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87화 (87/350)

제12편 조종자(Manipulator)

연소현은 창밖으로 팔을 걸치고, 차가운 바람을 즐겼다.

그 모습에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지휘관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 냈다.

“대공자님, 밖으로 얼굴을 노출하는 것은 기관의 지침상….”

“시 끄럽 다.”

"...."

그에게 인수인계했던, 고참 지휘관, 청수의 경고를 기억한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대공자께 잘못 찍히면, 검가 생활 정말 피곤해진다.’

그는 어째서 대공자에게 찍히는것이, 검가 생활이 꼬이는 것과 관계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빠르게 승진한 막내 지휘무사인 그는 무사로서의 경험은 풍부했지만, 최상위층의 사회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것이 더 많았다.

그렇기에 선배의 중고는 언제나 천금(千金)과도 같은 것.

지금까지 그의 경험상, 선배의 중고가 천금을 벌게 해 주지는 못 해도, 적어도 천금을 잃는 것을 막아 주지는 않던가.

"...."

가만히 구석에서 쪼그려 앉아 있는, 지휘무사의 모습에서 연소현은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언제나 아버지와 한 몸처럼 움직이던 기관의 무사들은, 어린 시절 연소현에게 가장 재미있는 '놀이 상대'였다.

빙벽(氷壁)처럼 냉철하게 보이는 이들을 무너뜨릴 때마다, 얼마나 즐거웠던지.

그 때문인지, 지금도 기관의 무사들만 보면, 놀려 주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샘솟았다.

“야."

“...예?”

눈구멍을 통해서 보이는 그의 눈은, 놀란 토끼 눈을 연상케 했다.

“아까 나를 석굴까지 끌고 갔던, 지휘무사한테 말 좀 전해라.”

그가 머리를 조아렸다.

“그게, 지침상 개인적인 심부름을 할 수는...."

“시끄럽고, 너 지휘관 중에 막내지? 아니면 밑에서 두 번째거나.”

“저, 대공자께서는 기관에 소속된 인원의 정보를 취급할 권한이….”

“권한 같은 거 없어도, 너 하는거 보면 딱 알겠다.”

"...."

“그놈 성격이 꽤 있던데, 너도 많이 갈굼 먹잖아. 그렇지? 항상 갈구지? 그것도 사람 빡치게 갈구지?”

일부러 '무사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연소현의 말은 어째서인지 설득력이 넘쳤다.

"...."

“그러니까 나한테 협조하라고. 네가 이 말만 전하면, 장담하건대 그놈이 앞으로 계속 전전긍긍하는 꼴을 볼 수 있을 거다.”

그것은 마귀의 혓바닥이었다.

"...."

대답이 없는 긍정을 이해한 연소현이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내가 그때 석굴 앞까지 거의 끌려갔단 말이지. 그래서 지금도 어깻죽지랑 양팔이 땅기거든?”

연소현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이 연소현이 친히 언제까지고 그 원한을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서신으로 전해. 암호문으로. 누가 썼는지 모르게.”

"...."

좌우를 살핀 그가 누가 볼세라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연소현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과거의 자신과는 다르게, 지금의 자신은 이런 작은 원한들을 청산하는 것이 너무도 즐거웠다.

그가 천장을 두들겼다.

“얘들아! 속력 좀 더 내 봐라! 해 떨어지겠다!”

연소현이 외치자, 지휘관이 즉각 전음으로 지시했다.

쏜살같이 텅 빈 거리를 내달리는 사인교 안에서, 연소현은 즐겁게 웃음을 터트렸다.

낙양검가의 모든 이들이 껄끄러 워하는 기관.

이제는 그 기관에 자신을 기억하는 이들도 거의 남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의 오래된 지인의 동생을 만나 소중한 인연을 이음과 동시에 기관의 문제에 개입할 중요한 인맥을 얻었고,

회의장을 지키던 무사들에게 최고위원들과 맞서고도 아무 문제 없이 넘어간 모습을 각인시켰고,

은퇴를 생각하던, 과거 명성이 자자하던 지휘무사에게 원각정의 이름을 심어 주었고,

자신을 직간접적으로 기억하면서도 무검자라 조롱했던 괘씸하기 짝이 없는 지휘무사에게 공포를 심어 줄 것이며,

자신을 처음 만나는 막내 지휘무사가 그의 의도에 따라 심부름을 하고, 그의 의도에 따라 수하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한번 연소현과 손잡는 것에 맛을 들린 이 젊은 지휘무사는, 앞으로도 그 맛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들을 조우한 지 채 한나절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 * *

제암진천경, 내부(內部).

“아주 즐거웠네! 아주 재미가 있었어!”

영락(零落) 신선이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내가 이곳에 갇힌 이후, 이렇게 즐거운 구경거리는 또 오랜만이었네.”

“즐거우셨다니, 다행입니다. 어르신.”

“게다가 그 제암진천경을 억누르고 성공적으로 활동하다니!”

석관(石棺)에 걸터앉은 연소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영락 신선이 그런 연소현을 향해 눈을 번쩍이며 물었다.

“그렇다면, 과거부터 최고위원들의 정체를 밝혀 버림으로써 그들을 교체해 왔던 것은 연자(緣者)가 되기 전의 자네가 한 일이 아닌가?”

“예, 그렇습니다. 혈사(血史)때 금이 간, 어머니의 봉인을 지키면서 아버지의 가문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활동이었지요.”

“대단하군!”

“…그때 저는 그 정도밖에 할 수 없었지요.”

“지금과는 다르게 말이지.”

연소현은 음흉한 미소를 지은 영락 신선과 함께 웃었다.

석관 안의 시신들이 함께 울부짖었다.

“그러면, 그러면 말일세.”

"예."

영락 신선이 신이 나서 물었다.

“애초에 자네가 소문을 퍼뜨리던 시점에서부터 궁극적인 목표는 단 하나. 칩거 명령이 공식적으로 거두어지게 만드는 것이었군!”

“그렇지요.”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보중해서 설명했다.

“애초에 저는 칩거 중인 몸이라, 제가 직접 최고 운영 회의에 접촉을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최고 운영 회의는 그가 만나고 싶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만날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자네는 그걸 위해서 내원을 건드린 것이야. 다른 이들이 자네의 행동에 경각심을 느끼게 했지!”

“더해서 사사건건 귀찮게 굴던, 집사들도 처리하고, 제 몫의 받지 못했던 예산을 되찾을 방법도 만들었습니다.”

“맞아! 나도 보았네!”

* * *

“감히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은 알고 있지만….”

의견을 종합한 의장이 연소현에게 말했다.

“본 최고 운영 회의는 원각정이 최대한 빠르게 제 기능을 되찾을수 있도록, 모든 행정 절차를 간소화하여, 지원에 노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연소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특히 내원총관에게 말 좀 잘해 주시오. 이때까지 내원에서 내 몫의 예산을 떼어먹은 것을 받아야 하거든.”

잠시 뒤, 한 최고위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금이 좋으십니까? 전표가 좋으십니까?”

“반반으로 부탁하네. 전표 보증인은 최고 운영 회의 이름으로.”

“즉시 처리하겠습니다.”

“고맙군.”

“별것 아닙니다.”

연소현은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경비단주(警備團主)에게도 전해 주시오. 한 번만 더 원각정에 출입하는 서적상인을 이유 없이 붙잡아 두고 지체시킨다면, 내 직접 경비단을 방문할 것이라고.”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연소현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부러 새벽마다 원각정 담벼락을 따라 본가의 병력(兵力)들과 함께 구보를 하면서 군가(軍歌)를 부르게 시키는 무사장(武士長)들은….”

“그것도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있소.”

"...."

* * *

“그, 그것도 너무 재미있었지.”

영락 신선이 아예 자지러졌다.

뒤로 쓰러진 그가 석관 안의 시신을 깔아뭉갰다.

연소현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옛날의 저였다면, 그냥 넘어갔을 문제들이었죠.”

“무엇보다도….”

영락 신선이 눈물 대신 튀어나온 진물을 닦았다.

“나는 자네가 이번에 궁극적으로 목표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 딱히 '한 것이 없다'는 점이 가장 놀라웠네!”

그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자네가 칩거를 해금하기 위해서 했던 행동이라고는 사실상 그 감찰 조사원을 소환한 것이 다였어!”

“강호 말입니까?”

“그래! 자네는 그저 감찰조사원 하나를 불렀을 뿐인데, 어느새 장로 회의가 열렸지!”

그리고 장로 회의는 연소현의 문제를 심각하게 여긴 장로들에 의해서, 연소현이 최고 운영 회의에 소환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최고 운영 회의는 그들의 원죄로 인해서, 자네에게 걸린 칩거 명령을 해금(解禁)할 수밖에 없었지!”

“과거의 제가 문제가 될 최고위원들을 전부 교체해 두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확신할 수 있었지요.”

사실 자신의 칩거를 푸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는 불가능했다.

가능하다고 해도,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귀찮아질 요인이 너무 많았다.

애초에 지금의 그가 최고 운영 회의까지 가는 것부터가 거대한 난관이었었다.

하지만 그는 가문 내 최상위층의 위기감을 건든 것만으로, 모든 절차를 속전속결로 끝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영락 신선이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말일세. 그 가주직인 말일세. 아깝지 않던가? 나중에라도 써먹을 곳이 있지 않겠는가?”

연소현이 껄껄 웃었다.

“지금으로서는 아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제가 가주직인을 가지고 칩거를 푸는 것을 허용하려 하지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게다가?”

연소현이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를 지었다.

“가주직인을 들고 있는 것은 추후에 대단히 골치 아픈 문제를 겪게 했을 겁니다.”

“…그렇군! 자네는 가주직인 때문에 생길 일을 이미 알고 있었었군!”

그는 아주 만족하며, 고개를 거듭해서 끄덕였다.

“즐거웠어. 아주 즐거웠네. 지금까지 연자 중에 자네만큼 본신(本 身)의 능력을 발휘했던 이가 몇이나 되었는지 모르겠군.”

연소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벌써 만족하셨습니까?”

영락 신선이 펄쩍 뛰었다.

“아니! 아직도 뭐가 남았단 말인가?!”

연소현이 미소 지었다.

“아쉽게도 시간이 다 되었군요. 남은 것들은 앞으로 지켜보시면 전부 알게 되실 겁니다.”

영락 신선이 아쉬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나만 말해 주게! 하나만! 그 남은 것이라는 것이, 자네가 틈틈이 '가문 밖에서 했던 일 때문이겠지…?!”

영락 신선의 말이 멀어졌다.

* * *

내부에서 현실로 돌아온 연소현은 차가운 바람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새로 들어온 두 최고위원은…. 아직은 좀 더 지켜보기로 하지.’

그는 이미 그들이 누군지 파악했다.

아무리 목소리를 변조해도, 그림자를 대역으로 사용해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절대 하지 않아도, 소용없었다.

그들이 신원을 감추기 위해서, 따르는 비밀 지침이 있었다.

그런데 그 지침이 과거 아버지의 업무를 돕던, 어린 연소현의 손에 작성되었다는 것을.

과연 그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거기에 은연중에 나오는 말버릇, 도발당했을 때의 반응, 과거 이야기를 꺼냈을 때의 반응, 주로 사용하거나 인용하는 문구들의 출처,

그저 한두 번만 제대로 대화를 나눌 기회만 있으면 충분하다.

게다가 지금의 그는 제암진천경의 연자였다.

그들에게 원한을 토하는 원령들의 기억만 몇 가지 엿보면, 그들의 정체뿐만 아니라 감추고 싶었던 비밀까지도 전부 알 수 있었다.

낙양검가에서 가장 큰 기밀에 속하는 최고 운영 회의의 구성원 명단은 이미 모두 그의 머릿속에 있었다.

“이얏호! 달려라, 달려!”

“대, 대공자님 위험합니다!”

그는 신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 그에게는 어떤 제약(制約)도, 한계(限界)도 없었다.

과거의 연소현이 선의(善意)에서 해 두었던 일들이, 지금의 연소현이 악의(惡意)에서 하는 일들과 만나 결실을 거두어 가고 있었다.

저 멀리서부터, 남동풍(南東風)이 불어오고 있었다.

* * *

모든 조각은 그의 의도대로 쌓여가고 있었다.

그 조각들이 모두 쌓여 가기 전까지, 누구도 전체 모습을 알지 못 하리라.

연소현, 본인을 제외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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