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01화 (101/350)

제1편 검악파산(劍岳破山), 내방(來訪)

염 장로의 행렬이 원각정의 입구에서 대기하는 짧은 사이에도, 모여든 상인들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당시 일개 대주(隊主)에 불과하던 그가 이름 높은 화산의 검군(劍 君)을 꺾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었지.”

“그 이후로 결국 장로까지 오르게 된 것을 보면, 아마도 검군을 꺾었던 일이 결정적이었겠지.”

“그 결과로 섬서는 사실상 검가의 영역이 되었지. 이미 검가에 종속된 종남파(終南派)에 이어서, 화산 무공의 정점까지 패배하게 되었으니….”

“그것도 검가가 심혈을 기울여 키워 낸 신성(新星)도 아니고, 북부에서 구르던 무명(無名)의 무사에게 패하다니.”

“당시 누구 하나 충격받지 않은 자가 없었지.”

다들 들떠서 당시의 일을 떠들어 대고 있을 때, 구석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한 이가 노골적으로 그들을 비웃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치들이로군.”

나이가 지긋하여 목소리에서 강한 힘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소란스러운 와중에서도 좌중의 귀를 자극하는 묘한 존재감이 있었다.

“어디의 존장(尊長)이신진 모르겠지만, 뒤에서 소곤거리지 마시고, 앞으로 나오시오.”

“굳이 입 밖으로 꺼낼 정도로 자신의 견해에 자신이 있으시다면, 우리 앞에 직접 나오셔서 가르침을 주시지요.”

나름 어깨에 힘 좀 준다는 상단에서 파견 나온 이들이 눈과 목에 힘을 주고 말하자, 눈치를 보던 이들이 얼른 물러서 자리를 비켰다.

“끌끌, 요즘 젊은 상단에는 인재가 이리도 없는가? 아니면, 화북(華北)의 끝없는 평원과 넘치는 부가 이들의 눈과 귀를 막았는가?”

너무나 노골적인 발언에 맨 앞줄에 자리한 이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이내 앞으로 나선 노인의 모습에 그들은 그저 꿀을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의 어깨높이밖에 되지않는 작은 키에 이미 허리가 굽기 시작한 노인이었다.

그러나 거대한 북방 이리의 가죽으로 만든 망토와 재질을 알 수 없는 검붉은 지팡이는 누가 보아도 범상치 않은 물건임을 느끼게 했다.

누군가 그 노인의 정체를 알아보고 비명처럼 외쳤다.

“북방의 전쟁대상(戰爭大商)…!”

“피가 흐르는 강에서 금을 캐낸다는 대상단의 주인이 어째서 이런자리에 직접…?!”

여기 모인 이들 중에 신분이 모자라거나 위치가 모자라는 이는 없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단의 대리인 수준에서 이야기였다.

상단주가 직접, 그것도 악명(惡名)과 위명(偉名)이 뒤섞인 군수상단의 주인이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여기에도 눈과 귀가 막힌 이들만 있는 건 아닌 모양이군.”

자신을 알아본 이들로부터 수군거림이 퍼져 나가자, 노인은 번쩍이는 금니들을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 노부(老夫)가 직접 가르침을 내려 주길 원하는가?”

얼굴을 붉혔던 이들은 그저 고개를 조아릴 뿐, 감히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노인의 말에 얼굴을 붉혔던 이들의 경우이고, 다른 상단의 파견인들은 눈치 빠르게 움직였다.

어떤 이는 늙은 대상인을 위한 의자를 끌고 왔고, 어떤 이는 탁자를, 어떤 이는 주전부리를, 또 어떤 이는 찻주전자를 날랐다.

그러고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

하지만 노인의 입은 쉬이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뚱거리며,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자 한 재치 있는 자가 자신의 전낭을 노인 앞의 탁자에 올렸다.

“정보료입니다, 어르신.”

상인들의 세계에 공짜는 없는 법.

그때야 상황을 눈치챈 다른 이들이 하나둘씩 서둘러 전낭을 탁자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이윽고 각양각색, 형형색색의 비단 전낭들이 탁자에 쌓였다.

노인의 수행원들이 예의 바르게 전낭들을 회수하는 동안, 노인은 전낭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들. 직전의 북부 전쟁에서 염 장로가 무슨 역할을 했는지 알고들 있는가?”

쉬이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그저 북부 전쟁에서 공을 크게 세웠기에 영웅으로 불린다는것 정도만 알 뿐이지요.”

다들 뻘쭘하게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 그렇지. 황실에서도 입에 담기 싫어하는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그대들이 알 리가 없겠지.”

하지만 노인은 고의로 묻힌 전쟁사 속의 빛바랜 영웅담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바로 북방의 전쟁대상이었으니.

“북방 땅의 권력자 사이에서 염 장로를 다들 이렇게 부른다네.”

노인이 금니들을 반짝이며,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

“최고의 무력 분쟁 해결 전문가. 불패(不敗)의 징집군단장(徵集軍團長).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많이 불리는 이름은….”

모두가 마른침을 삼키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전쟁 자문관(戰爭諮問官).”

모두가 노인의 말을 곱씹고 있는 사이, 노인이 자신의 지팡이 끝으로 염 장로의 행렬을 가리켰다.

“저기 염 장로의 무사들이 보이는가?”

시선들이 무사들에게 향했다.

움직임이 지극히 간결하고, 군기가 엄중하며, 중갑을 착용했다는 점이 특이하다면 특이했지만, 검가의 다른 검대 소속의 무사들과 별 차이점을 느낄 수는 없었다.

“외견만 보아서는 알 수가 없겠지만, 저들은 일반적인 검대와는 전혀 다른 무사들이라네.”

아리송한 말이었지만, 노인의 설명이 곧장 이어졌다.

“훈련장에서는 저들 하나하나가 모두 전투 교관이 되고, 전장에서는 저들 하나하나가 모두 백인장이 되지.”

노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저들 밑으로 배치된 징집병들은 훈련과 실전을 거쳐, 일반적인 상비군 수준을 상회하는 전투 수행 능력을 보여 주게 되지.”

노인의 지팡이가 염 장로의 곁을 가리켰다.

“그리고 거기에는 염 장로 휘하의 직속 책사들의 역할을 빼놓을수가 없지.”

다른 무사들과 마찬가지로 오와 열을 지키며 꼿꼿하게 서 있는 문사들은 자세부터가 일반적인 문사들과 차이가 있었다.

“이곳의 책사들은 정치적인 이득을 얻기 위한 책략을 구사하지. 하지만 염 장로의 책사들은 근본적으로 다르네.”

"...."

“저들은 적들의 피와 살을 취하고, 적의 군량을 불사르고 사기를 깎아내리며, 요새를 무너뜨리고 성벽을 넘는 군사(軍師)들이야.”

노인의 목소리는 감미롭지도 않았고, 부드럽지도 않았다.

“황실과 북부 대장군은 전선이 불안정한 곳마다 염 장로와 그의 무사들을 투입했었지.”

그 목소리는 북방의 산맥과 평원을 할퀴는 바람처럼 거칠었고, 미사여구 하나 없이 투박했다.

그러나 모두가 노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항상 염 장로에게 주워진 것은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열악한 무장과 낮은 사기의 징집병뿐이었었지. 그러나….”

노인의 입가에 피비린내 나는 미소가 걸렸다.

“그는 단 한 번의 전투에서도 패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에게 맡겨졌던 모든 전선, 모든 징집병단을, 그는 승리로 이끌었지.”

그는 마치 승리의 공식을 아는 것만 같았다.

주어진 병력을 훈련하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단련시켰으며, 필요한 물자가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손에 넣었다.

구매하든, 노획하든, 약탈하든, 그의 징집병단은 항상 필요한 만큼의 물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징집병단이 등장하는 곳은 항상 적보다 많았고, 그래서 언제나 필요 이상의 전과를 거두었다.

“처음에는 여느 검대(劍隊)와 마찬가지로 여겨졌던 염 장로의 검대는 어느샌가 이렇게 불렸지.”

노인은 염 장로의 행렬로 시선을 돌렸고, 모두의 시선이 따라 움직였다.

“백전불패의 전쟁 자문단(戰爭諮問團).”

그리고 북부 전선에 있었던 누구도 그 이름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들 노인의 이야기가 이어지길 바랐지만, 노인의 입은 더는 열리지 않았다.

그때야 좌중은 노인의 탁자에 쌓였던 전낭들이 노인의 하인들에 의해서 전부 거두어진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에 모여 있는 이들의 재력(財力)을 생각하면, 전낭에 들어 있던 금액의 액수는 상당했을 터였다.

그 정도의 액수가 잠깐의 이야기로 사라진 것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아까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정보의 값어치는 그 희소성뿐만 아니라 당연히 정확성과 신뢰도에도 가격이 매겨진다.

북방의 전쟁대상에게 비용을 치르고 들은 북부 전쟁에 대한 정보는 웬만한 정보상 두세 명의 신뢰도를 웃돌았으니.

“…염 장로가 북부 전쟁의 영웅이라고 불렸던 것은 그런 사정이 있었던 것이로군.”

“황실에서도 노골적으로 묻어 버린 전쟁사이니, 하남 땅에서 제대로 아는 이가 없었던 것도 당연한 노릇인가….”

각종 상단에서 파견된 이들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면서도, 염 장로의 행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전에는 그저 그 이름 높은 검가의 검대들 중 하나를 실제로 보는 막연한 호기심이 어렸던 시선이었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들의 귀에는 전장을 호령하는 염 장로의 호통 소리와 적들의 단말마가 들리는 것 같았고, 코에는 지독한 피비린내와 인마(人馬)가 뒤섞여 자아낸 먼지 냄새가 풍기는것 같았다.

“그나저나 상단주께서는 어찌 이곳까지 직접 발걸음을 하신 겁니까? 혹시 대공자님과 만날 약속이라도…?”

한 젊은이가 묻자 노인이 손을 내저었다.

“잔치라도 벌이면, 잔칫상이라도 한상 얻어먹고, 혹시 눈도장이라도 찍어 둘까 싶어 온 것이지. 나따위가 무슨 재주가 있다고, 대낙양검가의 대공자님과 약속을 잡겠는가?”

노인이 투덜거렸다.

“그런데 소문난 잔칫상에 먹을 것이 없다더니, 검가의 대공자 정도 되니 잔치조차도 열지 않을 줄은 몰랐어.”

그 투덜거림을 들은 주변인들은 피식거리면서도,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모두가 노인의 이야기를 되새기며, '불패의 전쟁 자문단'을 구경하고 있을 때, 노인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전쟁 자문단의 군기(軍氣)가 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지?’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전쟁터를 누볐던 노회한 군수상인의 눈은, 백전연마(百戦錬磨)의 장군들에게나 보인다는 군기를 어렴풋하게나마 읽을 정도는 되었다.

노인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습관처럼 감추었다.

칼날 같은 북풍에 의해 단련된 거칠고 주름진 피부 아래서, 노인이 품은 의문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다른 이들과 방향은 같았지만, 다다르고 있는 곳은 달랐다.

노인의 깊은 눈은 원각정 정문을 지키고선 정체불명의 무사들을 향하고 있었다.

'저들이 대체 누구기에…?’

주변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견문이 넓은 노인이었지만, 처음 보는 정복을 입은 무사들의 정체를,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 늙은이의 착각인 것인가…?’

* * *

전쟁대상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불패의 전쟁 자문단'이라 불리며, 적군의 공포와 아군의 존경을 얻던 염 장로의 무사들은 일찍이 겪은 적이 없는 상황 속에 간신히 버티는 중이었다.

전투와 전장을 넘어 살기(殺氣)와 살생(殺生)으로 다스려 온 정신이 그들이 위치를 지키게끔 하고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진즉에 오합지졸들처럼 진형을 흐트러트렸으리라.

단 8인.

원각정의 정문을 수호하는 정체 불명의 무사 여덟이 불패의 전쟁 자문단을 압도하고 있었다.

백호의 주변에 모여, 신수(神獸)의 보호 속에서 숨이 트인 젊은 군사(軍師) 하나가 헛웃음을 지었다.

“…북방 족속들의 중장기병대 돌격을 맨몸으로 받는 것 같군.”

다른 군사가 은근슬쩍 좀 더 백호와 가까운 위치로 움직이며 물었다.

“도대체 저 무사들의 정체가 뭡니까?”

대답은 염 장로의 외동딸, 염백하에게서 나왔다.

“원로원 직속 특임대.”

면사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금방이라도 날뛸 것 같은 백호의 목덜미를 내리누르며 말을 이었다.

“하나하나가 모두 벽을 넘은 고수들로, 신체적 정신적 부상이 없었다면 모두 본가의 수위무사라 불릴 가능성을 가졌던 무사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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