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편 선언(宣言)
원각정 정문 앞.
업무 시간이 시작되기 전, 새벽 녘의 모습이면, 일반적으로 한산한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깔끔하다 못해, 으리으리하게 정비를 마친 원각정 정문 앞 거리가 텅 비어 있는 모습은, 유난히 을씨년스러웠다.
“오늘이 첫날이지?”
번듯한 초소에서 경계를 서며 묻는 특무대원의 말에 유등 아래서 일지를 작성하던 동료가 답했다.
“그렇지. 공사는 거의 끝났고, 오늘이 사실상 원각정의 개장일이니까.”
경계를 서는 특무대원이 거리를 바라보았다.
건물들에는 유등이 빼곡하게 걸려 환히 불을 밝히고 있었지만, 정작 거리에는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유령 거리 같군.”
일지를 작성하던 동료가 피식 웃었다.
“아무리 번듯하게 꾸며 봐야, 그 주인이 주인인데, 한가한 것이야 어쩔 수 없겠지.”
그의 말에 경계를 서던 특무대원이 입맛을 다셨다.
“...손님이 좀 왔으면 좋으련만.”
“자네, 어느새 대공자가 마음에 들었나?”
“아니,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시녀들이랑 하녀들 말일세. 그녀들이 고생한 것을 생각하니, 보람을 느낄 정도는 와 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지....”
“으음…. 그건 그렇군.”
딸뻘의 아이들이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특무대원들이 었다.
“…하지만, 힘들겠지?”
“아마도. 그렇지 않겠나?”
그때 큰길의 저편에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원 미상, 두 명 접근 중.”
“설마, 벌써 손님인가?”
두 사람은 안력을 돋우어 접근하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특무대원들이 한숨을 쉬었다.
“…손님은 손님인데, 전혀 반갑지 않은 손님이군.”
* * *
이른 시각부터 원각정을 찾은 것은 다름 아닌, 대공자의 시녀장이 되어 버린 정아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는 두 사람이었다.
이공자가 내원(內院)을 대신하기 위해 만든 호원(湖院)의 집사.
그리고 삼공자의 친위(親衛) 무력 집단에 속한 삼절무사(三絶武士) 였다.
원래라면 서로 알은체도 하지 않았을 두 사람이었지만, 상황이 안 좋았다.
“…그 미친 계집이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서신을 몇 통이나 무시해 버린 것인지 모르겠군.”
호원집사의 말에 삼절무사가 이를 갈았다.
“집사부장이 절차니 뭐니 해서 일을 질질 끌지만 않았어도, 진즉 처리되었어야 할 문제였소.”
“그 잠깐 사이에 대공자가 칩거를 풀어 버린 것도 문제일세.”
“그래 봐야 그 계집은 한낱 천한 종년에 지나지 않소. 위에서 명을 하면 따라야 하는 몸이지.”
“그러니 대공자가 직위를 되찾은 것이 문제라는 것 아닌가?”
“헹, 우리 주군께서는 그 무검자 따위보다 위대한 분이오. 비교조차할 수 없는 분이지.”
“본가에서의 입지만 보자면 당연한 말이지. 내 주인이신 이공자님께서도 정치적 영향력을 제대로 발휘하시면, 그년 따위의 거취는 얼마든지 조정하실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문제가 아닌가?”
“강자(强者)가 원하는 것을 취하는 데에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이오?”
“…멍청한 무사 놈이랑 말을 섞은 내가 잘못이지.”
“뭐요?! 한주먹거리도 되지 않는 말라깽이 주제에…!”
잠시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은 한숨을 쉬며 걸음을 서둘렀다.
대공자 따위에게 손님이 이른 시간부터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는 두 사람이었지만, 사안이 사인인 만큼 이목을 끄는 것은 피해야 했으니.
“…자네는 위에서, 일단 당장에는 그 계집을 그냥 두라는 지시를 받지 못했나?”
“…당신도 그런 명을 받았소?”
하지만 각자 모시는 주인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기 싫었던 두 사람이었다.
“대공자 따위가 뭐라고….”
“우리 무사 중에 무검자 따위를 겁내는 이는 아무도 없소.”
화려하게 꾸며진 거리의 모습이 유난히도 거슬렸다.
* * *
두 사람이, 자신들을 대단히 고깝게 바라보는 두 특무대원의 시선을 무시하며 잠시 기다리자, 정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호통을 치려던,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절제된 화려함을 뽐내는 궁장으로 몸을 감싸고, 눈부신 장신구들로 치장한 정아의 모습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매혹될 수밖에 없는 미모를 자랑했다.
짙은 색조 화장을 하고 그들을 오연히 내려다보며, 당당한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에게서는 품위와 품격을 넘어, 묘한 박력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 검을 찬 스무 명의 하녀들이 정문 앞에 늘어서자, 그 박력은 특무대원들조차도 속으로 감탄할 정도였다.
“그대들은 무슨 용건으로 본 시녀장을 보고자 한 것이오?”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두 불청객을 응시했다.
순간 무의식 속에 고개를 조아릴 뻔했던, 호원집사가 일부러 거세게 코웃음을 쳤다.
미리 합의된 바에 따라, 삼절무사는 팔짱을 낀 채,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고, 기세가 등등한 꼴이 우습기 짝이 없구나.”
정아는 코웃음을 치지도 않고 답했다.
“그래 봐야 주인만 믿고 설치는 그대만 하겠는가?”
상대가 반말을 뱉자, 즉시 반말로 답하는 정아였다.
그녀는 이미 그들이 마지막에 보았던 그 정아가 아니었다.
“이 천한 것이…!”
그녀의 반말에 대번에 호원집사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정아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하녀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말을 삼가시지요!”
“본가의 대공자님께서 계신 원각정 앞에서 그런 막말이라니요!”
“당신에게 지시를 내리는 호원의 집사장이라 해도, 감히 원각정의 시녀장님께 그렇게 함부로 말씀하실 수는 없습니다!”
호원집사는 그런 하녀들을 무시 하고서, 부채를 꺼내 들어 정아를 가리켰다.
“한낱 하녀들을 끌고 다닌다 하여, 이 내가 조금이라도 위축될 것 같으냐?”
정아가 무표정하게 답했다.
“뭔가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이 하녀들은 그대들 때문에 데려온 것이 아니다.”
호원집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는 네년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주려 했지만, 이 많은 이들 앞에서 굳이 쪽을 팔아야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본 시녀장은 부끄러울 것이 하나 없으니 마음대로 해 보아라.”
호원집사가 입가에 노골적으로 비열한 미소를 띠었다.
“내가 섬기는 이공자님과 삼공자 사이에서 줄타기하더니, 결국 네년이 저질러 놓은 일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원각정으로 도망친 갈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들은 알고 있느냐?”
노골적으로 모욕을 주는 말이었다.
동시에 원각정의 하녀들 사이에 정아를 향한 더러운 소문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 천한 몸뚱이로 암내를 흘리고 다니며 본가의 두 공자를 유혹했으나 여의치가 않자, 결국 세상사에 어두운 대공자를 꼬셔 시녀장 자리를 꿰찬 것이지.”
그는 혓바닥을 놀리며, 눈을 굴려, 재빨리 하녀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런 년이 본가의 대공자를 모시는 시녀장이라니, 기도 차지 않는구나!”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하녀들의 얼굴에는 그를 향한 분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었다.
애초에 하녀단의 하녀들이 대공자가 신용하는 시녀장에게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들은 이미 시녀장과 함께 생활하며,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느끼고 있었다.
정아가 손을 내저었다.
“그 더러운 입담에 귀가 썩는 것 같구나. 용건이 고작 그딴 헛소리나 늘어놓는 것이라면, 썩 물러가라.”
불쾌한 것은 그녀들뿐만이 아니라, 경계를 서던 두 특임대원도 마찬가지 였다.
그들은 슬금슬금 앞으로 다가서며, 희미하게 기세를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원각정에 침입한 것도 아닌 이를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호원집사는 태연했다.
“내가 이렇게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으나, 결국 네년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구나.”
그가 혀를 찼다.
“네년이 대공자의 시녀장이라 해도, 결국 천한 출신을 어쩔 수는 없는 법. 결국에 공자들께서 분노하게 되면, 가노(家奴)나 마찬가지인 네년의 거취를 옮기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것을 모르느냐!”
그가 침을 튀기며 정아에게 외쳤다.
“본가에서 아무런 세력도 없고, 권력도 없는 허울뿐인 대공자를 믿고 설치는 것도 그때까지일 것이야!”
그의 말에 정아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의 주인이 무슨 일을 했었는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는 그녀였다.
그 짜랑짜랑한 웃음소리에 호원 집사는 일순 당황했다.
“이, 이년이 드디어 실성을…!”
웃음을 뚝 그친 정아가 그의 말을 끊었다.
“주인님의 진면목도 모르는 네놈 따위를 상대하는 것은 시간 낭비에 불과하지만….”
그녀가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네놈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몇 가지 있으니, 굳이 본 시녀장이 직접 가르침을 주어야겠구나.”
일순 그녀의 눈동자가 금빛 광채를 번뜩이자 오싹함을 느낀, 호원 집사가 두 걸음을 물러났다.
“첫째로, 주인님께서 본 시녀장을 보호해 주시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본 시녀장이 주인님을 섬기고 지키는 것이니라.”
그녀가 한 발을 더 내딛자, 호원 집사가 급히 두 걸음 더 물러났다.
“그리고 둘째로….”
그녀의 입가에 사이한 미소가 걸렸다.
“본 시녀장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거취를 직접 결정할 수 없는 가노 따위가 아니다. 본 시녀장의 신분은...”
그녀가 허리에 걸린 검의 칼머리에 손을 올렸다.
“무사(武士)다.”
호원집사는 순간 그녀의 동공이 세로로 좁아지는 것을 본 것 같았다.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미처 되새겨 보는 것 이전에, 그는 자신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으어…?!”
모두가 그런 그를 보며 비웃음을 띠고 있을 때,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우습구나! 미모 덕분에 손님들이나 상대하던, 한낱 시녀가 갑자기 무사라니!”
팔짱을 끼고 있던 삼절무사였다.
“무사라면 확실히 거취 따위가 문제가 아니지. 무사에게는 주군을 선택하고 섬길 권리가 있으니.”
그는 호탕하게 웃어 보인 것과는 다르게 명백히 분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감히 무사를 참칭(僭稱)하여 모욕한 것이라면, 그 대가는 각오하고 있겠지?”
그가 검자루를 강하게 쥐었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사나운 기세가 몰아쳤다.
일순 하녀들이 한 걸음 물러날 정도의 살기(殺氣)였다.
“계집년. 네년이 자신을 무사로 여긴다면, 알고 있겠지…?”
과거, 정아는 호원의 집사와 삼절무사를 두고, 정문으로 물러나서 특무대원들의 덕을 보았다.
그리고 지금의 정아는 차갑게 웃으며, 정문 밖으로 나섰다.
“검가(劍家)에서 무사라는 신분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얻어 내는 것.”
그녀의 말에 삼절무사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잘 알고 있구나. 과연 미색으로 손님들이나 홀리던 년의 검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이 삼절무사께서 직접 시험해 주겠다.”
그 광경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특무대원들이 었다.
특무대원 하나가 다급히 가까운 하녀에게 말했다.
“시녀장이 믿는 바가 있어 나선 것이겠지만, 삼공자의 삼절무사는 결코 얕잡아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오.”
하녀는 태연했다.
“알고 있습니다. 삼공자의 친위대에서 삼절(三節)이라 함은 본가의 검법(劍法) 검심검명(劍心劍鳴)의 다섯 가지 검세(劍勢) 중, 세 가지를 통달한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
다른 하녀가 말을 받았다.
“우리는 이제야 고작 한 가지의 검세를 자기것으로 만들었을 뿐인데, 어찌 삼절무사를 무시하겠습니까?”
그녀들의 말에 특무대원이 가슴을 쳤다.
“그렇다면 시녀장을 말리지 않고 무엇 하는 것이오?”
그의 말에 하녀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라 함은 원각정의 하녀들을 말씀드린 겁니다.”
그녀의 말에 특임대원의 두 눈이 커졌다.
“그렇다면 시녀장은…?”
하녀들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