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편 축배(祝杯)
낙양검가, 삼공자 진영(陣營).
다섯 층짜리 거대한 전각(殿閣)의 최상층에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진홍빛 비단옷을 입은 노인은 선풍도골(仙風道骨)의 소유자였는데, 깊은 두 눈에는 현기(玄機)가 가득했다.
맞은편에 앉은 중년인은 백색 비단옷을 입었는데, 중후한 미남이었으며, 두 눈에는 직관(直觀)이 번뜩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뒤로는 각각 진홍빛 옷을 입은 문사(文士)들과 백색 옷을 입을 문사들이 엎드려 있었다.
열린 창을 통해 매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삼공자의 전서응(傳書鷹)이었다.
진홍빛 옷의 문사가 전서응을 달래고, 백색 옷의 문사가 서신(書信)을 확보해 두 대군사(大軍師) 사이에 정중히 펼쳤다.
서신을 들여다보던 백색 옷의 중년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마(司馬) 선생. 최고 운영 회의가 약속을 지켰습니다.”
사마 선생이라 불린, 진홍빛 옷의 노인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제갈(諸葛) 형제의 예측대로, 그들은 대공자의 칩거를 해금하는 대신, 가주직인을 거두었소.”
제갈 형제라 불린, 백색 옷의 중년인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번엔 본 군사의 운이 좋았습니다.”
사마 선생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 형제는 앞으로 대공자에 대해, 우리가 직접 대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오?”
제갈 형제라 불린 중년인이 차를 한 모금 머금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기록들을 확인하였을 때, 대공자는 분명 위협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대공자는 당시 가주를 등에 업은 상태였습니다. 지금으로서 그는 소수에 불과하고, 제대로된 세력조차 없습니다.”
“동의하오. 당분간 그가 벌일 수 있는 일이란 이번 내원 사건처럼 개인의 지략을 동원하는 일 정도가 전부겠지.”
“그리고 개인의 머릿속을 들여다 보지 않는 이상, 그가 무슨 일을 벌일지 예측하기도 무척 난해합니다.”
뒤에 엎드려 있던 이들은 일제히 그들의 대화를 기록해 나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분간은 후(後) 대응을 원칙으로 삼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주직인이 없는 이상, 그는 더 이상 결정적인 위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대의 말이 옳소. 그에게서 가주직인을 빼앗음으로써 가장 큰문제는 끝난 것과 마찬가지요. 당장에 그자는 사공자보다도 못한 존재지.”
“그렇다면 이 이상, 여기에 대해 논의를 이어 가는 것은 시간의 낭비가 되겠습니다.”
“잠시 쉬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지.”
두 대군사의 의견이 합일(合一)하였다.
진홍빛 옷을 입은 문사들과 백색 옷을 입은 문사들이 그들이 받은 지침을 전하려 일제히 계단으로 내려 갔다.
그들은 다섯 층짜리 전각에 가득한 군사들에게 대군사의 지침을 전달하리라.
차를 마시던 사마 선생이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제갈 형제. 무엇이 마음에 걸리나 보오?”
“아닙니다, 그저….”
사마 선생은 차를 마시며, 중년인의 말이 이어지길 차분하게 기다렸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 흘러갔기에, 조금 실망한 것뿐입니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 침울한 기색이 감돌았다.
“이 검가에서 그렇게 많은 이들이 두려워하던 대공자가, 고작 이정도일까요?”
사마 선생이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하지 마시오, 제갈 형제. 대공자는 이제 칩거에서 풀려난 몸이 아니오? 앞으로 그대의 기대를 채워 줄 기회가, 그에게 충분히 있을 것이오.”
“그러길 바랄 뿐입니다.”
문사들이 돌아와 그들에게 새 안건을 올렸다.
사마 선생이 두루마리를 펼쳐 보며, 그에게 말했다.
“지금은 가장 큰 위협인 이공자에게 집중해야겠소.”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위협이지요.”
밖으로부터 석양이 드리우고 있었다.
* * *
이공자 진영,
책사 한명휘의 집무실.
달리 아무도 없는 집무실 안을 초조한 기색으로 서성거리던 한명휘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소리쳤다.
“들어와!”
“실례하겠네.”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손(孫) 장로였다.
“장로님! 제가 감히 무례를…!”
손 장로가 손을 내저었다.
“괜찮네. 아무런 연락도 없이 찾아온 내 잘못이지. 신경 쓰지 말게.”
그러고는 손 장로가 쪽지 하나를 한명휘에게 건넸다.
“자네는 책사들이 접할 수 있는 정보가 제한되는 것이 문제라고 했었지?”
한명휘가 얼떨떨한 기색으로 쪽지를 받아 들었다.
“이것은…?"
손 장로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한 책사. 자네를 위한 승전보라네.”
그의 말에 한명휘가 급히 쪽지를 펼쳐 읽었다.
“…대공자 칩거 해제. 가주직인 봉인. 축하하네, 한 책사. 이공자, 연자청(淵紫鵲)."
짜릿했다.
한명휘는 순간 소리 없는 외침을 내질렀다.
그 모습을 보며 껄껄하고 웃은 손 장로가 품에서 작은 술 도자기 항아리 하나를 꺼내 들어 보여 주었다.
“주군께서 승리주로 직접 하사하신 선하대곡(禪河大曲)일세. 대단히 진귀한 술이지. 잔이 있는가?”
한명휘는 급히 서랍을 뒤져, 잔 두 개를 꺼내었다.
손 장로는 그가 든 잔에 직접 술을 부어 주었다.
청량하면서도 톡 하고 쏘는 독한향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두 사람은 즉시 술잔을 부딪쳐 축하하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손 장로가 편한 자세로 책상에 기대섰다.
“주군께서는 자네의 이번 공적에 대단히 만족하셨네. 그래서 앞으로 자네를 대공자 담당으로 임명하기로 결정하셨지.”
승리의 미주(美酒)는 달콤했다.
그러나 포상(褒賞)은 더더욱 달콤했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저 이번처럼만 하면 되네.”
손 장로가 그의 빈 잔에 술을 한 차례 더 따라 주며, 말을 이었다.
“대공자의 첫 번째 행보로서 다들 사공자와의 빈민가 개발 사업을 꼽더군. 자네도 마찬가지 예측인가?”
“그렇습니다.”
손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번 일에는 사공자 담당인 최 책사의 사단(私團)과 잘 협력해서 일을 풀어 나가 보도록 하게.”
“안 그래도 최 책사와 지금도 한가지 일을 함께 진행하던 중이었습니다.”
한명휘가 미소를 지었다.
“오오, 그래? 무엇인가?”
한명휘가 잔을 든 채로, 책상에 가득 쌓인 서류 중 하나를 찾아 펼쳤다.
“최근엔 대공자 때문에 일에 지체가 있었습니다만, 저는 잃어버린 검가동패(劍家銅牌)를 찾던 중이었습니다.”
“그렇지.”
“또한, 대공자의 소문에 대한 외부 근원지도 추적하고 있었지요.”
한명휘가 서류의 한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최 책사는 내부에서 잃어버린 '귀'들을 대신해서, 외부에서 사공자의 사업 계획을 추적 중이었습니다.”
한명휘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그와 저는 동시에 일치하는 이름 하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손 장로가 그가 가리키는 지점을 읽었다.
“…현월각주(弓玄月閣主)?”
손 장로가 기억을 되짚으려 하자, 한명휘가 손을 저었다.
“손 장로님께서 기억하실 만한 대단한 인물은 아닙니다. 낙양 저잣거리에서 조금 이름이 알려졌을뿐인 정보상에 불과하니까요.”
“그런데 고작 그런 자가 그 모든 일과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자세한 것은 본인에게 직접 들어 보아야겠지요.”
“즉시 추진하게.”
한명휘가 손 장로의 뒤를 가리켰다.
“이미 진행 중입니다.”
그의 말에 손 장로가 텅빈 그의 집무실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집무실이 비어 있던 것이었군!”
한명휘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지금쯤이면, 이미 수하들이 현월각을 포위 중일 겁니다.”
* * *
날이 어두워진 시각.
낙양, 현월각 근처.
“포위를 마쳤습니다. 이제 쥐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할 겁니다.”
한명휘의 최측근 책사에게, 낙양 검가의 무사 하나가 보고를 올렸다.
“좋네.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포위를 계속하도록.”
포위는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어째서인지 최즉근 책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현월각이 위치한 전각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한낱 정보상의 전각이라고?”
그의 가까이에 있던 대선상회(大仙商會) 소속의 정보 담당 책사들이 보고했다.
“원래 중심가의 전각 두 개 층을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지금 보시는 전각 하나를 통째로 매입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대공자에 관련된 정보와 사공자의 사업에 관련된 정보를 최근 불티나게 팔아 치웠다지만, 계산이 맞질 않습니다.”
“따로 자금 출처를 조사해 보도록 할까요?”
최측근 책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본인에게 직접 확인하면 될 뿐이지. 길을 열라 지시하게.”
무사들이 먼저 들이닥쳤고, 허무할 정도로 저항은 없었다.
이 낙양 땅에서 낙양검가의 표식을 보고도 저항을 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마교도(魔敎徒)이거나 반란군, 혹은 자살 희망자밖에 없었으니.
신분을 감춘 채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대선상회의 인원들을 남겨둔 채, 한명휘의 최측근들이 전각의 안으로 들어섰다.
“현월각주는 집무실에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집무실로 직행했다.
무사들에 의해 문이 벌컥 열어젖혀 졌다.
정갈하게 꾸며진 집무실 안을 비추는 것은 책상 위의 등불 하나뿐이었다.
한명휘의 책사가 집무실 책상에 앉은 이에게 물었다.
그녀는 가인(佳人)이라 불리기엔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기가 너무나 드세 보이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랄까.
“네년이 현월각주라는 계집이더냐?”
그의 모욕적인 언사에 현월각주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호위가 움찔거렸지만, 현월각주가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다.
“그래. 내가 현월각주다.”
나른한 표정으로 편히 의자에 몸을 묻고 있던 그녀의 하나뿐인 눈이 그들을 향했다.
“…그대들이 그 유명한 이공자의 강남사단(江南私團)인가?”
이공자를 함부로 부르는 그녀의 발언에, 이번에는 낙양검가의 무사들이 검에 손을 올렸다.
“계집이 그래도 정보상이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는 되는군.”
현월각주, 세아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손에 든 긴 담뱃대를 물었다.
“그럼. 이 몸은 잘나가는 정보상이거든. 그대들이 '한 책사'라 불리는 이의 사단에 속한 것도 알고 있지.”
“…한낱 정보상 계집이 몰라도 되는 것을 너무 많이 알고 있군.”
한명휘의 측근들이 전부 책사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원래 이곳에서 간단히 심문할 계획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검가로 압송하도록 하지.”
그들 중 하나가 왜도(倭刀)를 쥐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의 기세가 집무실에 고요하게 몰아쳤지만, 그녀는 여유로운 기색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그 왜도를 쥐는 꼴을 보아하니, 그대가 납인렵구(糸內刃獵狗). 복주(福州)의 살인 사냥개로군.”
그녀가 납인렵구라 불린 사내에게 이죽거렸다.
“그대는 지금도 복건성(福建省)에서 수배 중인 몸이 아니던가? 신고하면 용돈 좀 만지겠는데?”
납인렵구의 살기가 폭발했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 빠르게 그의 왜도가 발사되듯 발도(拔刀)되었다.
"...!"
단숨에 현월각주의 콧등을 베어 버리려던 그의 왜도가 전부 뽑히지도 못한 채 막혔다.
현월각주 뒤에서 그림자처럼 서 있던 무표정한 여인의 솜씨였다.
그녀는 왜도의 칼막이를 때려 발도를 막은 뒤, 납인렵구의 목젖에 칼날을 들이밀고 있었다.
이검(二劍), 격류(激流).
상대 공격의 맥(脈)을 끊어 제압하여, 그 여력으로 반격을 가하는, 공방일체(攻防一體)의 기예(扌支藝)가 펼쳐진 순간이었다.
낙양검가의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두 여인을 겨누었다.
한명휘의 책사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현월각주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뭘 믿고 낙양검가의 인사에게 덤벼드는 거지?”
“뭘 믿냐고?”
그녀가 싱글거리며 미소 지었다.
“바로 이거.”
그녀는 책상에 놓여 있던 물건을 집어 들어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거, 검가동패?!”
현월각주가 검가동패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고로 이거, 일련번호를 보면 알겠지만, 금주년이 가지고 있던 그 검가동패가 아니란다.”
“그, 그럼…?!”
그녀의 입가에 어렸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한밤중에 쳐들어온 도적들에게 말해 줄 의리 따위는 없지.”
그녀가 검가동패를 든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낙양검가에 정식으로 항의하기 전에 전부 꺼지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