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편 성동격서(聲東擊西)
한밤중.
낙양검가, 사공자 집무실.
“…끝났다.”
사공자가 마지막 서류에 인장을 찍은 뒤, 그대로 책상 위에 엎어졌다.
반쯤 졸면서 대기하고 있던 문사(文士) 하나가 서류를 건네받고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시녀장은 이미 구석의 의자에서 곯아떨어진 뒤였다.
그녀는 저녁에 사공자를 위해 '대공자님 칩거 해제 기념 깜짝 축하 연회'를 간단하게 열어 준 것이 마지막이었다.
애초에 내공이 없는 일반인인 그녀가 근 일주일간 이어진 격무(激務)를 버텨 낸 것이 용할 정도였다.
사공자의 책상 맞은편에 앉아 있던 중년 여인이 기지개를 켰다.
“…으아아. 처음엔 불가능해 보였는데, 이게 정말 가능한 계획이 었군요.”
사공자가 책상에 머리를 처박은 채 대답했다.
“...그러게.”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 귀여운 쌍둥이들을 출산하고, 그 당일에 비상이 터졌을 때보다 훨씬 힘들었습니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비유네.”
처녀 때의 탄탄한 몸매를 유지한 여인은, 사공자의 최측근 책사 중 일인이었다.
그녀는 잠시 벗었던 안경을 다시 쓰고, 서류들을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그 현월각주라는 정보상에게 검가동패를 수여하신 것은 훌륭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녀가 없었다면, 절대 시간에 맞출 수 없었을 거야.”
그녀의 날카로운 눈매에 장난기가 감돌았다.
“이공자 측이 언제쯤 자신들이 당했다는 것을 눈치챌까요?”
사공자가 머리를 들었다.
그의 입가에 개구쟁이 같은 미소가 걸렸다.
"...아마 지금쯤?”
* * *
이공자 진영, 최 책사 집무실.
“최 책사님! 해냈습니다!”
최 책사의 최측근이 집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음?! 또 축하할 일이 생겼는가?!”
수하들과 함께, 강남에서 공수해온 거대한 술동이를 비우며 대공자에 대한 승리를 자축하던 최 책사 였다.
“예! 대선상회로부터의 보고입니다! 사공자 즉에서 진행 중이던 사업 예정지, 호두 마을의 곳곳에 '알 박기'가 성공했다고 합니다!”
거나하게 술에 취한 수하들이 일 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맹렬한 기세로 박수를 쳤다.
“역시! 성공할 줄 알았다! 사공자가 땅 주인들에게 뭐라고 협박을 했어도, 결국 그놈들은 더 많은 돈에 이끌릴 수밖에 없지!”
이로써 사공자의 사업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들이 나중에 사업을 추진하면서 땅을 매입하다 보면, 자신들이 알 박기 한 땅들을 발견하고 절망하게 되리라.
“그러게 미리 선금(先金)을 크게 걸고 압도적인 위약금으로 묶어 두었어야지! 하긴, 자금이 부족한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었겠지만. 하하핫!”
“사공자 측의 사업은 시작부터 크게 흔들릴게 뻔합니다!”
“이걸로 그 대공자 놈의 첫 행보에도 소금을 단단히 뿌릴 수 있게 됐습니다!”
다들 만세를 불렀다.
결국 사공자가 중재를 요청하면, 낙양검가 사업 지원단(事業支援團)이 나서리라.
그렇게 되면 최종적으로는, 사공자의 요구에 따라 알 박기 한 땅들을 도로 매각해 줄 수밖에 없긴 했다.
하지만 사공자 측에게 시간적 소요와 매입 비용에 있어서 상당한 줄혈을 강요할 수 있었다.
최 책사가 바가지로 술을 퍼 올리며 물었다.
“그래! 좋았어! 그들이 얼마나 사들였다고 하던가?”
“우리 목표치의 오 할(割)이나 달성했다고 합니다!”
다시 한번 수하들이 비명에 가까운 환호를 질렀다.
하지만 최 책사는 바가지를 든 채 굳었다.
“… 얼마라고?”
“오 할입니다! 무려 전체 예정지의 일 할에 해당하는 땅입니다!”
“…그 정도의 땅을 한 번에 매입했다고? 오늘 하루 만에? 다수의 지주(地主)로부터?”
그때야 뭔가 이상함을 느낀 이들이 하나둘씩 자리에 멈췄다.
“사공자 측의 반응은?”
“...아직 특별히 보고는 없습니다만.”
최 책사의 붉은 얼굴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뭔가, 뭔가 이상하다! 당장 대선 상회에 거래를 중단하라고 전해라!”
“…그것이 불가능할 겁니다.”
“뭐야?!”
그의 최측근 책사 하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들은 이미 계약금 지불까지 마쳤을 겁니다.”
“현장 상황에 빠르고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서, 대선상회 측에 전권을 위임했지 않습니까…?”
“대선상회는 우리 지침에 따라 그들의 작전 자금을 먼저 사용하고, 후에 우리에게 비용을 청구할 텐데요?”
최 책사의 붉은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져 갔다.
그때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최 책사!”
하얗게 질린 얼굴의 한명휘였다.
“뭔가 이상하오! 현월각주 그년이 사공자의 검가동패를 가졌어! 지금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소! 당장 진행 중인 모든 작전을 멈춰야 하오!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해!”
“…늦었소.”
“뭐라고 했소?”
“이미 늦었…!”
최 책사가 그 자리에서 구토를 쏟아 냈다.
모두가 굳어 버린 집무실에서 최 책사의 토하는 소리만이 황망하게 울려 퍼졌다.
* * *
낙양검가, 사공자의 집무실.
사공자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인, 당문(唐門)의 붉은과부거미라 불리는 책사.
통칭, 홍독지주(紅毒蜘蛛)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단 일주일 만에 전면적인 사업지 변경이라니.”
사공자가 키득거렸다.
“그놈들은 아마 상상도 못 했을걸?”
“아마 제가 저쪽에 있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상상도 못 한 채로 당했을걸요?”
“완벽한 성동격서였지.”
“저들이 아무리 많은 인적자원이 있다고 해도,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 말입니다.”
홍독지주가 입술을 핥았다.
“대공자님에 대한 소문의 추적, 대공자님이 일으킨 내원에서의 사건 파악, 대공자님의 칩거에 대한 문제까지.”
“기존 삼공자에 대한 대응 인력을 뺄 수 없는 상황에서, 저들도 일주일간 지옥을 맛보았을걸?”
“게다가 우리는 얼마 전, 그들의 첩자를 내부에서 모두 제거한 상태였으니까요.”
“그놈들이 우리의 움직임을 파악할 방법이 전무했지.”
사공자가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사이에 우리는 더 크고 훌륭한 사업지로 계획을 완전히 변경하는 데 성공했지.”
“현월각주도 제 몫 이상을 해 주었습니다. 이공자 측에 노출되지 않은 그녀가 새 사업지의 계약들을 거의 전부 해결해 주었으니 말입니다.”
“검가동패와 전각 한 채 정도면 싸게 먹힌 장사였지.”
“그러고 보니 그녀 또한, 대공자님께 소개를 받은 인물이었지요?”
사공자가 크게 웃으려다가, 시녀장이 깊게 잠든 모습을 보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애초에 새 사업 부지부터가 큰형님이 나서 주시지 않았다면, 꿈도 꿀 수 없는 곳이었지.”
“…사업 계획을 발표하던 그날부터 대공자께서, 호두 마을이 아닌 그쪽 동네에 관심을 보이셨다고 하셨었지요?”
사공자가 입맛을 다셨다.
소년은 그날을 떠올렸다.
오랜만에 큰형님을 만나게 되어 들떠 있던 날.
용봉지회에 대해 설명해 드리고, 사업 부지를 직접 보여 드리기 위해서 천막을 걷었던, 바로 그때.
대공자는 분명 호두 마을이 아니라, 지금 그들의 새 사업 부지에 해당하는 지역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아, 지금 대공자님께서 보시는 쪽은 저희의 사업 예정지가 아니옵니다.”
“그쪽은 낙양에서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빈민가 중의 하나이옵니다.”
사공자가 하하 웃었다.
“저긴, 우리가 아니더라도 감히 누구도 손을 못 대고 있는 곳이에요.”
* * *
"그때는 단순히 큰형님께서 착각을 하신 줄 알았지만….”
“자애원을 운영하시는 대공자께서, 호두 마을의 위치와 낙양 최대 규모의 빈민가, 오흉(五凶) 중의 하나인 '죄악의 골짜기'를 헷갈린다고는 상상하기 힘들군요. 게다가….”
홍독지주가 책상을 뒤져 두꺼운 서류 뭉치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 사업 계획 변경서의 초안(草案)도 대공자께서 주신 물건이었죠.”
“맞아.”
그녀가 서류를 넘겨보며 한숨을 쉬었다.
“만약 이 초안이 없었다면, 계획 변경안을 구상하는 일만 해도, 한 세월이 걸렸을 겁니다.”
“아마 모두가 달려들어서 이(二) 주는 족히 걸렸겠지?”
그녀가 묵직한 서류 뭉치를 다시 책상에 올렸다.
“심지어 현월각주가, 믿을 만한 이들에게 사업 정보를 팔아, 그들이 선투자한 금액도 무시할 수 없지요.”
“그 돈으로 죄악 계곡에 위치한 큰어머니의 사당에, 자애원의 신(新)지부를 설립할 수 있었지.”
“애초에 자애원과 선녀 신앙이 아니었다면, 죄악의 골짜기로의 사업 계획 전환은 불가능했죠.”
“그렇지.”
“그리고 대공자님의 지인(知人)이라고 하시며 선뜻 거금(巨金)의 투자를 약속한 낙양 내외의 유명 인사들도 벌써 수십 명이 넘고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늘어나지 않을까? 큰형님의 인맥(人脈)은 장난 아니니까. 그들이 큰형님이 칩거를 끝냈다는 소식을 들으면….”
사공자가 혀를 내둘렀다.
“지금 이미 투자를 약속받은 금액만 해도, 이전 기획에서의 최종 목표 액수를 넘었습니다.”
“사업 규모가 그만큼 커지기도 했지.”
홍독지주가 사납게 머리를 긁었다.
“대공자께 처음 이 계획을 설명해 드린 것이 이제 일주일쯤 되었던가요?”
사공자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아마 이제 팔 일 차가 아닐까.”
그녀가 기어코 폭발하고야 말았다.
“그게 말이 됩니까?!”
시녀장이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어머나! 제가 깜빡 잠이 들었나 보네요.”
사공자가 비척거리며 일어나는 그녀를 서둘러 부축했다.
“그래, 그래. 이제 오늘 일 다 끝났으니까, 시녀장도 들어가서 쉬어.”
“아니에요. 주인님이 주무실 때 까지는 제가….”
“아니야, 아니야. 다른 아이에게 부탁하면 되니까, 어서 들어가.”
시녀장은 단호하게 밀어내는 사공자의 명에 못 이겨 자리를 떴다.
하지만 그녀 성격상, 자신의 빈자리를 대신할 시녀들을 꼼꼼하게 점검하고서야 잠자리에 들리라.
“아! 진짜 왜 갑자기 소리를 치고 그래?!”
사공자가 벌컥 화를 내는 것을 무시하고, 홍독지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말도 안 되지 않습니까?! 단 일주일이라고요! 하지만 실제로 저희가 이 초안을 받았을 때는, 주군께서 대공자님께 사업을 설명해 드린지, 겨우 삼 일 만이었습니다!”
그녀가 책상을 마구 내리쳤다.
“그러고는 내원으로 들어가셨지요! 그러더니 검가 전체를 마구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혼자서요! 그렇게 이공자 측의 끝이 없을 것 같던 정보망을 한계까지 밀어붙였단 말입니다!”
“지, 진정해…!"
그녀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제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대공자님은 동시에 자신의 운명이 걸린 칩거까지도 해결하면서, 뒤에서 동시에 몇 가지 일을 처리하신 겁니까?!”
사공자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러게 내가 옛날부터 말했잖아. 우리 같은 이들은 대붕(大鵬)을 이해하지 못한다니까.”
그런 그의 반응에 홍독지주는 온 몸을 부들거리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때는 그저 과장된 비유인 줄 알았지요!”
사공자가 혀를 찼다.
“그만 성질부리고, 이제 들어가서 눈이라도 좀 붙여.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죄악의 골짜기 청소를 시작해야 하니까.”
그랬다.
아직은 계획의 시작 부분에 불과 할 뿐이었으니.
앞으로 넘어야 할 산들을 떠올린 홍독지주도 조금은 진정한 기색을 보였다.
“…그렇죠. 죄악의 골짜기에 똬리를 틀고 있는 암흑가의 조직들을 색적하고 정리하는 것만 해도, 몇달은 걸릴 만한 일이니까요.”
“그래. 아무리 자애원의 도움을 받더라도, 빈민과 암흑가의 인원을 구별하는 일은….”
홍독지주가 한숨을 쉬었다.
“이미 물에 섞인 먹을 분리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지요.”
“그렇지. 그러니….”
그때 였다.
“사공자님! 급보입니다!”
허락을 받은 전령이 거의 굴러 들어오듯, 집무실 내로 들어왔다.
“척후대로부터의 급보입니다! 죄악의 골짜기에 위치한 암흑가의 조직들이…! 조직들이…!"
호흡이 거칠어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헐떡이는 전령을 홍독지주가 다그쳤다.
“암흑가의 조직들이 뭐가 어쨌다는 것이냐!”
호흡이 부족하여 얼굴에 파란 기운을 띤 전령의 혼란스러운 시선이 그들을 향했다.
“그, 그것이, 죄악의 골짜기에 위치하던 암흑가의 조직들이 전부 사라졌답니다…!”
듣는 이의 귀를 의심케 하는 소식이었다.
“뭐라고…?”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자세히 고하거라!”
“그, 그것이 아직 자세한 사항은 척후대에서 조사 중인 것으로….”
“그래도 뭐라도 있을 것이 아니더냐?!”
홍독지주가 사납게 다그치자, 전령이 다급하게 외쳤다.
“암천존자(暗天尊者)!”
전령이 급히 말을 이었다.
“정확한 정보는 아니오나, 유독 현장에서 암천존자라는 별호가 자주 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