라는 말에 모든 군사들이 입을 다물고 침음을 흘렸다.
그것은 일찍이 같은 짐작을 하고 있던, 염백하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검가의 암부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와 깊이는 누구라도 쉬이 다룰 수 없었으니.
암부(暗部).
낙양검가의 이익을 위해, 낙양검가의 이름을 걸고는 결코 하지 못할 일을 하는 집단의 명칭.
암부에 몸을 깊이 담았던 이들은 별호(別號)도, 이름도, 명성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런 이들을 일컬어 '이름 없는 무사'라 칭했다.
“뭐, 이건 이 늙은이의 근거 없는 추측일 뿐이니, 깊이들 생각하지는 마시게.”
가볍게 분위기를 환기한 노군사는 염백하를 바라보았다.
“이 늙은이는 그것보다, 저들이 원로원의 직속 특임대라는 것을 알아본 아가씨의 안목(眼目)에 주목할 수밖에 없네만.”
염백하는 면사 아래서 쓴웃음을 지었다.
“집법사자의 실무 교육 자료에 있던 정복을 착용하고 있기에 알아 보았던 것뿐입니다.”
그녀의 말에 노군사가 허연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정복이라. 오직 원로원의 명만을 받든다는 특임대가 어째서 정복을 입고, 대공자님의 원각정을 지키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정확히 염백하의 의문점이기도 했다.
“혹시 노군사께서 고견이라도…?”
염백하의 물음에 노군사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이 늙은이는 가문 내 정치 같은건 모릅니다. 제 알바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무책임한 말투였지만, 염백하는 신경 쓰지 않았다.
피와 살이 튀는 전쟁을 제외한 요소는, 이 노인의 관심 분야가 아니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그녀였다.
노군사는 염백하를 향해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오히려 이 늙은이는 아가씨의 고견이 궁금합니다만.”
“고견이라기보다는 그저 어린 계집의 짧은 식견입니다만….”
염백하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백호의 등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원로원은 세속의 일에는 거의 끼는 일이 없지요. 가문 내 정치에 관여하는 일은 더욱 드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의 명만을 받드는 고수들이 원각정을 지킨다는 것은….”
염백하의 시선이 팔인의 고수를 향했다.
“원로원이 후계 구도에서 대공자를 지지한다는 간접적인 의사 표현이거나, 대공자님이 저들의 충성을 얻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어느 쪽이든….”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무섭군요.”
“무서운 사람입니다, 대공자님은."
검가 최고 정예 검대 중 하나인 염 장로의 검대.
비록 그들의 진짜 전력은, 병사들이 주어져 완전한 편제가 이루어져야 발휘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의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 이들을 가볍게 압도하는 전력을 대공자는 선보이고 있었다.
그것도 기나긴 칩거 생활을 끝내고, 원각정을 개방한 그 첫날에.
“도대체 대공자님은….”
염백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비록 공개적이지는 않더라도, 숨은 곳에서 연소현을 열렬히 동경해 온 사람이었다.
누구보다도 그의 천재성에 대한 이해가 있다고 자부해 왔다.
인정받지 못하는 고독한 천재.
지지자가 없지만, 남들이 알아주지는 않지만, 실상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존재.
하지만 '권력자' 연소현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의술, 지략, 품성, 식견…, 개인이 보여 줄 수 있는 모든 부분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보유한 대공자.
그런 대공자가 이제는, '이끄는 자'로서 가진 능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연히 그 스스로가 가진 권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대공자는 낙양검가 내 권력의 가장 심층부 중 하나인 내원을 뒤흔들었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최고 운영 회의로 하여금 칩거 명령을 거두게 하고, 긴급명령까지 사용하게끔 했다.
지금도 대로를 가득 메우고 있는 인파가 보였다.
염 장로의 행렬 뒤로 길게 늘어선, 축하 사절단들의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황제 폐하께서 직접 교지까지 내렸다고 했었지.'
그리고 그런 대공자를 상대해야 하는 것은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 염 장로였다.
그녀가 동경하던 이는 그렇게,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장벽이 되어 그녀를 마주하고 있었다.
'아버지….'
그녀의 시선이 행렬의 가장 앞에서 담담히 서 있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향했다.
* * *
“…오랜만이군.”
한참을 담담히 서 있던 염 장로의 첫마디였다.
그의 기억 속에서 남아 있는 얼굴 몇이, 특임대 중에 있었던 것이었다.
“이야, 오랜만이오. 거, 장로가 되시더니 아주 신수가 훤하시구려.”
“그래도 동기 무사의 얼굴은 알아보는 모양이구려.”
미소와 함께 돌아온 대답은 그리 정겹고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평소였다면 저런 태도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염 장로의 수하들이었지만, 동기라는 말에 다들 묵묵히 기세를 견디는 것에 집중했다.
염 장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이었다.
“후배들을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이제 충분한 것 같으니 기세를 거두는 것이 어떻겠소?”
그러자 염 장로의 동기들이 너스레를 떨었다.
“어이쿠, 본가의 장로님께서 하시는 명이니 들어야겠는가?”
“아니지, 아니지. 우리는 원로원의 명만 받드니, 아무리 장로님의 말씀이라도 받들어서는 안 될 말아니겠는가?”
염 장로가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명이 아니라, 부탁이오.”
그 대화를 어렴풋이 듣던 염 장로의 수하들은, 자신들의 앞에 버티고 선 이들이 어떤 이들인지 다시 한번 체감했다.
대낙양검가의 장로가 명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부탁을 해야 하는 이들인 것이다.
“어, 어흠. 이름 높은 염 장로께서 저리 부탁하시는데….”
“다른 형제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이 정도면 후배들에게 우리의 정복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는 한것 같은데…?”
염 장로의 동기들이 은근슬쩍 다른 특임대원들의 눈치를 살필 때였다.
“지금 손님분들을 앞에 두고 뭣들 하시는 겝니까?!”
슬그머니 서로 눈치를 보던 특임 대원들에게 한겨울 서릿발 같은 일갈이 날아들었다.
염 장로의 수하들뿐만 아니라, 백호도 깜짝 놀랄 정도의 노호였다.
마치 혼백을 쏙 빼놓을 것 같은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원각정의 정문 안쪽을 향했다.
샛노란 안광(眼光)을 이글거리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한명의 여인이었다.
수 명의 하녀를 거느린 채 등장한 그녀는 후광이 비치는것 같은 미모와 모두의 심령(心靈)을 압박하듯 한 박력이 있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일은 그다음이었다.
“아이고, 정아 아씨. 그것이 우리가 그러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도 이게, 후배들 앞에서 체면이랄까, 그런 것이 있어서….”
기세가 씻은 듯이 사라진 것은 물론, 그 살벌하던 고수들이 미모의 여성에게 헤픈 웃음을 지어 보이며 굽신거리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정아 아씨라 불린 여성은 다시 한번 일갈을 내질렀다.
“아씨라니요! 저는 이 원각정의 시녀장입니다!”
시녀장이라는 말에 좌중이 다시 한번 술렁였다.
일전 호두 마을의 자애원에서 정아를 본 적이 있었던 염백하는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때도 범상찮은 인물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저런 고수들을 호령하다니.'
원각정의 시녀장은 시퍼렇게 날선 시선으로 쩔쩔매는 고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인님의 손님께 무례를 범했으니, 오늘 특임대를 위해 하녀들이 만든 간식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 소리에 특임대원들이 까무러칠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 되오, 시녀장님. 그러면 다른 대원들이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할 터인데!”
“그, 그러지 말고 내 말좀 들어 보시오, 시녀장님! 시녀장님!”
어릴 적부터 무사들과 함께 커온 염백하는 잘 알 수 있었다.
“다들 시끄럽습니다!”
지금 저 특임대원들이 보여 주는 태도는 단순히 친애의 감정에서 나 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인정하는 무사가 아니라면 얻을 수 없는 존중이 녹아 있다는 것을.
영애로서의 자신을 친근하게 여기면서도, 또한 집법희(執法姬)로서의 그녀를 두려워하면서도, 결코 얻을 수 없는 무사로서의 존중.
그 존중을 얻었기에 보여 줄 수있는 거리감 없는 모습.
원각정의 시녀장이 차고 있는 검대(劍帶)에, 그리고 그 검대에 걸려 있는 검에 염백하는 어째서인지 눈부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의 귓가에 군사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시녀장이 이공자님과 삼공자님이 노골적으로 탐냈다던, 바로 그 인물인가 보군요.”
“허허, 저런 미모에 저런 몸가짐, 그리고 저런 기품이라면, 저도 이공자님과 삼공자님의 마음에 조금은 공감이 갑니다.”
젊은 군사의 말에 다른 군사들이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염백하는 그들의 말에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시녀장이 소문 속의 주인공이라고…?!'
그녀와 마찬가지의 생각을 했는지, 노군사 또한 기다란 눈썹 아래서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정보에 따르면 저 시녀장은 분명 무사가 아니었는데….”
그사이, 특임대원들의 간절한 의견을 단호하게 일축해 버린 원각정의 시녀장은 염 장로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원각정의 '경비대원'들이 무례한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해, 감히 사과의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염 장로의 반응에 염백하와 노군사는 또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부디 고개를 드시오. 이 일은 본 장로의 오랜 지인들과 있었던 사사로운 일에 지나지 않으니, 시녀장이 고개를 숙일 일은 아니라오.”
두 손을 모아 정중하게 상황을 수습하는 염 장로의 행동에는 틀림없이, 무사를 향한 존중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낙양검가의 명실상부한 수위무사중 일인인 검악파산(劍岳破山) 염 곽추.
저 시녀장은 그런 무사의 존중을 받을 만한 무사라는 뜻이었다.
'도대체….’
무공을 모르고, 내공에 재능도 없던 것으로 알려져 있던 저 여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대공자는 무슨 수로 한낱 시녀를, 검악파산의 인정을 받을 만한 무사로 만들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