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86화 (86/350)

제11편 균형자(Balancer)

회동은 끝났다.

연소현이 석굴에서 벗어나자, 기관의 무사들이 보였다.

“대공자님, 비동(秘洞)의 입구까지 모시겠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여성 지휘무사가 정중히 인사를 올린 후, 눈가리개를 가지고 다가왔다.

“그거 치워라.”

연소현이 이를 드러냈다.

“하지만 이것은 기관의 지침….”

“지침이고 뭐고 상관없다.”

연소현이 뒤를 가리켰다.

“여기는 내 아버지의 개인 연무장이었다. 알겠어? 내가 어릴 적에 수십 번은 왔던 곳이란 말이다."

그가 앞장서서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자, 기관의 무사들이 급히 따라붙었다.

“하지만…!”

“참고로 나는 여기서 원각정까지 눈 감고, 굴러서라도 갈 수 있다. 쓸데없이 헛짓거리하지 마라.”

매끈한 가면을 쓴 여성 지휘관이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이내 품에 눈가리개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수하들에게 신호를 보내자, 무사들이 재빠르게 움직여, 사인교와 함께 대기 중이던 조(組)를 불러왔다.

그녀는 재빨리 사인교를 담당하는 지휘무사에게 연소현을 인수인계했다.

이야기를 마친 그녀가 연소현에게 다가와 포권했다.

“제가 이야기를 해 두었으니, 편하게 원각정까지 모실 겁니다.”

연소현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너, 일 잘하는구나. 요령이 있어.”

“…과찬이십니다.”

사인교에 올라탄 연소현은 문을 붙잡고, 그녀에게 말했다.

“기관 같은 꽉 막힌 곳에서 오랫 동안 일하느라 매우 답답했겠어.”

“그건….”

연소현이 문을 닫고 작은 창을 통해 말했다.

“혹시 기관을 그만두면, 원각정으로 와라. 앞으로 실력 있는 사람이 많이 필요하니까.”

그 말에 주변에서 무사들이 실소를 흘렸다.

헛기침하는 자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낙양검가의 요직(要職)을 그만두고, 무검자(無劍者)로 악명 높은 대공자에게 가겠는가?

그런데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어…, 제 이름은 청수(靑水)입니다. 만약 그때가 오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연소현은 웃음을 터트리며, 사인교의 천장을 두드렸다.

“얘들아, 이제 집에 가자.”

사인교가 바람처럼 달려 모습을 감추자, 주변의 무사들이 어처구니 없다는 시선으로 자신들의 지휘무사를 바라봤다.

지휘무사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뭘 그렇게 보나? 사회생활에서 끈을 잘 잡는게 얼마나 중요한데.”

무사들이 한숨을 쉬었다.

“…지휘무사님이 방금 잡은 끈은 썩은 동아줄인 것 같습니다.”

누군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 보았다.

“푸하하하하하!”

시원한 웃음소리였다.

수하들의 어안이 벙벙한 시선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을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잠시 뒤 그녀는 겨우 진정했다.

“아. 너무 웃었더니 배 땅긴다.”

그녀가 손짓하자, 다들 어깨를 으쓱이며 철수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뒤에서 가면을 들고, 너무 웃어서 흘러나온 눈물을 훔쳤다.

“…썩은 동아줄이라고? 그 대공자 연소현이?”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나도 이젠 늙긴 늙었나 보다.”

그녀는 앞서가는 무사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옛날 일을 기억할 정도로 오래된 이들은, 가주께서 쓰러지신 이후 대부분 교체되었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설립되었던 조직이, 그 목적에 실패했었다.

그날 이후, 현장에 그녀와 함께하던 수많은 이들이 스스로 그만두거나, 교체되었었다.

'나도 이제 슬슬 기관을 떠날 때가 되었나….'

안 그래도 최근 들어 부쩍이나 기관의 상층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그녀였다.

* * *

연소현이 떠난 석굴.

신입 여성 최고위원이 입을 열었다.

“…대공자의 칩거를 풀기로 한 결정. 옳은 결정이었겠지요?”

신입 남성 최고위원이 대답했다.

“우리에게 다른 선택 사항이 있었소?”

“없었습니다만….”

최고위원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대공자는 언제라도 그날의 진실을 폭로할 수 있네. 그러면….”

다른 최고위원이 말을 받았다.

“지금도 가주님께 일편단심으로 충성을 하는 이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검을 뽑을 거요.”

“당시에 최상층부에 있었던 이들은 여전히 그때의 일에 조금씩 의문을 품고 있는 이들이 많소.”

“대혼란이 오겠지….”

총무위원이 나섰다.

“본 회의는 본가의 가법보다 위에 있지만, 본 회의를 마땅히 견제할 수단이 많지 않았습니다.”

모두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회의는 지속적으로 내규를 강화해 왔고, 어떤 일이든 공정하게 처리하기 위해 고심해 왔으며, 존경을 잃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습니다.”

다른 최고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자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었지.”

“그것은 틀림없소. 언제라도 모든 것을 폭로할 수 있는 그가 있었기에, 본 회의가 지금의 취지를 지켜 올 수 있었던 것이오.”

침묵하던 남성 신입 최고위원이 힘겨운 어조로 물었다.

“…그를 제거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습니까?”

한 최고위원이 껄껄 웃었다.

“초기엔 그런 계획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생각해 보시오. 그가 자신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대비 하지 않았을 것 같소?”

“그와 지금도 친분을 유지하는 본가의 최고위층이 얼마나 있는지도 전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거기다가 낙양 내외(內外)의 명망 높은 인사들까지도 합치면….”

다들 혀를 내둘렀다.

“그는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저 원각정에 칩거할 뿐이었던 것처럼 보였지만, 글쎄요….”

“그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지금 본가가 어떤 모습일지, 나로서는 짐작하기가 힘들군.”

모두가 두런두런 연소현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 때, 한 최고위원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 회의실은 꽤 마음에 드는 곳이었는데, 이제 못 쓰게 되었군요.”

“그건 어쩔 수 없지 않소?”

그들은 연소현이 서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천장에 뚫린 구멍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이 바닥에 놓인 검가금인을 비추고 있었다.

연소현이 가주직인을 그 자리에 두고 떠났던 것이었다.

“…누구도 감히 손을 댈 수도 없으니.”

“시간이 흘러 새 가주가 탄생하거나, 태상가주께서 기적적으로 일어나셔서 가주로 돌아오시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이 회의실 전체를 봉인(封印)하는 수밖에.”

잠자코 있던 의장이 입을 열었다.

“다들 기억하게.”

모두가 의장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우리는 이제까지 대공자님께 지키지 못할 약속만 남발해 왔지만, 대공자님은 이번에도 우리에게 약속을 지켰네.”

모두가 대번에 숙연해졌다.

'내가 소유한 가주직인이 본가의 후계자 경쟁에 영향을 끼치지 않게 할 테니, 그대들은 걱정하지 마시오.’

가주직인이 연소현의 손에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된 과거의 최고 운영 회의는 대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때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던 것인지, 회의에 모습을 드러낸 어린 연소현이 그들에게 했던 말이었다.

“아직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남아 있는 약속이 있다면….”

종무위원이 답했다.

“그것은 후계자 경쟁이 대규모 분쟁으로 격화되는 것을 최선을 다해 막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모든 권한을 가진 우리, 최고 운영 회의밖에 없으니.”

잠시 침묵으로써 새삼스레 그들의 역할을 되새기던 중, 최고위원 하나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 대공자까지 이제 후계자로서 공식적으로 뛰어들게 되었으니, 앞으로 더욱 골치가 아프게 생겼습니다.”

“이제 편히 숙면을 취하기는 틀렸군.”

“그럼 이때까지는 숙면을 취하실 여유가 있으셨단 말이오?”

그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을 때, 신입 여성 최고위원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우리가 지금보다 더 힘들어 질까요?”

석굴 안에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 쳤다.

“대공자는 본가를 위해서 지금까지도 그 모든 오명을 견뎌 내며 침묵을 지켜 왔습니다.”

무검자라고 불리는 것도, 비겁자나 겁쟁이란 말도, 그는 묵묵히 참아 왔다.

“그런 대공자라면, 아마도 그 스스로가 가장 앞서서 그 대규모 분쟁을 막아 내지 않을까요?”

최고위원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생각이군.”

“아마도 그라면 그렇게 행동할지도 모르겠소.”

그때 의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다들 잊지 말게. 만약 대공자께서 우리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느끼시면….”

모두가 그의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공포의 기색을 느낄 수 있었다.

“대공자님은 언제든지, 즉시 모든 규칙을 무시하고, 그 혈사를 반복하려 하실 것이네. 아무런 망설임 없이.”

석굴이 무거운 침묵에 빠졌다.

* * *

다른 최고위원들이 검가금인이 놓여 있는 이 회의장을 봉인지(封印地)로 만들기 위해서 회의를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의장은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과연 그 대공자님이 본 회의에 걸고 있던 제약이 그런 무형(無形)의 것들뿐이었을까.'

자신의 존재로 말미암아, 최고 운영 회의를 더욱 공정하게 만든다?

그는 그것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증거는 바로 그 의장, 자신의 존재였다.

'감히 우리를 도적 떼라고 폄회하다니?!’

'꼬마 녀석이 주변에서 천재라고 치켜세워 주니, 기세만 등등해서는!’

'당장 저놈을 회의장에서 끌어내라!’

초기의 최고 운영 회의에 있었던 이들이 연소현에게 퍼부었던 발언들을 그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독히도 후안무치했던 이들이었다.

유일하며 적법했던 후계자인 대공자를 유폐시키다시피 했던 이들이었다.

대공자의 선의(善意)에 기대어, 결코 진실이 밝혀지는 날이 오지 않으리라 믿었던 이들이었다.

낙양검가가 마치 제 것인 양, 날뛰던 늙은이들이었다.

'...이제 그들 중 누구도 이 자리에 남지 않았다.'

그들의 신원은 한 명씩, 은밀한 소문을 통해 드러나게 되었었다.

'침묵의 맹세'라는 가장 중요한 내규는 최고 운영 회의의 정통성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지켜져야 할 사항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는 초창기 비상 대책 회의 때의 구성원들에 대한 보안이 비교적 철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이후로도 반복되었다.

최고위원으로서의 권력을 사유화하려 했던 이들.

지나치게 큰 야망을 품었거나, 자신의 계파를 은밀히 도우려 들었다거나, 부정한 이익을 취하려 들었던 이들.

그런 이들은 어느 순간에 하나씩 정체가 밝혀져, 회의장에서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당시 유일하게 자신들의 행동을 끝까지 반대했던 인물.

대공자에게 익명으로 몰래 사과의 서신을 전했었던, 인물.

유일하게 과오(過誤)를 인정하고, 원죄를 받아들인 인물.

바로 현재의 의장, 자신뿐이었다.

그는 연소현이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 * *

“…최고 운영 회의는 대공자께 너무나 거대한 빚을 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의장을 향해 연소현이 뒷짐을 지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대들이 소가주 선정에서 내게 특혜를 줄 수 없는 것은 알고 있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가주 선정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대공자에게 특혜가 간것이 드 러나면, 다른 후계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

“게다가 다른 후계자들보다 약간 더 앞선 정도만으로는, 소가주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소.”

“…송구스럽습니다.”

누구나 납득할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격차가 있어야, 불만 세력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것들은 나에게 맡기시오.”

그가 특수 장막 뒤에 앉은 의장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그대는 지금까지처럼만 해 주시오,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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