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편 원각정의 하녀단(下女團)
밖은 대규모 공사로 인해서 소란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원각정의 안마당은 마치 딴 세상처럼 고요했다.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 낙양검가의 대공자, 연소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실로 화려하게 수놓아진 흑잠사(黑蠶絲) 외투가 어깨에 걸쳐져 바람에 펄럭였다.
그리고 그의 뒤를 원각정의 시녀장 정아와 세쌍둥이 시녀들이 우아한 발걸음으로 따랐다.
연소현이 임시로 마련된 낮은 단상에 올라서자, 집사부장이 엄숙한 태도로 한 발 앞으로 나서 입을 열었다.
“하녀단장은 앞으로.”
그러자 하녀단장으로 칭해진 여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절도 있는 발걸음으로 연소현의 정면에 섰다.
십 대 후반이나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하녀라기보다는 무인(武人)에 가까운 인상이었다.
쭉 뻗은 신장에 탄탄한 몸매의 그녀는 역시 집사부장이 직접 골라 키워 낸 작품답게 미색이 고왔다.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집사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의 주인이신, 대공자께 충성을 맹세하라.”
그러자 하녀단장이 등에서 검을 뽑아 눈앞에 세워 들었다.
“충(忠)!”
그와 동시에 그녀의 뒤에서 대열에 맞춰 정렬해 있던 사십구인의 하녀들이 일치된 동작으로 검을 뽑 아 들었다.
“충(忠)!”
오십 인의 여인들이 정연하게 검을 든 그 모습은 하녀들이라기보다는 검단(劍團)에 가까웠다.
그래서 집사부장이 그녀들을 하녀단(下女團)이라 소개한 것일지도.
그녀들의 한 치 어긋남도 없는 모습은 집사부장의 얼굴에 만개한 미소가 떠오르게 했다.
연소현은 단상에서 내려와 하녀 단장의 앞에 섰다.
그가 자신과 가까이 서자, 놀랍게도 천생 무인 같던 하녀단장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녀의 내리깐 긴 속눈썹이 떨려 오고, 얼굴에는 홍조가 드리웠다.
가만히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던 연소현이 입을 열었다.
“이름은?”
그녀는 곱게 칠한 앵둣빛 입술을 열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천녀, 향(香)이라고 하옵니다.”
연소현이 느닷없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
그녀의 입에서 따뜻한 입김이 흘러나왔다.
“손을 보니, 하루 이틀 검을 잡은 것이 아니군. 언제부터 검술을 수련했지?”
그녀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천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검을 잡아 왔사옵니다.”
“역시 그랬군.”
연소현은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 다.
그녀의 입에서 안타까움을 담은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공의 깊이를 보아하니, 심법의 수행도 충실했고….”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몸 곳곳을 훑어보았다.
“근골(筋骨) 또한 무공을 익히는데 부족함이 없으며, 이미 충분히 단련되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그녀의 몸이 움찔거리며 떨려 왔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거부감을 느끼거나 수치감을 느껴서가 아니었다.
연소현이 결론에 도달했다.
“훌륭하군. 이미 한 명의 무사(武士)라 부르기엔 부족함이 없다.”
과장이 아니었다.
그녀 한 명이면, 흑골파의 건달따위는 얼마나 덤벼도 능히 전부를 제압할 터였다.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재주이 옵니다.”
그녀는 발그레한 얼굴을 숙였다.
입에선 단내가 풍겼다.
"...."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연소현이 그녀에게 물었다.
“만일 내가 너를 받아들이지 않고, 내친다면 어찌하겠느냐?”
그녀의 눈망울이 거세게 흔들렸고, 눈에는 이슬이 고였다.
“…며, 명을 받들 것이옵니다.”
연소현이 그녀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그렇다면, 내가 네게 목숨을 바치라면?”
그녀의 얼굴에는 결연함과 단호함이 깃들었다.
“언제라도, 명에 따를 것입니다.”
연소현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내, 너희를 받아들이겠다 하면?”
그녀의 얼굴에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의 감정이 비쳤다.
“주인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은, 지고의 행복이옵니다.”
연소현이 그녀에게서 한 발짝 물러 섰다.
그녀는 그의 손길이 자신에게서 떠나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흠."
연소현이 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너는, 아니. 너희는….”
그의 시선이 자신만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하녀들에게 향했다.
“너희의 나를 향한 그 감정이 철저하게 심어진 것을 알고 있느냐?”
모두가 즉각 대답했다.
“예, 알고 있사옵니다.”
“너희의 정신이 교묘하게 조작된 것도?”
“예, 모두 알고 있사옵니다.”
망설임 따윈 없었다.
“너희는 모두 소모품에 불과하며, 나를 위해 존재하는 인형에 불과할지라도?”
연소현이 계속해서 물었다.
“앞으로 너희의 모든 삶이 나를 위해 사용될 것이며, 다른 이들처럼 연인을 만들고, 자신의 꿈을 이루고, 가족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불가능함에도?”
하녀단장이 연소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먼 하늘의 별을 바라보듯, 아련했다.
“그것이 저희의 행복이며, 저희의 꿈이며, 저희의 존재 이유이옵니다.”
"...."
연소현은 그런 그녀들을 바라보며, 윤리에 관한 헛소리들을 생각 하진 않았다.
과거 어머니와 함께 대흉작에 직격당한 장소들을 다녀 보았던 그였다.
차마 자기 아이의 시체를 먹을수 없었던 부모들이, 이웃끼리 아이의 시체를 교환해 끓여 먹는 것도 보았던 그였다.
그녀들의 처지에서 크게 죄책감을 느끼고, 측은함에 몸부림치기에는,
그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을 보아 왔다.
그것은 제암진천경의 연자가 아 니라, 과거의 연소현이었다고 해도 마찬가지 이리라.
“훌륭하군.”
그가 손뼉을 쳤다.
하녀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여기서 약속하겠다.”
연소현이 그녀들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쳤다.
“너희는 나를 위한 도구이지만, 나는 그 도구를 아끼고 소중하게 여길 것이다.”
그가 그녀들 사이를 걸었다.
“너희는 평범한 이들의 행복을 누릴 수는 없을 것이나, 나의 울타리 안에서 다른 이들이 느낄 수 없 는 행복을 누릴 것이다.”
연소현이 그녀들의 얼굴을 자신의 머릿속에 전부 새겼다.
“너희는 나를 위해 언제든 목숨을 던지겠지만, 너희를 잃으면, 세상 누구보다도 내가 목 놓아 울 것이다.”
그가 처음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하녀단장, 향이라는 이름을 가진 처녀를 바라보았다.
“너희는 이제 나의 것이다.”
그녀들이 하녀단 전체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충(忠)!”
* * *
집사부장과 정아가 그 모습에 열 렬히 박수를 보냈다.
“역시 주군이시군. 아무리 저 아이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라고 해도, 결국 허점이 있기 마련인데.”
“주인님께서 화룡점정을 하셨습니다. 이로써 저들은 완전한 걸작으로 거듭났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하하. 고맙구나. 정아, 네가 그렇게 말해 주니 한결 안심되고, 뿌듯하기도 하구나.”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을 작품입니다.”
광기가 골수까지 치민 부녀의 대화였다.
그 부녀와 하녀단은 놀랄 정도로 닮아 있어, 딱히 세뇌하는 이와 세뇌당한 이의 차이점 따위는 없어 보였다.
“와아아..."
뒤의 세쌍둥이도 함께 열심히 박수를 쳤지만, 그녀들의 표정은 상대적으로 조금 떨떠름했다.
사실 노골적으로 떨떠름했다.
“어, 왠지. 저희가 왔을 때와는 조금 다른 것 같지 않나요?”
“지금은 주인님께서 공식적으로 칩거를 끝내셨기 때문이겠지요. 그럴 거예요. 절대로 분명히 그럴 것이에요.”
“…저희가 원각정에 왔던 날. 그 날은 풍어(豐漁)였지요. 아직도 손에서 그때의 손맛이 느껴지는군요. 후후.”
* * *
연소현은 집사부장을 충분히 치하하고, 처소로 들어갔다.
집사부장은 감정이 벅차오른 얼굴로 눈물을 글썽인 채, 여러 당부의 말을 남기고 원각정을 떠났다.
정아가 하녀단 앞에 섰다.
그녀의 치맛단이 펄럭였고, 허리에 찬 검은 절그럭거렸다.
짙은 황금빛 눈빛이 하녀단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대공자님의 수석 전담 시녀이자, 원각정의 시녀장, 정아라고 한다.”
서릿발 같은 기세와 왕후(王后)의 위엄이 깃든 그녀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는 하녀단의 시선에 강한 동경(憧憬)의 빛이 떠올랐다.
“오늘도 일이 바쁘니, 내 짧게 말하도록 하마.”
정아의 눈빛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너희는 앞으로 주인님께 감히 누가 되는 일이 없게 해야 함은 당연한 일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그저 자신의 자리에 안주하고자 하는 이는 내 친히 쫓아 내고야 말 것이야.”
정아는 하녀단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을 꺼내어, 그녀들을 떨게 했다.
“그러니 너희는 절대 안주하지 말고, 주인님의 존함을 더욱 빛날 수 있게 할 각오로 임해야 할 것이다.”
정아의 목소리가 안마당 전체에 울려 퍼졌다.
“알겠느냐?!”
하녀단이 그들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시녀장님!”
정아가 손짓으로 세쌍둥이를 불렀다.
세쌍둥이가 세상 얌전한 표정으로 대령하자, 정아가 하녀단에게 그녀들을 소개했다.
“이들은 원각정의 시녀들로, 앞으로 너희를 책임질 일령, 이령, 삼령이라고 한다.”
세쌍둥이 시녀들이 생긋 미소 지으며, 하녀단에게 인사했다.
“이들이 비록 나이가 어리고, 외모가 앳되지만, 너희보다 실력이 뛰어나고, 배움이 깊다.”
세쌍둥이가 새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니 너희는 이들을 스승을 모시듯 해야 할 것이야. 알겠느냐?”
또 한 번의 커다란 대답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아는 고개를 끄덕이곤, 세쌍둥이를 바라보았다.
“너희는 다음 하녀단이 도착하기 전에, 이들 전부가 시녀단(侍女團)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녀의 눈에서 황금빛 광채가 흘렀다.
“알겠느냐?”
세쌍둥이가 그 무시무시한 시선에 식은땀을 홀리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무자비하게 몰아붙이겠습니다!”
잠시 그녀들을 지그시 바라보던 정아가 찬바람이 날릴 정도로 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안마당에 있던 모두가 고개를 깊이 숙여, 그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이윽고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세쌍둥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며 흐흐흐 하고 웃었다.
이제 드디어 자신들의 시간이 왔다.
주인님부터 시작해서, 집사부장, 그리고 시녀장까지.
길고도 긴 인내의 시간이었다.
일령이, 턱 하고 짝다리를 짚었다.
그리고 바닥에 침을 퉤 하고 뱉었다.
“후후. 너희는 이제….”
그때 보이지도 않는 저기 저편에서 정아의 노성(怒聲)이 날아들었다.
“일령! 주인님의 시녀다운 몸가짐을 잊지 않도록!”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른 일령이 다시 다소곳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예! 시녀장님! 소녀, 명심하겠습니다!”
대답은 없었다.
잠시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던, 일령이 한숨을 쉬고 하녀단에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다들 보았겠지요? 시녀장님은 매우매우 대단한 분이시랍니다. 여러분이 어디서 무엇을 잘못하든지 모두 시녀장님이 보고 계신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예요.”
이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번에 제가 주인님께 드릴 당과를 준비하다가 하나를 몰래 먹었는데, 대번에 알아채시더군요.”
“제가 빨래를 하다가 실수로 속곳을 하나 찢었을 때도 그랬지요.”
“그러고 보면….”
그때 삼령이 일령과 이령을 향해 헛기침했다.
“지금 그런 이야기들을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녀의 말에 일령과 이령이 다시 음흉한 미소를 되돌렸다.
“후후. 그렇지요.”
“이제부터 저희는 여러분께 원각정의 가장 기초가 되는 임무부터 알려 드리도록 하겠어요.”
“후후후. 이건 전부 기초에 불과하니, 시작부터 힘들어하는 모습은 절대 보이지 않도록 하세요.”
그녀들의 음흉한 미소가 원각정의 공터에 울려 퍼졌다.
하녀단은 그녀들의 미소에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