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94화 (94/350)

제19편 원각정, 변화의 시작 (1)

아침.

원각정 정문(正門).

교대조에 관계없이 원각정에 파견되었던 특임대 전원이 집합했다.

“대장! 정복이 잘 어울리시오!”

“새장가를 들어도 되겠소.”

경비대원 옷을 입은 그들은 왁자 지껄 떠들며, 탈명귀검을 놀렸다.

탈명 귀검(奪命鬼僉)은 오랜만에 입은 특임대(特任隊) 정복이 불편한 듯, 목 부분을 몇 번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지금부터 자네들도 전부 정복을 착용해야 하네.”

그의 말에 좌중이 충격에 빠졌 다.

“아, 안 돼!”

“대장! 그 말이 사실이오?!”

평생 무사로 살아온 그들에게 정복이라는 존재는 혐오스러움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자, 다들 시끄럽고.”

모두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탈명귀검을 바라봤다.

“다들 이미 들었겠지만, 오늘 오전 공식 업무를 시작함과 동시에 대공자님에게 내려져 있던, 칩거 명령이 해제되었네.”

원래 이들은 대공자에 대해서 호감이라고는 없던 이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라고, 불편한 정복을 입어야 한단 말인가….”

“대공자는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적이 없군.”

“진지하게 전근 요청을 할 때가 된 것인가.”

“사실 이제까지, 원각정에 배치된 덕분에 꿀을 빨긴 빨았지.”

다들 뚱한 반응이었지만, 탈명귀 검은 무시하고 말을 이어 나갔다.

“최고 운영 회의는 원각정의 기능 정상화를 위한 긴급명령을 발령했고, 따라서 우리 또한 당연히 협조를 해야 하지.”

“우리가 뭐 따로 할 일이 있다고 전부 집합시킨 것이오?”

“긴급명령은 언제까지 지속되는 거요?”

여기저기서 질문이 날아들었다.

“일단 긴급명령은 원각정의 기능이 정상화되었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그 시점에 종료되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리 길지는 않을 걸세.”

다들 기뻐하는 분위기가 돌자, 탈명귀검이 피식하고 웃었다.

“좋아할 것 없네. 정복 착용은 긴급명령 때문이 아니라, 대공자님의 칩거가 해제되었기 때문이니까.”

앞으로 계속 정복을 착용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특임대원들이 불만이 터져 나오기 전에 탈명귀검이 재빨리 말을이었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임시 파견 형태로 있던, 원각정의 특임대도 거기에 맞추어 조직이 재정비가 될 것으로 보이네.”

“그게 무슨 말이오?”

탈명귀검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아직 원로원(元老院)에서 제대로 된 명령을 받지 못했기에, 자세한 사항은 모르네.”

특임대는 원로원 직속의 명만을 수행하는 별정 조직이었기에, 기존의 명령 체계와는 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인원의 추가는 즉시 이루어질 것이고, 보안 취약 지점을 중심으로 추가적인 조치가 이루어 질 것 같더군.”

다들 한숨을 쉬었다.

“좋은 날들은 이제 끝이군.”

“아닐세. 어쩌면 부려 먹을 만한 녀석들이 들어올 수도 있지.”

“하. 꿈 깨게. 이 특임대라는 조직에 그런 햇병아리가 있을 리가 없으니.”

탈명귀검이 주목을 끌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확실한 것은 칩거가 끝난 원각정에 어떤 경비 문제도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걸세.”

그의 말에 다들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이 원각정에 별일이 있겠 소?”

“아무리 대공자의 칩거가 끝났다고는 하지만 딱히 원각정이 붐빌 일도 없을 것 같은데?”

“그냥 우리만 귀찮아지는 것 아닌가?”

탈명귀검이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누가 묻는다면 긴급명령 업무와 관계없는 모든 방문객은 공사가 끝나고 받기 시작할 것이라, 그렇게 안내하면 되네.”

그의 말에 특임대원 하나가 눈을 껌뻑 였다.

“무슨 공사 말이오?”

탈명귀검이 뒤를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뒤를 향했다.

“어…?!”

“저, 저게 다 뭐요?”

“도대체 무슨 일이야?”

대로의 저편에서 엄청난 숫자의 인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자재를 산처럼 쌓은 수레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서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다들 정신들 차리게.’

다들 안력을 돋우어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자, 탈명귀검이 모두에게 전음을 날렸다.

'공사 인부들에게 무시당할 생각인가?’

그 전언이 끝나기 무섭게, 특임 대원들이 오와 열을 맞추고, 자세에 각을 잡아 정렬했다.

그러고는 은은하게 기세를 흘리기 시작하니, 특임대원들의 경지가 경지인지라, 사뭇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선두에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던 비단옷의 무리는 그런 특임대원들의 모습에 위축된 기색이 역력했다.

“여, 역시 원각정입니다. 본가의 대단한 무사분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가장 앞선 이가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다가와 탈명귀검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저는 검가건축의 제삼사업부 부장인 탁 모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탈명귀검이 줄줄이 소개를 이어 나가려는 그의 말을 끊었다.

“나는 원로원 직속 특임대의 특임대장이오. 내게 소개를 할 필요는 없소.”

잔뜩 주눅이 든 그들은 그저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대공자께서 원각정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따라오시오.”

* * *

소년 사환(使喚)은 원각정을 향해 달리는 중이었다.

“우와! 완전 꽉 막혔잖아…!”

원각정 방향의 뒷길은 들어오고 나오는 마차들로 발 디딜 곳이 하나 없었다.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려, 큰길(大辂)로 나섰다.

평소라면 겨우 심부름꾼에 불과한 그가 절대 이용할 수 없는 큰길이었지만.

오늘처럼 '중요(重要)' 깃발을 등에 멘 날에는 그도 큰길을 달릴 수 있었다.

“비켜 주세요! 중요 서신입니다!”

하지만 아뿔싸.

마차 사이를 겨우 빠져나와 큰길로 들어섰던 그는 인부들이 원각정으로 향하는 큰길의 포석들을 전부 뒤집어엎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원활한 이동을 위해서 한쪽은 건드리지 않은 채였지만, 그쪽마저도 자재를 가득 실은 마차들과 손수레로 가득했다.

“…어쩔 수 없지.”

그는 인부들이 작업중인 공사 현장으로 뛰어들어 달렸다.

“중요 서신입니다!”

수백 명의 인부가 삽질과 곡괭이질을 하는 현장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지만, 중요 서신의 전달은 매우 중요한 임무였다.

“어이! 조심해!”

“죄, 죄송해요! 중요 서신이라서요!”

그는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이리저리 위험한 순간들을 용케 피해 달리던 소년 사환은 빠져 달릴 구석이 없자, 폐기 포석 무더기를 밟고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

하지만 소년이 그 꼭대기를 강하게 박차는 순간, 불안하게 쌓여 있던 포석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으와앗!”

균형을 잃고 미끄러진 소년은 어떻게든 몸을 웅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대비했던 충격은 오지 않았다.

소년은 자신의 뒷덜미를 붙잡힌 채, 제 발로 바닥을 디딜 수 있었다.

“가, 감사…!”

무심코 뒤를 돌아봤던 소년은 깜짝 놀랐다.

“흐응. 그 짧은 순간에 몸을 웅크린 것은 좋았네요.”

소년을 공중에서 한 손으로 잡아챈 것은, 겨우 소년보다 한두 살 많아 보이는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녀의 허리께에는 소검(小劍)이 매여 있어, 그녀가 평범한 시녀가 아님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눈을 감지 않아야, 대처도 할 수 있고, 충격도 줄일 수 있답니다.”

정갈한 시녀복을 입은 그녀는 주변 인부들의 박수에 손을 들어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시녀님!”

소년 사환의 기습적인 칭찬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호호! 우리 원각정의 시녀들은 전부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이 일령이 그중에서 가장 빼어난 편이지요.”

그녀가 빨간 얼굴로 자신을 훔쳐 보는 소년 사환의 등을 떠밀었다.

“자! 중요 서신 같은데, 어서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세요!”

“옙! 알겠습니다!”

그는 몇 번 더 감사를 표하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방금 일령이라고 했던 시녀와 같은 복장의 시녀를 발견했다.

그녀는 현장 책임자처럼 보이는 이와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는데,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 포석들은 색이 묘하게 다르지 않나요?!”

“하지만 이 정도는, 작업 지침상 허용 범위 내로….”

“지금 감히 원각정의 대로에 다른 흔해 빠진 대로와 같은 기준을 적용하겠다는 것인가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방금 그 아름다운 시녀님과 목소리도 비슷하네….'

그녀를 흘긋 바라보고 지나치던, 소년 사환이 급히 뒤를 돌아봤다.

'엥?!’

그의 시선을 느낀 시녀가 그에게 쌍심지를 세웠다.

“사환! 저에게 볼일이 있나요!?”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급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몇 번이고 그녀를 돌아보았는데, 조금 전 그를 구해 주었던 시녀와 너무나 똑같이 생겼던 것 때문이었다.

잠시 후, 그는 높기만 하고 낡아 빠진 원각정의 담벼락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선, 그 담을 따라 인부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삭은 기와는 전부 치워! 아니다, 그냥 이쪽은 전량 교체해!”

조장들이 돌아다니며 바삐 지시를 내렸고, 인부들의 손은 더욱 빨라졌다.

“그쪽 담은 그냥 전부 허물어 버려라! 새로 올리는 게 낫겠다!”

한 조장은 담 위를 다니면서, 경고하기도 했다.

“담 안쪽으로 떨어지면, 절대 숲 안쪽으로 들어가지 마라! 옆으로 돌아 나오려고도 해선 안 된다! 반드시 침착하게 내려 주는 밧줄을 잡고 올라와야 한다!”

원각정의 담벼락을 따라서, 쉴새 없이 수레들이 오갔다.

한쪽에서는 회반죽을 쳐 대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석재들이 재단되 었고, 또 한쪽에서는 기왓장이 종류별로 쌓고 있었다.

'저기다…!’

사환은 이윽고, ‘합동 정비, 현장 지휘 본부'라는 깃발이 걸린 커다란 천막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쪽에서 제대로 협력을 해 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왜 곧 도착한다던 자재가 도착을 안 하나?!”

하지만 천막 앞은 온갖 실무진으로 가득했다.

“주, 중요 서신입니다!”

그가 한 번 소리를 높여 보았지만, 일꾼들과는 달리, 정신없이 바쁜 실무진들은 그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비비며, 그 틈을 파고들었다.

“중요 서신이라서요, 으엑! 죄송 합니다, 억…! 지, 지나갈게요.”

사환이 땀투성이의 몸을 비벼 대 자, 실무진들이 인상을 쓰며, 투덜 거렸다.

“아니, 긴급명령이 떨어진 원각정에 도달하는 모든 서신이 '중요' 등급인데, 뭘 그리 소란을 떠는 게냐?”

“에잉, 네 녀석 정도가 나르는 서신이 '중요'하면, 이 몸은 '최중요'한 임무를 수행 중이시다.”

사환은 결국 악을 썼다.

“이 서신은 집사부장께서 직접 맡기신 서신입니다요!”

'집사부장'이라는 말에 실무자들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섰다.

그렇게 소년 사환은 겨우 사람들로 이루어진 벽에서 겨우 머리라도 집어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소년은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소름 돋을 정도의 미색을 자랑하는 가인(佳人)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전 중으로 갑, 을, 병, 세 구역의 정비를 마칠 수 있겠습니까?”

여인의 금빛으로 번뜩이는 시선이 향하자, 현장의 책임자로 보이는 비단옷의 사내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답했다.

“어, 어떻게든 해 보이겠소!”

“저와 시녀들이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한 치의 허술함도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이오!”

여인의 시선은 전혀 소년 사환을 향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오싹한 한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음? 중요 서신인가요?”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소년이 펄쩍 뛰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을 건 시녀의 얼굴을 보고 또 한 번 깜짝 놀라고 말았다.

“으앗?!”

“꺄앗?! 사람의 얼굴을 보고 놀라다니! 실례예요!”

거기에는 이전에 보았던 두 시녀와 똑같이 생긴 시녀가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서신을 원각정의 시녀장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지, 집사부장님께서 전하신 중요 서신입니다!”

수령장에 수결(手決)을 하는 시녀장에게 앞의 두 명과 똑같이 생긴 시녀가 물었다.

“드디어 오는 겁니까…?”

시녀장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드디어 너희가 부릴 하녀들이 온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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