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편 개장(開場)
다른 이들도 아니고, 특무대쯤되는 이들이 자신들의 본부 바로 앞에서 살기가 튀는 것을 못 느낄리가 없었다.
“뭐야? 뭐야? 싸움이야?”
“결투야? 비무야?”
정아와 삼절무사의 대치가 시작 되자, 본부에 깨어 있던 특무대원들이 누구랄 것 없이 전부 다 튀어 나왔다.
개중에 경공(輕功)이 뛰어난 자들은 문으로 나올 것도 없이, 삼층 건물 지붕을 훌쩍 뛰어넘어 나타나는 이들도 있었다.
자신을 무사라 자처하는 이들이 싸움 구경을 놓칠 수야 없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다른 이들과는 달리 정복을 모두 갖춰 입은 탈명귀검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뭔 일이오?”
그의 말에 황 씨라 불리는 특무 대원이 답했다.
“원각정의 시녀장과 삼공자의 삼절무사가 한판 붙으려는 모양이오.”
“시녀장이…?”
“시녀장이 무공을 익힌 것은 알겠지만, 삼절무사라면 쉽지 않은 상대인데.”
“으음. 최악의 상황에나 끼어들면 되려나.”
특무대원들이 간격을 넓혀 탈명귀검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직 검을 뽑아 들지 않은 두 남녀가 대치하고 있는 광경이 드러났다.
“허어….”
탈명귀검의 탄식에 가까운 한숨에 황 씨가 일촉즉발 상태인 남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친딸처럼 시녀장을 아끼더니, 검은 좀 가르쳐 주었소?”
탈명귀검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적 없네.”
그때 다른 특무대원이 탈명귀검에게 물었다.
“기왕이면 시커먼 사내놈보다는 시녀장이 이겼으면 좋겠는데, 승산이 있다고 보시오?”
돌려 말하긴 했지만, 원각정의 여인들을 싫어하는 특무대원은 없었다.
그들의 시선이 탈명귀검에게 모여들었다.
그런 시선을 무시한 채 탈명귀검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많은 이들 앞에서 일방적으로 패하면, 심적으로도 타격을 크게 입을 것인데….”
그가 혀를 나직하게 차자, 황 씨가 물었다.
“일방적으로? 누가 말이오?”
탈명귀검이 대답하려 할 때, 삼절무사가 먼저 정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계집. 이제 충분히 구경꾼들이 모여든 것 같으니, 그 못된 버릇을 단단히 고쳐 주마.”
누가 봐도 심상찮은 수준의 이들에게 둘러싸였지만, 삼절무사는 신경 쓰지 않았다.
본가의 무사라는 이들이 결투에 끼어들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그가 제대로 손을 봐주면, 다시는 어디서 무사라고 떠들고 다니지 못하리라.
“각오가 되었다면, 이제 검을 뽑아라, 계집.”
아직도 왼손을 그저 칼머리 위에 올리고 있을 뿐인 정아에게 그가 경고했다.
그가 아는 범위 내에서 저런 방만한 자세를 가진 기수식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아는 그저 느긋하게 그를 바라보며 같은 자세를 유지할 뿐, 검을 뽑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가 자세를 낮추며, 살기를 풀풀 풍겼다.
“그럴 각오가 없다면 지금이라도 검을 버리고, 여기 계신 선배들과 내게 무사니 뭐니 헛소리를 뱉은 것을 사죄하고….”
아무 말이 없던 정아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삼공자의 무사들은 다들 그렇게 주둥아리로 싸우느냐?”
“뭣…?!”
이제 하수를 위한 배려는 끝이었다.
분노한 그가 가죽으로 단단히 감긴 검병(劍柄)을 뒤틀듯이 붙잡자, 검집 안에서 검이 비명을 질렀다.
자세를 극한까지 낮추고, 검을 뒤로 숨기듯이 몸을 비틀자, 내공이 급격히 집중되었다.
“호오…!”
그를 바라보던 특무대원들이 작게 감탄했다.
“발검세(拔劍勢)를 극한까지 익혔군…!”
“훌륭한 자세다.”
“삼절 중 하나가 발검세인 모양이군.”
그들의 시선이 반대로 정아를 향했다.
긴장이 극한까지 치솟은 상태에서도 정아는 그저 칼머리에 왼손을 올린 느긋한, 어찌 보면 오만하기까지 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발검세를 통달한 자라면 여기서 나올 것은 오의(奧義)일 터인데….”
“저 시녀장이 저 자세로는 그 첫 일격을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군.”
“일단, 너무 가까워.”
그때 가만히 정아의 자세를 눈여 겨보던 황 씨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자세는, 어디서 본 적이….”
그때, 삼절무사의 섬전(閃電) 같은 일격이 모두의 호흡을 갈랐다.
격발(擊發)하듯, 검집을 박살 내 버리듯, 발사된 검이었다.
그것이 바로 검심검명(劍心劍鳴), 발검세(拔劍勢)의 오의(奧義), 파란(波瀾)!
그 완벽한 일격을 본 특무대원들은 정아의 패배를 직감했다.
단 두 명, 탈명귀검과 황 씨를 제외하고.
귀청을 찢는 금속음과 함께, 검 하나가 높이 치솟았다.
검은 빙글빙글 돌며 허공을 헤엄쳤다.
그러고는 그대로 떨어져, 바닥의 포석에 두어 번 튕기더니 널브러졌다.
삼절무사의 형편없이 찢어진 손아귀에서 시뻘건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목 아래 들이밀어진 시퍼런 검날을 향해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눈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정아의 자세를 본 특무대원 하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좌수역검(左手逆劍)?”
정아는 왼손으로, 그것도 거꾸로 검을 쥔 자세로 삼절무사의 목에 검날을 들이대고 있었다.
“사도(邪道) 중의 사도를 익혔다고…?”
좌수검(左手劍)과 역수검(逆手劍)은 과거부터 사도로 불려 왔지만, 그것은 검가에서는 일반적인
표현일 뿐, 결코 경멸의 의미가 아니었다.
이제까지 그녀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고 그저 잠자코 있던, 하녀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분명 삼절무사 쪽의 발검이 빨랐는데…?”
“이 정도 수준의 비무에서 후발 선제(後發先制)의 묘(妙)라고?”
“도대체 무슨 일이야?”
특무대원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그들은 경지에 이른 이들이고, 분명 정아의 반격을 보았지만, 자신들이 본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황 씨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들 저 검법(劍法)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는가?”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황 씨가 고개를 내저으며, 자기 자신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저건 검가비검(劍家秘劍)인, 섬영찰나(閃影刹那)이지 않은가?”
그의 말에, 처음엔 모두의 얼굴에 황당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섬영찰나라고…?”
하지만 다음 순간 그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바뀌었다.
“섬영찰나라고?!”
여기 있는 특무대원 중에 젊었을적에 기재(奇才)라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이는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에 하나같이 모두 벽을 넘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검가에서 가장 까다롭다는 섬영찰나를 익혀 보려 하지 않았던 이는 없었다.
일정 이상 수준의 재능을 가진 낙양검가의 무사라면, 누구나 익혀 보려 하는 비검.
하지만 그 모든 재능 넘치는 이들 중에서도 대성하는 이가 극히 드물다는 비검.
후발선제, 일격필살의 반격검.
그 두 개념의 극한을 현실 세계에 구현한 검이자, 여덟 초식이 그 두 가지 목적으로만 존재하는 검.
그것이 바로 섬영찰나였다.
특무대원들이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탈명귀검이 쓴웃음을 지었다.
“좌수역검. 섬영찰나의 여섯 번째 초식, 사왕포식(邪王捕食)이군.”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이제까지 봤던 사왕포식 중에 가장 완성된 형태의 사왕포식이 었다.
'그사이에 섬영찰나를 대성(大成)하다니….'
그는 불가해한 것을 보는 표정으로 정아를 바라보았다.
'시녀장. 도대체 정체가 뭐요?’
* * *
“서, 섬영찰나라니…!”
삼절무사가 발작처럼 소리쳤다.
정아의 검에 목이 스쳐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고 외쳤다.
“거짓말하지 마라! 이건 사술이야! 사술이라고!”
정아가 어처구니없는 것을 보았다는 표정으로 검을 거두었다.
“그럴 리가 없어! 다시 한번! 다시 한번 겨루자! 자, 잠깐 방심했을 뿐이라고!”
그가 비척거리며 검을 향해 다가가 바닥에 떨어진 검을 쥐려 했다.
하지만 인대가 손상된 오른손은 검을 놓쳤고, 그는 왼손으로 검을 들었다.
“이번엔 제대로 상대해 주겠다! 다, 당장 덤벼라!”
호원집사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급히 외쳤다.
“그, 그래! 다시 한번 붙으라고!”
하지만 정아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손님들께서 오실 시간이니, 다들 물러가라.”
그녀의 말에 삼절무사가 외쳤다.
“이딴 곳에 손님이 왜 온단 말이냐! 비겁하게 도망치는 것이냐?!”
호원집사도 외쳤다.
“대공자의 손님 따위가 올 리도 없지만, 온다고 해서 그것이 뭐 어떻단 말이더냐?!”
탈명귀검은 정아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것은 큰길의 저편이었다.
“특임대원 중에 복장이 바르지 않은 이들은 당장 본부로 귀환하도록!”
“무슨 말이오, 대장?”
탈명귀검이 저편을 가리켰다.
“손님들께서 오신다.”
* * *
역시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낙양검가 내부의 사람들이었다.
“나는 최고 운영 회의 운영각의 운영각주의 명을 받아 축하 서신과 함께 선물을 가져왔소!”
“우리는 장로원 전체의 뜻을 대표하여, 대공자께 축하를 전하고 선물을 드리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저는 내원총관님의 축하 서신을 가지고 온 내원의 오계집사입니다.”
낙양검가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수밖에 없는 이들이 보낸 선물과 서신을 든 이들로, 정문 앞은 순식간에 수라장처럼 변해 가기 시작했다.
정아가 데려왔던 하녀들이 일사 불란하게 그들을 대기실로 안내하거나, 원각정의 안으로 들였다.
그다음은 낙양검가의 봉신가문과 방계가문에서 파견된 축하 사절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낙양검가의 방계가문인 개봉연가(開封淵家)에서 온 사절들이오. 대공자께 안내해 주시오.”
“나는 산서(山西), 태원(太原)의 사공가(司空家)에서 온 가주님의 사절일세.”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저희는 황도(皇都)의 매씨 가문에서 온 이들입니다. 대공자를 뵙고 전대 가주님의 선물과 서신을 전하고자 합니다.”
“저는 지금은 은퇴하신 태사(太師) 어르신을 모시는 사람입니다.”
연소현과 개인적인 친분을 가진 어마어마한 신분의 이들이 보낸 축하 서신과 선물들이 수레와 등짐으로 줄을 이었다.
“황실 비서처(祕書處)의 외부고문(外部顧問)으로 계시는 함 어르신께서 보내셨소.”
그 모습을 바라보는 호원집사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매씨 가문의 전대 가주? 황실의 태사? 황실 비서처의 외부고문이라고…?”
그것은 이공자조차도 가지지 못한 인맥이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원각정 내부로 안내받은 이들, 대기실로 향하는 이들, 그리고 지금 저 뒤로 줄을 지어 밀려드는 이들까지.
그중에 누구 하나, 집사 따위가 감히 고개를 들고 맞이할 수 있는 이름이 없었다.
특무대원들에 의해서 끌려 나가 구석에 박혀 있는 삼절무사는 그저 멍하니 그 끊임없는 행렬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내공을 담은 커다란 외침이었다.
“다들 길을 비켜라!”
모두의 시선이 뒤를 향했다.
“황제 폐하(皇帝陛下)의 교지(敎旨)를 받든 사례감(司禮監)의 부태감(副太監)께서 납신다!”
황제 폐하의 교지라는 말에 모두가 자리에 엎드렸다.
“…황제 폐하의 교지라고?”
그저 서서 멍청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호원집사는, 깜짝 놀란 주변 이들에게 붙잡혀 무릎이 꿇려졌다.
'뭐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지? 아직 내가 지난밤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