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편 원각정, 변화의 시작 (2)
원각정 외곽을 따라 담을 수리하던 인부들이 시원한 물을 나눠 마시며 숙덕거렸다.
“자넨, 저런 정복을 입은 이들에 대해서 들어 보았는가?”
“예전, 무공학관(武功學館)에 보수하러 갔을 때, 한번 본 적이 있지. 하지만 어디 소속인지는 모른다네.”
“그저 순찰하는 것뿐인데도, 심상치 않은 무사님이라는 것이 느껴 지는구먼.”
그때 그 시끄러운 현장에서 그들의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는지, 특임대원이 그들을 흘긋 바라보았다.
“어이쿠…! 물이 차구먼!”
“흠흠! 자, 다들 작업하러 돌아가세!”
그들이 곡괭이니 삽이니 장비들을 챙겨 부산을 떠는 모습을 보던, 특임대원이 함께 순찰 중이던 동료에게 전음을 날렸다.
'이거…. 그저 대공자의 칩거가 끝났다고 공표만 하는 정도일 줄 알았더니,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르군.’
그들이 순찰을 돌고 있는 담벼락을 따라서만 해도 수백 명의 인부가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본가의 대공자가 아닌가. 이전 같은 모습으로는 본가의 체면에 문제가 되리라 판단한 것이겠지.’
그들은 자재를 산더미같이 쌓아서 지나가는 마차를 피해 주고, 순찰을 계속했다.
“허, 참. 그래도 그렇지, 긴급명령까지 내려서 이리 대대적으로 공사까지 할 이유가 있냐는 말일세. 어차피 무검자라고 불리는 대공자가 칩거가 끝났다 하여, 급히 방문할 이들이라도 있겠는가?’
'…뭐, 윗분들의 생각을 우리 같은 돌대가리 칼잡이들이 어찌 알겠 나?’
'돌대가리라니…!,
'자네, 무공서나 전술 서적 말고 읽은 서책이 얼마나 되는가?’
'...그러는 자네는 몇 권이나 된다고 그러나?!’
'....'
두 사람은 어째서인지 내상을 입은 기분을 느끼며, 묘하게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순찰을 계속했다.
* * *
“하나, 둘 셋!”
우렁찬 구령 소리에 맞추어, 채찍이 휘둘러졌다.
굵은 쇠사슬로 연결된 스무 마리의 황소들의 근육이 역동적으로 꿈틀거렸다.
황소들의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원각정의 정문을 지탱하던 기둥들이 뽑혀 나오며, 정문 전체가 그대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와아아!”
홁먼지가 휘몰아치는 와중에도 계산대로 깨끗하게 무너져 내린 정문의 모습에 인부들이 환호했다.
이어서 기술자들의 명에 따라, 기중기가 움직였고, 도르래들이 비명을 지르며 새 기둥을 우뚝 세웠다.
이어서 미리 준비하고 있던 목수들이 달라붙어 순식간에 새로 정문을 만들어 나갔다.
경이로운 모습이었다.
긴급명령에 따라 무제한의 자본과 인력이 퍼부어지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낙양검가 건축사업부의 역량이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그 광경을 지켜보는 탈명귀검의 표정은 어째서인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이야, 장관이구먼."
“이 속도라면 공사가 다 끝나기까지 하루 이틀이면 되겠어.”
순찰을 마친 두 특무대원이 새 정문을 감상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대장, 순찰 끝났소.”
“아. 고생들 했네. 특이 사항은 없던가?”
“특이 사항이라 해 봐야, 담 저쪽으로 떨어진 인부 몇 명을 구출한 정도요.”
“그리고 막아 두었던 원각정의 후문(後門)이 개방되었소. 한참 수리를 하고 있더군.”
기존에는 쓸 일이 없기에 아예 봉해 두었던 후문이었다.
“미리 이야기가 된 바였네. 그래서 후문에도 인원을 배치하였는데, 보았는가?”
“보긴 봤소. 누구 할 것 없이 공사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 더군.”
특무대원이 낄낄거렸다.
“그나저나, 정문은 아예 새로 지어 버리는 모양이오?”
“방치된 기간이 너무 길어, 새로 짓는 것이 낫겠다고 하더군. 그리고 저쪽이….”
탈명귀검이 손을 들어 정문의 바로 옆을 가리켰다.
인부들이 기초 공사를 마치고, 벌써 기중기를 이용해 대들보를 올리고 있었다.
“정문 초소가 될 걸세.”
특무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찰을 한 바퀴 돌아보니 곳곳에 초소들을 짓고 있었소.”
“...뭐. 꿀 빨던 시절은 끝났어도, 나름 근무할 맛은 나겠군.”
탈명귀검이 원각정의 정문에서 가장 가까운 큰길 변의 이 층 건물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쪽이 원각정 특무대의 본부가 될 걸세. 그 뒤의 건물들은 수리하여 대원들의 숙소로 배정될 것이고.”
이 층 전각은 외부 작업을 하는 인부들을 위한 비계(飛階)가 설치되어, 안팎으로 대대적인 수리가 진행 중이었다.
“본부와 숙소라….”
”허허. 보아하니, 아예 소형 병영으로 만드는 모양새인 것 같소.”
“아무래도 최고 운영 회의의 높은 분들이 대공자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우리와는 많이 다른 모양이오.”
탈명귀검이 어깨를 으쓱였다.
“…전에 말했잖은가. 대공자님은 소문과는 다른 분이라고.”
특무대원이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 광경을 보아하니, 어쩌면 대장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오.”
“그런데 대장은 왜 그리 죽상을 쓰고 있소?”
다른 특무대원이 맞장구쳤다.
“그러게. 대장이 좋아하는 그 대공자를 위해, 모두가 이 난리를 치고 있는 것이 아니오?”
“...별것 아닐세.”
말과는 다르게 탈명귀검의 시선은 정문 안쪽을 향해 있었다.
그곳에는 무너진 돌무더기들이 쌓여 있었는데, 인부들에 의해서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저건 대장이 대공자의 명으로 숙소로 쓰던 연락 하인용 대기소가 아니오?”
“대장이 저 안에서 먹고 자고 하는 모습은, 야인(野人)이 따로 없었지.”
두 특무대원이 낄낄거리는 것을 무시하고, 탈명귀검이 안타깝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나름 정이 든 집이었는데 말일세.”
"...."
두 특무대원이 이상한 것을 보는 시선으로 탈명귀검을 바라봤다.
“...특무대라는 곳이 어디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긴 하지.”
“사지 멀쩡한 양반이 왜 특무대에 있나 했더니, 역시나 머리가 문제였구먼.”
* * *
원각정 큰길가의 건물 내부.
큰길 주변 건물들의 수리를 책임지는 간부들과 기술자들이 벌이던 회의가 막 끝난 뒤였다.
남은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뱃대를 물거나 연초를 태우는 와중에 체구가 좋은 간부 하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들어왔다.
“어이! 고생 많았소!”
그는 인사에 적당히 답하며 모여 있는 이들에게로 다가왔다.
“원각정의 시녀장이라는 여자는 귀신이 틀림없소. 그것도 그냥 귀신은 아닐 거요.”
이미 새벽부터 시녀장에게 한번 씩 당해 봤던 간부들이 껄껄하고 웃었다.
“시녀장의 미색이 월궁의 항아와 같다며 맡겨만 달라더니, 이제 와서 딴소리하기 없네.”
“다른 간부가 새로 파견 와서 외 모에 속아 넘어가기 전까지 그 시녀장과의 연락 담당은 자네일세.”
“아니, 그건….”
어떻게든 하고 싶지만, 이미 스스로가 뱉은 말이 있으니 방법이 없었다.
체격 좋은 간부는 당장 도망이라 도 가고 싶은 표정이 되었다.
“조금이라도 우리 쪽에 유리하게 진행하려고 하면, 귀신같이 전부 알아채는데, 당할 도리가 없소.”
“게다가 그 기이한 눈빛으로 바라보면, 뱀을 눈앞에 둔 개구리 신세가 된다니까.”
다들 한마디씩 보태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 바닥에서도 무서운 인물들은 많지만, 역시 그렇게 젊은 나이에 대공자의 시녀장 정도 되려면, 저정도는 되어야 하는 모양이지.”
다른 간부에게 연초 하나를 받아 입에 문 체격 좋은 간부가 간이 부싯돌로 불을 붙였다.
“그나저나 이 많은 큰길가의 건물들을 모두 수리하는 이유가 뭐요?”
“그건 우리도 잘 모르겠소.”
한 간부가 밖을 내다보았다.
무너뜨린 벽면 너머로 큰길가의 건물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수리가 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보이는 것이 문제라면, 외부만 수리하면 그뿐인데 말이지….”
“그 정체 모를 고수들을 위한 병영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다른 건물들까지 전부 내부를 수리해야 하니….”
늙수그레한 간부 하나가 서류를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요구 사항만 봐서는, 손님들을 위한 대기소, 그리고 업무를 보기 위한 행정동 같은 용도로 쓰려는 모양이오.”
그의 말에 다른 간부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기소…? 대공자는 자신을 찾아올 이들이 그렇게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이오?”
“아니, 세력도 변변찮은 대공자가 무슨 이렇게 많은 업무용 건물이 필요하다는 말이오?”
“세력이 변변찮은 게 아니라, 아예 없지 않나?”
“아니면 나중을 위해서라도 미리 준비를 해 두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뭐, 주로 외부에서 일하는 우리야 내부 정치는 잘 모르지마는.”
“이제야 후계자 경쟁에 뛰어드는 대공자에게 승산이 희박하다는 것은, 내부 정치를 잘 몰라도 충분히 알겠네만….”
그때 늙수그레한 간부가 긴 담뱃대를 털며 끼어들었다.
“잘 모르는 일이라면, 아예 논하지를 말라는 말을 모르는가? 우리 부서가 일정 문제로 쉬던 상황에서 이런 '작은 공사'라도 있는 것이 어딘가.”
수백 명이 넘게 동원되고, 자금과 자원을 퍼붓다시피 하는 공사를 '작다'라고 표현하는 간부였다.
평소 낙양검가의 건축사업부가 어떤 규모로 사업을 진행하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뭐, 우리야 특수 업무 수당 확실하게 계산되니….”
“그리고 실적 또한 올라가니 나쁠 일은 없소.”
“게다가 이렇게 다양한 부서와 협력하여 최대 인력으로 급속 진행 업무를 해 보는 기회는 좀처럼 없으니. 경험적으로도 이득이오.”
늙수그레한 간부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었다.
“그럼 대공자 걱정은 그만해 주고, 다들 다시 업무로 돌아가세. 일정에 맞추려면 여유 부릴 시간이 없으니.”
* * *
저편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집사부장이었다.
멀리서 봐도 고급스러운 비단옷을 입은 집사부장의 행차였다.
그의 모습을 발견한 인부들은 급히 손을 놓고, 깊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리고 그의 뒤로 일단의 어여쁜 여인들이 줄을 이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소곳한 몸가짐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들의 미모에 인부들이 흘긋거리고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들 모두는 원각정의 하녀복을 단정하게 갖추어 입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모든 하녀의 등에는 검 한 자루가 단단히 묶여 있었다.
“드디어.”
“저희의 수하들이 도착했군요.”
“후후후.”
일령과 이령이 정아 뒤에서 속삭임을 주고받았다.
그녀들의 눈에는 자신들을 키워준 집사부장의 모습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제 자신들의 밑으로 배치될, 하녀들의 모습을 살피는데 여념이 없는 쌍둥이 시녀들이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새침한 표정과 자세를 잊지 않았다.
“시녀 장.”
“집사부장님.”
정아와 집사부장이 정중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집사부장은 문서 하나를 펼쳐 보이며, 입을 열었다.
“본가의 최고 운영 회의의 긴급 명령에 기반을 둔 원각정의 요청에 따라, 본 집사부는 총 오십 인의 하녀들을 인계할 것을 밝히는 바이다.”
그의 표정은 사무적이고 딱딱하기 그지없었지만, 정아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주군께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 날뛰는 중이었다.
정아는 그런 그에게 정중히 문서를 건네어 받고, 미소 지었다.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흠흠. 그러는 것이 좋겠군.”
집사부장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얼른 정아의 뒤를 따랐다.
혹여나 정아가 바쁜 와중에, 하녀들만 인계받고 돌아가라고 할까봐 내심 걱정하던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