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편 노인들의 마을
천상가(天上家)라고도 불리는, 낙양검가에는, 그 명성만큼이나 기이한 장소도 많았다.
사시사철 꽃이 피며, 한겨울에도 시들지 않는다는 원각정(原各庭).
그 원각정의 뒤로 숭산(嵩山)까지 펼쳐진 금지(禁地), 수림마경(樹林魔境).
권한이 없는 자가 발을 디뎠다가는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목이 잘려 발견된다는 가주의 처소, 심부(深部).
지저 깊은 곳에 나찰(羅刹)과 수라(修羅)들을 영원히 가두어 서로를 죽이게 한다는 지하 뇌옥(地下牢獄).
때와 시를 맞추어 방문하지 않으면 행방불명이 되고 만다는 당(唐) 태상부인의 처소, 유령전각(幽靈殿 閣).
이외에도 낙양검가에 소문은 무성하지만, 감히 공개적으로 입에 올리지 않는 기경(奇境)들이 있었다.
그중, 멀리서 보면 그저 노인들 이 모여사는 산자락의 평범한 마을에 불과해, 노인촌(老人村)이라 불리는 장소가 있었다.
그 장소의 정체를 아는 이들은, 그곳을 낙양검가의 원로원(元老院)이라, 존경과 두려움을 담아 불렀다.
* * *
이른 새벽.
낙양검가, 외곽.
작은 거인이라 불리는 장로원주(長老院主)가 언덕을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언덕을 따라 파릇파릇하게 올라 오는 보리 싹이나, 겨울을 견뎌 내고 자라는 파, 마늘, 시금치 따위의 밭이 펼쳐져 있었다.
아직 해가 채 뜨기도 전이었음에도, 부지런한 노인들이 밭들을 살피고 있었다.
허름하기 짝이 없는 옷을 입은 노인 중에는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이도 있었지만, 장로원주는 알은체하지 않았다.
전대(前代) 장로원주에게 배웠던 대로 행동했다.
천하 누구도 부럽지 않은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쌓았던 이들이, 이곳에서 한낱 촌부처럼 살아가는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방금 염소 떼를 몰아 지나친 노인은 그가 장로 위(長老位)에 오르기도 전에 은퇴한 접객당주(接客堂主)였다.
세심한 손놀림으로 보리 싹을 살피는 노인은, 과거 그 손놀림으로 적들의 수급(首級)을 수확하듯 거두어들이던 낙양검가의 수위무사(首位武士)였다.
장로원주는 그들을 지나쳐, 이윽고 마을의 입구에 다다랐다.
“이곳은 노인촌입니다. 무슨 용건으로 오셨습니까?”
낡은 경비대원의 옷을 입은 중년 무사 두 명이 그를 빤히 쳐다봤다.
그들은 원각정을 지키는 무사들과 마찬가지로, 원로원 직속의 특임대(特任隊)에 속한 은퇴무사들이었다.
“…나는 본가의 장로원주일세. 이곳의 촌장(村長)님과 약속이 있어서 왔네.”
무사는 그를 대기시켜 놓고, 확인하겠다며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뻔히 그가 약속까지 잡고 찾아왔는데도 입구에 미리 이야기를 해두지 않은 노인들의 행태에,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들은 현역에 있는 권력자들을 반기지 않았고, 심지어 경멸하기까지 했다.
“…돼지를 잡는 소리가 나는군.”
그의 물음에 경비대원이 무심히 답했다.
“그렇습니다.”
“무슨 잔치라도 있는가?”
“모릅니다.”
“…그렇군.”
잠시 후 중년 경비대원이 돌아왔다.
“무기는 이곳에 맡기시지요. 가지고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없네.”
“내부에서는 내공의 사용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알고 있네.”
“큰 소리를 치거나 소란을 피우면, 추방당하실 수 있습니다.”
“알겠네.”
시시콜콜한 주의 사항에 일일이 대답을 하며, 장로원주는 한숨을 삼켰다.
* * *
아담하고 허름한 마을 회관에는 노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불을 쬐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농사일을 하지도 못할 만큼 늙은 사람들이었다.
장로원주가 들어왔지만, 그에게 시선을 주는 이는 없었다.
“말학(末學) 왕(王) 모가, 가르침을 받고자 가문의 원로님들을 뵙습니다.”
장로원주가 정중히 예를 표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코웃음이었다.
“장로원주가 됐다고 자랑하던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방문이었던 놈이 가르침은 무슨.”
장로원주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자랑하려던 것이 아니라, 절차대로 원로원의 재가(裁可)를 받기 위한 방문이었습니다.”
“저놈 저거, 말대답하는 거 보게.”
“못돼 먹은 놈. 저런 놈이 꼭 나중에 사고 치고 수습해 달라고 찾아온다니까.”
손가락질과 함께 턱도 없는 매도의 말들이 날아들었다.
장로원주는 속으로 거듭해서 '참을 인' 자를 새겼다.
연원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 지팡이를 든 노인이 손을 들어 보이자, 장내가 조용해졌다.
치렁치렁한 백발을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그녀가 이 마을의 촌장, 원로원의 수장인 원로원주(元老院主)였다.
“그래, 무슨 용건인지나 밝혀 보게.”
그녀는 그에게 앉을 자리조차 권하지 않았다.
장로원주는 자리에 선 채로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발언했다.
“실은 대공자 연소현의 칩거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는데, 이미 어제 최고 운영 회의에서 결론이 났습니다.”
“오늘 공식 업무가 시작되는 시간을 기점으로 그 아이의 칩거에 대한 해금령이 선포되겠지. 알고있네.”
그녀의 탁한 눈이 장로원주를 향했다.
“그렇기에 우리가 자네의 방문 요청을 오늘에서야 승낙한 것이니까.”
한마디로 대공자의 칩거에 대한 조언을 해 주기 싫었다는 말이었다.
“…이런 중차대한 문제에 본가의 장로원주인 저에게까지 조언을 해주지 않으려 하신다면, 원로원의 존재 의의가 무엇인지요?”
장로원주로서는 일침을 날리려한 것이었지만, 원로들은 놀라울정도로 개의치 않았다.
“여긴 할 일 없고 연고 없는 노인네들이 모여 사는 촌락에 불과하네.”
“우리 낙은 송아지들이 잘 자라고, 작물이 잘 영그는 데 있지,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는 데 있지 않다네.”
장로원주는 이만 몸을 돌려 그대로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전대 장로원주의 당부를 떠올리며 참았다.
그는 자신에게 '장로원주라는 자리의 성공 여부는 원로원에서 얼마나 조언을 많이 들을 수 있냐'는 것에 달렸다고 했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본가에서 대우받고 대접받는 원로들이 아닙니까? 그런 분들이 대공자에 대한 문제에 조언을 하지 않으시겠다니요?”
원로원주의 주름이 자글거리는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우리가 받는 존경과 우리가 받는 대접은 우리가 과거에 본가에 헌신했던 대가에 불과하네.”
그녀의 지팡이에 매달린 금속 고리가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냈다.
“그 외에는 우린 한낱 촌부에 불과하지.”
장로원주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낱 촌부 말입니까? 그런 한낱 촌부들이 본가의 장로원주에 대한 재가 권한을 가지고, 본가의 호법원주와 집법원주에 대한 지명권을 가진답니까?”
그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런 분들이 본가를 이끄는 최고 운영 회의의 구성원인 최고위원을 선출한단 말입니까?!”
그는 자신이 소리를 치고도, 아차 싶었다.
좁은 회관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노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하고 있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과거, 일세를 풍미했던 인물들이었다.
아무런 기세(氣勢)도, 아무런 기백(氣魄)도 없는 그 눈빛들이었다.
그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원로원주가 지팡이를 살짝 흔들자, 다시 한번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퍼뜩 정신을 차린 장로원주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권세(權勢)에도, 권위(權威)에도, 권력(權力)에도 관심이 없는 한낱 촌부일세.”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그런 막중한 권한(權限)이 주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장로원주에게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용건이 없다면, 이제 떠나게.”
다른 원로들이 한마디씩 보탰다.
“그래. 어서 돌아가라.”
“권력 놀음은 밑에 내려가서 아이들끼리 하려무나.”
장로원주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한번 정중한 태도로 예의를 차렸다.
“…혹여 이 말학에게, 현재 본가의 후계 문제에 대한 조언을 내려주실 수 없겠습니까?”
“…본가에 후계 문제가 있었나?”
“나는 그런 어려운 문제는 잘 모르겠구먼.”
노인들이 귀를 후비거나, 허공을 바라보는 듯 딴청으로 보이는 행동을 했다.
원로원주가 혀를 찼다.
“자네도 원로원에 들어오기는 글러 먹은 인물이군.”
“...무슨 말씀입니까?”
그녀 대신 주변의 원로들이 한마디씩 뱉었다.
“끼어들지 마라.”
“관여하지 마라.”
원로원주가 손가락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게.”
장로원주 이마에 주름이 더해졌다.
“…그 말은 본가에 들어온 아랫것들에게 처음 가르치는 내용입니다만.”
“장로원주쯤 되니 자신이 대단하게 느껴지는가? '작은 거인'이니 뭐니, 남들이 치켜세워 주니 자신이 뭐라도 된 것처럼 여기는가?”
“…제가 오만하다 질책하시는 겁니까?”
원로원주가 멀어 버린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째서 본가같이 거대한 가문에 후계자 선정에 대한 명확한 규칙이 없는지 알고 있는가?”
“…그때그때 가장 현명한 방법으로 후계자를 선정하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노인 중 하나가 웃음을 터뜨리자, 다른 이들도 다 같이 침을 튀겨 가며 그를 비웃었다.
원로원주가 지팡이를 흔들자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본가는 연 씨의 것이고, 항상 직계 연씨 중에는 매 세대, 규격이 다른 진짜가 있었네. 그렇기에 지금까지 이 연씨 가문에 후계자 선정에 대한 규칙이 없는 것이지.”
장로원주는 현재 후계자들을 떠올렸다.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터무니없이 쟁쟁한 후보들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이 대단히 특별한 시대인가 봅니다.”
“아니, 지금 또한 여느 때와 다른 것이 없는 시대일세.”
장로원주가 한숨을 쉬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긴 그렇지만, 여기 계신 분들이 현역으로 계실 때와 지금의 본가는 격이 다릅니다. 훨씬 더 거대하고, 훨씬 더 강력한 가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복잡해졌지요.”
지금의 낙양검가를 오래전처럼 연씨 가문이라고 표현한 그녀를 꼬집는 발언이었다.
원로원주가 빠진 이를 흉하게 드러내며 그를 비웃었다.
“전전대(前前代)의 장로원주 놈은 자기가 비상 대책 회의의 십삼위원(十三委員) 중 하나라고 설치다가 사라졌지. 너도 그놈처럼 되겠구나.”
장로원주가 이를 악물었다.
“…도무지 무슨 말씀이신지, 이 말학이 아둔하여 가르침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조언은 여기까지일세.”
원로원주가 지팡이를 강하게 내리 쳤다.
“당장 이 마을에서 떠나게.”
* * *
장로원주는 겉으로는 정중했지만, 속으로는 화를 삭이며, 언덕을 내려갔다.
마을 회관에 있던 원로들이 혀를 찼다.
“말을 해 줘도 듣지를 못하니, 말을 해 주어 무엇 하겠나.”
“보여 줘도 보질 못하는데, 보여 봐야 소용이 없으이.”
그들은 후학을 위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권력 놀음에 심취하지 마라.
본가는 연 씨의 가문이다.
본가의 직계 중 하나는 언제나 격이 다른 진짜가 있다.
그러니 자신이 무엇이라도 된 양 여기지 마라.
끼어들지도 말고,
관여하지도 말고,
들은 척하지도 말고,
본 척하지도 말라.
현재 본가에는 후계 문제가 없다.
* * *
노인들이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한창 돼지를 굽고 있을 넓은 마당으로 향했다.
그들이 발걸음을 옮기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본가의 가장 큰 우환이었던, 후계 문제가 사라졌으니, 축하할 일이야.”
“이런 날에 돼지를 잡아야지, 언제 잡겠는가.”
“'그 녀석'이 마음을 고쳐먹어서 다행일세.”
“그나저나 이번엔 그 녀석이 최고위원을 솎아 내지 않았구먼.”
“에잉, 그 녀석이 사람 보는 눈이 까다로운 탓이지.”
“그러게 말일세.”
“이 큰 가문에서 그 녀석의 눈에 찰 멀쩡한 사람 구하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