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85화 (85/350)

제10편 원죄(原罪)

최악이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여성 신입 최고위원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녀는 최고위원이 된 지는 얼마 채 되지 않았지만, 평생 동안 수라장(修羅場)이란 수라장을 모두 겪어 본 사람이었다.

무수한 적들을 패퇴시켰었고, 강력한 정적(政敵)들을 꺾어 왔으며, 모두에게서 두려움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최고위원이 됨으로써, 이름없는 명예(名譽)를 추구하여 끝없는 헌신(獻身)을 이루고자 했다.

그녀에게 최고위원이란 그런 이들이었다.

최고 운영 회의란 그런 자리였다.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알리지도, 권세와 영광을 누리지도 못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낙양검가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쳐 일하는 이들.

가주의 부재 이후, 위기에 빠진 낙양검가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성장시켜 온 이들.

가법 위에 있으면서도, 그 권한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고, 공정과 균형을 철저하게 이루어 만인(萬人)들로부터 인정받는 이들.

그리고 바로 오늘 새벽까지만 해도, 그녀의 그런 믿음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황혼을 바라보는 자신의 나이에, 더 이상 새로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라고 여겨 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그 믿음이 기반부터 흔들리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 * *

두 신입 최고위원들은 낙양검가라는 희대의 가문에서 정점에 오른 이들이었다.

그들은 연소현의 입에서 원죄(原罪)라는 단어가 나온 직후 깨달았다.

지금까지 연소현에게 휘말려, 분노하여 실컷 떠들고 있었던 것은, 자신들뿐이라는 사실을.

연소현이 최고위원들에게 칩거를 풀어 줄 것을 요구했을 때, 반발한 것이 자신들뿐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들이 끔찍한 진실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원죄라니요. 누군가 설명을 해 주시겠습니까?”

누구보다도 먼저, 연소현이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내가 참석한 회의가, 기록에 남지 않게 되었는지, 남길 수가 없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나?”

“…적어도 그 원죄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연소현이 다시 입을 열려 할 때, 의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본 회의는, 우리는 처음부터 대공자님과의 회동을 기록에 남길 수 없었네.”

“처음부터…?”

“최고 운영 회의는 지금까지 하나의 거짓말을 통해서 현재까지 성립되고 있네.”

연소현이 코웃음을 쳤다.

“의장. 겨우 거짓말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실로 그러하옵니다.”

의장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는 두 신입 최고위원을 향해 말했다.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사기극을 통해 용납될 수 없는 반란을 저지른 이들의 이야기일세.”

그것은 그들이 언제가 될지라도, 감히 외면할 수 없는 원죄였다.

“사기극…?”

“반란…?”

변조된 목소리로도 두 신입 최고 위원의 동요는 감출 수가 없었다.

“오만하고, 어리석었어. 그것은 터무니없는 탐욕을 부린 것이었고, 실로 후안무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네.”

여성 신입 최고위원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의장을 다그쳐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의장이 대답 대신 질문했다.

“이 최고 운영 회의가 언제 최초로 결성되었는지 아시오?”

신입 최고위원들이 답했다.

“…가주께서 의식을 잃었을 때, 검가법전에 따라 성립된 것이 아닙니까? 비상시 최고 결정권자가 없는 상황에 대비한 수칙이지요.”

“최초의 명칭은 최고 운영 회의가 아니라, ‘비상 대책 회의'였다고 들었소.”

“그렇지. 그랬어.”

의장은 그때를 회상하듯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모두가 경황이 없었고, 모두가 혼란스러웠지. 가주님은 무너지지 않는 산맥과도 같은 분이었고, 그분의 부재는 비상 대책 회의에 모였던 우리에게도 끔찍한 공백으로 다가왔어….”

신입 최고위원 두 사람 또한 당시를 떠올렸다.

“맞습니다. 저도 그때를 기억합니다. 미리 지정되어 있던 열세 분의 장로들이 모이셨고, 본가에 남아 있던 모든 무력 집단들이 그 자리를 철통같이 지켰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대부분이 극심한 혼란과 공포를 겪었었소.”

의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그 상황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뭐였겠소?”

“…가주님의 상태를 가문 전체에 공표하기 전에,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최고 의사 결정권자를 정하는 것부터 해야 하지 않겠소?”

“그럼 일단 의전 서열상으로는 대공자를 가주 대리로 삼는 것이….”

“하지만 당시 대공자는 가주님께 칩거를 명받았던 것을 이유로 가주 대리직을 거절했다고 들었소. 그래서 당시 비상 대책 회의는….”

“설마…?”

사기극.

반란.

원죄.

부끄러운 역사.

연소현과의 회동을 처음부터 기록에 남길 수 없었던 이유.

적법한 절차를 거쳐, 정당하게 지위를 얻었다는 그들을 도둑이라고 부르며 비웃었던 연소현.

두 사람의 머리를, 오늘 이 자리에서 들었던 말들이 강타하는 듯했다.

“…아니겠지요? 의장. 지금 제 머리에 떠오른 가설이 틀렸다고 말해 주십시오.”

“의장…."

의장에게서 아무런 답이 돌아오지 않는 가운데, 연소현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알겠나? 내가 이 회의에 소환되고 처음부터 어떤 이야기가 오갔기에, 기록을 남길 수조차 없었는지.”

두 신입 최고위원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연소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너희는 나의 정당한 권리를 박탈했다. 마땅히 나의 자리였어야 할 지위를 찬탈했지.”

그의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가 더욱 크게 비틀렸다.

“...최고 운영 회의 체제? 적법한 절차? 정당한 지위? 그동안의 훌륭한 성적?”

그의 얼굴에 마침내 오랜 시간 품고 있던 경멸과 증오가 그 모습을 드러났다.

“감히 한낱 도적 무리이자 한 줌의 사기꾼에 불과한 것들이…!”

연소현이 그들을 모욕하고, 회의를 모독했지만, 이번엔 신입 최고 위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너희는 내게 아버지께서 쓰러지신 것조차 전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계승 순위를 포기했다는 거짓 사실을 먼저 알렸지!”

그는 분노를 토했다.

“그러고는 아버지를 멋대로 태상가주로 밀어내고, 자신들을 임시 가주 대리에 임명했어!”

그의 외침에는 내공 한 줌 깃들지 않았지만, 그 어떤 고수가 내뿜는 기세보다도 서슬 퍼런 기백이 가득했다.

“그리하면 그 혼란한 상황에 칩거하고 있던 내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고 여긴 것이지! 나는 아직도 처음 이 회의에 소환되었을 때를 기억한다!”

그가 피를 토하듯이 외쳤다.

“너희는 그날 내게 말했다! 본가가 혼란스러운 시국에 감히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말라고! 내가 입을 함부로 놀리고 다니면, 내전(內戰)이 일어날 테니 가만히 기다리라고!”

두 최고위원이 숨을 삼켰다.

그것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끔찍한 협박이었다.

“너희는 그날 내게 약속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혼란이 잦아들 테니, 그때가 오면 내게 자리를 넘겨 주겠다고!”

연소현이 동굴 가운데를 비추던 햇빛에서 벗어났다.

“그것이 너희가 내게 한 최초의 약속이었다!”

그가 성큼성큼 어둠 속으로 들어 와, 최고위원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곧 너희는 본가를 최고 운영 회의 체제로 전환하고 본격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그의 안광이 시퍼렇게 번뜩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는 최초의 약속으로부터 지금까지 십 년을 기다렸다!”

그가 포효하듯 외쳤다.

“너희는 지금에 와서라도,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는가?!”

최고위원 전원이 침묵했다.

머리를 떨구고 침음했다.

그것은 이제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이었다.

약속이 지켜질 수 없는 현실이었다.

다른 후계자들이 충분히 성장하고, 세력을 불린 이 시점에서, 불가능한 요구였으니.

* * *

연소현은 어둠 속에 서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이 약속을 지킬 수 없는 것을 아는 연소현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관심을 끊었다.

모두가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그는 하얀 무명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었다.

먼지가 뿌옇게 일며, 그의 무명옷에는 누런 홁 자국이 흉하게 남았다.

의장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비상 대책 회의가 맨 처음 열렸던 그날. 누군가가 말했지. 열 살도 되지 않은 꼬맹이보다, 우리가 훨씬 더 잘할 수 있다고.”

침묵이 더욱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 거대한 가문이 더 이상 한 사람에 의해서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된다고.”

의장이 어렵게 말을 이었다.

“…누가 먼저 꺼낸 의견인지, 지금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 의견이 모두의 의견이 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지.”

석굴에는 한 노인의 목소리만이 음울하게 울렸다.

“여럿이서 의견을 모으면, 이 가문을 더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 그렇게 어떻게든 스스로들을 납득시켰다.”

노인의 그림자가 깡마른 주먹을 쥐었다.

“…그렇게 당시 우리는 본가의 대공자가 가주 대리직을 거절했음을 공표했다.”

끔찍한 거짓말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거짓말이 었다.

그들은 그렇게 칩거 생활을 하던 연소현을 원각정에 사실상 유폐(幽閉)시켜 버렸다.

남성 신입 최고위원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나는 납득할 수 없소. 비상 대책 회의에 속할 정도로 본가에서 이름 높았던 이들이, 고작 그 정도 이유로 반란을 저질렀다는 말이오...?”

의장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당시 우리를 지배하고 있던 것은 권력에 대한 욕심이 아니었어. 그것은 추악한 질투였지. 패배 의식의 말로였네.”

“설마, 혈사(血史) 때의…?!”

혈사라는 단어가 나오자, 어둠 속에 서 있던 연소현이 돌아섰다.

그는 햇볕 아래로 돌아가, 그 햇빛을 올려다보았다.

“…맞네. 당시 우리는 혈사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었지. 우리는 그 여파에서 전혀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네.”

의장이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그때 숙청당했던 장로들은, 명백한 가문의 적들이 아니었습니까?!”

“게다가 그 일의 실상은 최상위층 중에서도 일부에게만 알려졌을 뿐, 다른 이들은 아무도 몰랐지 않소!”

의장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본가의 그 많은 권력자란 이들이, 고작 단 하나의 어린아이에게 패배 했음을, 아니. 농락당했다는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야. 그렇게 돌이킬 수도 없는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르고 만 것이지.”

그것은 도둑질이었다.

사기극이었다.

아비가 쓰러졌음을 아들에게 알리지도 않았고, 그 아들에게서 가문을 훔쳐 냈다.

신입 남자 최고위원이 비명처럼 외쳤다.

“그, 그렇다고 해도, 당시에 대공자에게 의향을 묻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이후에 모든 것은 정당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오?!”

그 말에 연소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대는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나?”

“무, 무엇을 말이오…?”

연소현이 소매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어 들었다.

그 물건은 햇살 아래서 황금빛을 번뜩였다.

그것은 낙양검가의 가주직인, 검가금인(劍家金印)이었다.

“어째서 칩거 중이던 내가 이것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정당하게 소유하고 있는지.”

"...!"

의장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가주님이 비상시에 대공자께 가주직인이 전달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두셨던 것이었지.”

연소현이 이를 드러냈다.

“게다가 분명 아버지께서 평소에 하시던 말씀도 있었지.”

의장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께서는 항상 가장 가까이있는 우리에게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네.”

그가 탄식처럼 가주의 말을 내뱉었다.

“…만약 불시에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다들 반드시 기억하게.”

그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 검가에는 연소현이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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