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편 그녀들을 위한 약속(約束)
“후후, 여기가 전부 원각정의 밭이랍니다. 엄청나죠?”
“여기 이 잡초들이 보이시나요? 저희가 분명 매일같이 작업을 해왔지만, 전혀 줄어들 기미가 없죠.”
“이 두엄 더미들의 냄새가 생각보다 지독하죠? 나르다 보면 온몸이 냄새에 찌든답니다.”
세쌍둥이가 전원 작업복장을 착용한 하녀단을 이끌고,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원각정의 밭이었다.
“이제 여러분까지 왔으니, 지금보다 훨씬 많은 양을 재배해야겠지요.”
“후후후. 방치된 밭을 다시 일구는 것은 여기 누렁이와 검둥이가 도와주긴 할 겁니다.”
이령이 두 마리의 소를 가리켰다.
그러자 소들이 대답이라도 하듯, 동시에 울어 보였다.
"하지만 이 누렁이와 검둥이는 매우 사납답니다.”
일령이 머리 쪽으로 손을 가져가 자, 누렁이가 손을 덥석 물려 했다.
검둥이는 콧김을 사납게 뿌려 댔다.
“보셨죠?”
하녀단장이 앞으로 나섰다.
“시녀님들. 그러면 지금부터 저희가 밭일을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후후후, 하고 세쌍둥이가 음험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잠시 후.
“아, 아닛?! 잡초들이?! 잡초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사라지고 있어요!”
작업복 차림의 하녀들이 일사불란하게 달려들자, 그리도 무성하던 잡초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기 시작했다.
“저 끈덕진 잡초들이 한 번의 손놀림에 뿌리째 뽑혀 나오다니…?!”
“손이…! 손이 보이지 않아요!”
“저것은 수공(手功)인가요?! 아니면 금나수(擒拿手)?!”
그때 몇 명의 하녀들이 다가와 물었다.
“혹시 장비는 저쪽 헛간에 있는 것들을 사용하면 되겠습니까?”
“예?! 예. 그렇죠. 물론이에요.”
그동안 헛간에 방치되어 있던 농업용구들이 줄줄이 끌려 나와 새것처럼 변해 가기 시작했다.
“아닛?! 저 숙련된 손놀림은 대 체 뭐죠?!”
“수십 년간 농업용구들을 수리해온 장인의 손길이 느껴져요?!”
“낫이?! 갈고리가?! 괭이가 살아 나고 있어요?!”
몇몇 하녀들은 헛간 위에 올라가, 썩어 버린 지붕을 걷어 내고, 창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단장(團長). 저쪽 창고에 있던 공구들을 찾아왔습니다.”
“모자라는 공구들은 원각정을 수리하는 장인분들에게 협조를 구하도록 하세요.”
“그럼, 하는 김에 자재들도 협조를 받을 수 있겠습니다.”
하녀단장의 작업 지시는 지독하게도 효율적이었고, 하녀들은 그녀가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헛간이?! 헛간이 새로 태어나고 있어요?!”
그때 일령이 밭을 보고 외쳤다.
“뭐, 뭐라고?! 소 대신 사람이 소 쟁기를 끈다고욧?!”
"엄청난 속도예요! 그리고 저 합격진을 방불케 하는 일치된 호흡은 무엇이죠?!”
소 쟁기를 끄는 하녀들이 거침없이 밭을 내달리자, 뒤에서 하녀들이 섬세한 손길로 쟁기를 조절했다.
순식간에 이랑과 고랑이 생겨나는 모습에 세쌍둥이 시녀가 감탄하고 있을 때, 하녀단장이 누렁이와 검둥이를 향해 다가갔다.
“우리 하녀단이 있으니, 이 소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군요.”
그녀가 등에서 검을 빼 들자, 누렁이와 검둥이가 얼른 뛰어가서 남는 소 쟁기 앞에 엎드렸다.
“아앗?! 저 마귀 같은 짐승들이 노동을 갈구하고 있어요!”
“아니?! 스스로 쟁기를 차고 달리기 시작했어요!”
누렁이와 검둥이는 결코 하녀들의 새참거리가 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흠. 영특한 동물들입니다.”
하녀단장이 검을 다시 집어넣으며, 세쌍둥이 시녀들에게 다가왔다.
“시녀님들. 아직 인원에 여유가 있으니, 다음 장소로 이동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세쌍둥이 시녀가 정신을 차렸다.
“그, 그래요.”
“이건 시작에 불과하니까요!”
“기본이라고요, 기본!”
남는 인원들을 데리고 이동한 다음 장소는 작은 호수였다.
“자, 이 호수에서 우리는 매일같이 싱싱한 생선을 공급해야 한답니 다. 훈제도 하고, 말리기도 하며, 어장(魚醬)을 담그기도 해야 하지요."
“후후. 이 그물에 남은 흔적들이 보이시나요? 이 호수의 생물들은 야성을 그대로 품고 있는 무시무시한 포식자들이지요.”
“호수를 거슬러 올라 승산(嵩山)의 계곡을 누비고 다니는 폭군들이에요. 두려운 녀석들이죠.”
“그렇습니까.”
하녀단장이 손짓하자, 작업복을 벗어 던진 하녀들이 호수에 뛰어들었다.
“아아아?! 생선들이?! 생선들이 하늘을 날고 있어요!”
“아닛?! 한 번에 세 개의 작살을 저리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다니 요?!”
“저, 저 하녀들의 움직임은?! 마치 집단 사냥을 하는 대형 수생생물을 보는 것 같군요! 그물을 향해 생선들을 몰아넣고 있어요!”
“마치 그물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물고기들을 건져 올리고 있어요! 풍어예욧! 대풍어예욧!”
하녀단장이 그녀들을 돌아보았다.
“다음은 어디입니까?”
* * *
“아, 아니이잇?! 숙소가! 하녀들의 숙소가 새것처럼 반짝이고 있어요?!”
“복도가?! 복도가 눈이 부셔요?! 가장 구석의 창틀에도 먼지 한 톨이 남지 않았어요!”
“창고가?! 우리가 손도 댈 엄두를 내지 못했던 그 처참했던 창고들이?!”
“이 요리 실력들은 무엇이죠?! 마치 평생을 기름과 화염과 싸워온 숙수들을 보는 것 같아요!”
무슨 소란인가 싶어 창을 열었던 연소현이 못을 물고 장도리를 휘두르며 외벽을 내달리는 하녀들과 눈이 마주쳤다.
“훌륭하군.”
연소현이 박수를 치며, 그녀들을 치하하자, 얼굴을 붉힌 그녀들은 한층 더 엄청난 작업 속도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감독을 위해 원각정을 돌아다니던 정아조차도 감탄하며, 크게 만족을 표했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원각정이 새로이 태어나고 있었다.
* * *
석양이 비치는 돌층계에 세쌍둥이가 주저앉아 있었다.
“…이제 저희는 쓸모없는 존재예요.”
“…그동안 저희는 무엇을 해 왔던 것일까요.”
“이것이 허무함인가요…?”
대공자는 이제까지의 식사 중 가장 훌륭한 식사였다고, 연신 칭찬을 했다.
시녀장은 드디어 원각정에 체계가 잡혀, 자신이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에 기뻐했다.
"후후. 정저지와(井底之蛙)라더니, 우리가 바로 그 개구리였어요.”
“하지만 개구리는 구워 먹으면, 맛있기라도 하지요.”
“…이제부터 저희가 하녀들의 뒷 바라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소녀들은 일제히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다가왔다.
“시녀님들.”
그것은 하녀단장이었다.
“…후후. 우리를 비웃으러 온 것인가요?”
"...마음껏 매도해 주세요."
“…저희는 패배한 개에 불과하니까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는 세 쌍둥이 시녀들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하녀단장은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혹시 지금부터 저희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다른 하녀가 다가왔다.
“제 검술도 한번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 다른 하녀도 다가왔다.
“시녀님들은 공작 임무와 첩보 임무에도 대단히 뛰어나시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는 전혀 그런 전문 분야들을 교육받지 못해서….”
“시녀분들께서 교양 수업도 진행해 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그러고 보니, 하녀들은 작업복 대신 전부 수련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 하녀들을 바라보는 세쌍둥이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당신들…."
“아직 우리를 필요로 해 주는 건가요?”
“이 원각정에 저희가 설 곳이 있을까요?”
하녀단장이 석양빛에 둘러싸인채 고개를 숙였다.
“저희는 한낱 하녀에 불과합니다. 저희가 이제까지 배워 온 것은 전부 허드렛일이었고, 그러니 잡일에 능숙한 것뿐입니다.”
다른 하녀들도 고개를 숙였다.
“이제부터 잡일은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그러니 시녀님들은 시녀님들의 역할에 집중해 주시면 됩니다.”
“부디 저희가 시녀님들처럼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세쌍둥이가 서로를 마주 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좋아요!”
“배우려는 태도가 아주 훌륭하군요! 하지만 원각정의 시녀가 다른곳의 시녀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겠죠?”
“진정한 원각정의 시녀가 되는 길은 거칠고 험하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하도록 하세요!”
하녀들이 소리쳤다.
“얼마든지 저희를 굴려 주십시오!”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단숨에 의기투합한 그녀들이었다.
그녀들은 꺅꺅거리고, 수다를 떨기도 하며, 수련을 위해 이동했다.
이들의 머리 위로 따스한 석양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 * *
어둠이 내려앉은 원각정.
연소현은 등불 아래서 서책을 보고 있었다.
그의 서재는 이전의 엉망진창이 었던 모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정아가 온전히 연소현에게 집중할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책장을 넘기던 연소현의 귓가에 아스라이 세쌍둥이와 시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각까지 뭘 하는 거지?”
그의 앞에서 빈 찻잔을 거두던 정아의 눈이 황금빛 광채를 흘렸다.
“시녀들의 기본 업무에 대한 수업이 진행 중인 것 같사옵니다.”
“…첫날부터 너무 무리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말에 정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아이들은 주인님께서 지켜봐 주시는 한, 결코 멈추는 일도, 지치는 법도 없을 것이옵니다.”
그녀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저와 마찬가지이옵니다.”
책장을 넘기던 연소현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는 서책을 덮었다.
“…앞으로 거친 일들도, 돌발적인 일들도 생겨날 것이야.”
“칩거를 끝내셨으니 말이옵니다.”
연소현이 창을 바라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정아가 움직여 창을 열었다.
차가운 밤바람과 함께,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실려 들어왔다.
멀찍이 떨어진 전각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시녀들과 하녀들을 위한 숙소에도 곳곳에 등불이 걸려 생기가 느껴 졌다.
하인들을 쫓아낸 후,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던 원각정 곳곳에 다시 활기가, 그리고 따스한 인기척이 돌아왔다.
"…저 아이들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한 전력이다.”
가슴속, 누구보다도 깊고 따뜻한 주인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정아였다.
“그렇사옵니다.”
그가 처음에 세쌍둥이를 봤을 때의 반응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분명 그의 눈가를 스쳐 지나간 감정은 고통과 죄책감이었다.
그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만들어진'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그의 가슴속이 무거워졌음을.
정아가 세쌍둥이를 굳이 전담 시녀로 삼지 않은 이유도 그것이었다.
그녀들과 마주칠 때마다, 연소현의 마음 깊은 곳이 아려 오는 것을 정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하녀들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연소현은 굳이 그녀들에게 약속했다.
그녀들을 아끼고 소중하게 여길 것이라고.
그녀들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그녀들을 위해 울어 주겠다고.
그것은 그녀들을 위한 약속이 아니라, 그 자신을 향한 맹세였다.
“그러니….”
정아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들의 목숨. 그들의 노력이 낭비되지 않도록 소녀,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연소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래야지.”
연소현은 그녀가 열어 준 문을 통해,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편히 쉬시지요.”
“그래. 너도 좋은 밤 되거라.”
연소현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그녀들에게 내가 했던 약속말이다.”
정아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말씀 말이시옵니까.”
“...그건 너에게도, 쌍둥이들에게도 적용되는 약속이다.”
그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정아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다시 한번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가 모습을 감춘 뒤로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