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편 비웃다
여성 신입 최고위원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공자. 본 최고위원은 그대의 본가를 위한 희생정신에 감사를 표합니다. 동시에 최고 운영 회의의 일원으로서, 본 회의의 행동에 대해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연소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 사과는 이미 예전에 받았소. 이 회의에서.”
“…그렇다면.”
“내가 이 말을 다시 꺼낸 이유는, 그 사실을 감춘 당신들이 감히 그걸 가지고 이•삼공자와 거래를 했기 때문이오.”
여성 신입 최고위원이 숨을 삼켰다.
자신들은 대공자가 베풀었던 선의를 숨기고 공표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모르는 이•삼 공자에게 대공자가 가주직인을 휘두르는 것을 막아 주겠다며, 거래를 했다.
그 거래 자리에는 그녀 또한 있었다.
그녀가 조금 힘겹게 입을 열었다.
“대공자. 본 최고위원은 그 거래에 대해…."
“잠깐.”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최고위원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 거래는 그대가 베풀었던 선의를 갚기 위해 본 회의가 당신에게 약속했던 사항,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해야만 했던 거래였소.”
“그렇소?”
“그러하오.”
“그 약속이 지금 제대로 지켜지고 있지 않은 것 같소만?”
"...노력 중이오.”
이쯤 되자, 여성 신입 최고위원은 속으로 인정해야 했다.
그것은 남성 신입 최고위원 쪽도 마찬가지였다.
대공자가 도착하기 전에 있었던 사전 회의에서, 의장이 했던 말이 옳았다.
이 회의는 대공자 연소현이라는 당사자가 없이 아무것도 정해 놓고 진행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대화를 결코 기록으로 남길 수도 없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 * *
한동안 침묵이 길게 드리웠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상황.
생각의 정리를 마친 남성 신입 최고위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당시 대공자에게 본 회의가 어떤 약속을 했는지, 누가 설명을 해 주시겠소?”
방금 연소현과 대화했던 최고위원이 대답했다.
“본 회의는 당시 대공자께 한 가지를 약속했소.”
그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후계자들의 경쟁이 대규모 분쟁으로 이어지지 않게 하겠다는 것.”
여성 신입 최고위원이 한숨을 쉬었다.
“이해했습니다. 두 분의 말씀이 모두 맞는 말씀이라는 것도 알겠습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삼공자와의 거래는 대공자와 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필연적이 었습니다.”
그녀는 그때를 되새겼다.
“본 회의가 그들에게 요구한 것은, 경쟁이 격화되지 않게 하기 위해 몇 가지 규칙들을 반드시 지킬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또한, 본 회의는 후계자 경쟁에 대한 통제를 조금씩 잃어 가는 중입니다.”
다른 최고위원이 말을 덧붙였다.
“물론 아직은 완벽하게 후계자 경쟁을 통제하고 있소.”
"하지만 앞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
또 다른 최고위원이 말을 이었다.
“본가 내외의 권력자들이 자신이 고른 후계자를 노골적으로 추대하는 일을 막기 힘들어질 것이오.”
이공자와 삼공자가 지금처럼 비등한 상태로 경쟁을 이어 나가면, 그들을 추대하는 이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 틀림없었다.
여성 신입 최고위원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것은 최종적으로 막을 수 없는 산사태가 될 겁니다.”
"그리고 누군가 우세를 점하기 시작해도 마찬가지의 문제가 발생하겠지요.”
그 시점까지 똘똘 뭉치면서 세를 불린 이들이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설 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패배가 가까워지는 순간에 행동을 시작할 터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세를 불리는것 을 지금부터라도 막을 명분도 수단도 없었다.
최고위원 하나가 연소현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대공자님은 이 문제를 직접 해결하시려 마음을 먹으신 것이로군요.”
“그렇소.”
연소현이 어깨를 펴고 그들을 오시했다.
“나는 오늘 최고 운영 회의가 가주 대행의 자격으로, 내게 내려진 칩거 명령을 공식적이고 공개적으로 거두어 줄 것을 요청하오.”
"...."
"...."
침묵이 길게 이어지는 가운데, 최고위원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그때 남성 신입 최고위원이 말을 끊었다.
“본 최고위원은 반대하오.”
다들 할 말을 잃을 찰나, 그가 더 강하게 주장했다.
“오히려 지금이라도 대공자 연소현에 대한 칩거 명령을 구체화하여, 그를 아예 원각정에 가두어야 하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를 유폐(幽閉)해야 하오!”
다시, 모두가 침묵했다.
하지만 여성 신입 최고위원 또한 한숨을 내쉬고 그의 말에 조심스럽게 동의를 표했다.
“...염치없는 것은 알지만, 일리 가 있는 주장입니다.”
연소현은 무표정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면서 말을 이었다.
“대공자의 능력이 출중한 것은, 이 자리에 있는 최고위원 모두가 공감하는 바입니다.”
그녀는 차라리 눈을 감고 말했다.
“하지만 오히려 대공자의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그의 칩거가 풀리면 경쟁은 더욱 빠르게 본 회의의 통제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연소현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서 물었다.
“내가 이 자리에서 가주직인을 포기하더라도 말이오?”
그녀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것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를 대신하여, 남성 신입 최고위원이 선을 그었다.
“상관없소. 가주직인이 없는 만큼 그대는 더욱 극단적인 방식을 동원할 것이고, 결과는 동일하게 나타날 것이니.”
연소현이 재차 물었다.
"내가 당신들이 정한 규칙을 따르겠다고 해도?”
“그렇소. 본 최고위원은 대공자가 얼마든지 교묘하게 규칙을 뒤틀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여성 신입 최고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본 최고위원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결국에 규칙을 비틀려는 대공자와 단속하려는 본 회의 간의 다툼이 본가에 거대한 균열을 일으키게 될 겁니다.”
연소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다 내 능력이 너무 뛰어나서 생긴 일이니 할 말이 없군.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좀 너무한 거 같지 않소?”
“이런 말까지는 하지 않으려고 했건만…!”
이런 상황에서도 태연하고, 뻔뻔할 정도의 태도에, 남성 신입 최고 위원이 혀를 찼다.
“애초에 대공자가 지금 나서려는 것 자체가 염치없는 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소?”
“최고위원…! 의미는 이해하겠지만, 언행에 조금 주의를….”
연소현이 고개를 저었다.
“전혀.”
“지금에 와서 대공자 당신이 나서게 됨으로 해서 본가의 무고한 이들이 홀릴 피를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연소현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연(淵) 씨의 가문에서, 그 직계 혈족인 내가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데, 피가 흐른다면.”
그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그 핏값은 당연히 내 가문이 치러야 하는 것이지.”
쏟아지는 햇빛 아래서 연소현이 이를 드러냈다.
"너희가 이 가문의 주인인 양 착각하지 마라.”
최고위원들이 숨을 삼켰다.
“대공자…! 대공자도 언변에 주의를 해 주시죠! 본 회의는 정당한 절차에 의거하여 현재 지위를 인정 받았습니다.”
연소현이 비웃었다.
“정당한 절차 같은 소리 하지 마라. 도둑놈들이.”
“무슨..?!”
그녀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연소현, 네 이놈!”
남성 신입 최고위원이 분노에 몸을 떨었다.
“이 후안무치(厚顏無恥)한 어린 놈을 봤나?!”
그의 내공이 담긴 고함이 석굴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과거 네 아버지인 태상가주가 쓰러졌을 때, 정당한 계승 순위를 포기한 것이 바로 네놈이 아니더냐?!”
그가 펄펄 뛰었다.
“네놈이 그때 나서서, 그 잘난 능력으로 가주 대행 역할에 충실했다면, 지금 본가는 이런 복잡한 상황에 놓이지도 않았다!”
그가 연소현을 손가락질했다.
“그런 네놈이 지금에 와서 핏값에 대해 떠들어?! 지금에 와서 우리를 못 믿겠으니, 직접 나서야겠다고?! 이런…!”
그의 말이 너무 격화될 것 같자, 여성 신입 최고위원이 끼어들었다.
“대공자! 그대의 분하고 화가 나는 입장은 이해하지만, 지금 본 회의는 이제까지 훌륭한 성적으로 능력을 증명해 왔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믿고…!”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최고 운영 회의 체제 아래서, 검가는 무서운 기세로 매년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소현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은 대폭소였다.
“너희가 능력을 증명해…? 내가 너희를 믿어…?”
그는 아예 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그녀의 깊은 인내심이 거기서 끊어 졌다.
"대공자 연소현! 그대의 오만함이 정말 극에 달했구나!”
“네놈이 진정 눈에서 피눈물을 홀려 봐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구나?!”
“…다들 그만하게.”
의장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누구도 그 힘없는 목소리에 신경 쓰지 않았다.
연소현이 누운 자리에서 그들을 향해 말했다.
“오만함이 극에 달한 것도 너희고, 눈에서 피눈물을 흘려야 정신을 차릴 것도 너희가 아니더냐?”
“오냐! 네 이놈! 이제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으니, 입에서 나오는 것이 다 말인 줄 아는구나!”
“최고 운영 회의 모독죄는 즉결 처분 대상이니, 그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직접 느껴 보도록 해라!”
신입 최고위원 두 사람 중 누가 먼저 비상사태를 알리는 줄을 당겼는지는 불명확했다.
하지만 어쨌든 밖에서 요란하게 종이 울렸고, 즉각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관의 무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당장 이자를 자리에 꿇어앉혀라! 이 자리에서 즉결 심판하도록 하겠다!”
“필요하다면 내 최고위원직을 걸고서라도 오늘 연소현, 네놈의 주리를 틀고 말리라!”
그 외침에 기관무사들이 급히 연소현에게 다가왔다.
연소현은 그런 그들을 무시했다.
그저 그 자리에 누운 채로 의장의 방향을 향해 비틀린 미소를 지었을 뿐.
“모두 나가거라!”
결국에 의장의 노성(怒聲)이 터져 나오자, 기관무사들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서 멎었다.
“의장! 소환인은 정도를 넘었습니다! 이대로 넘어간다면, 모두가 최고위원을 웃음거리로 생각할 것입니다!”
“의장이 이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그때 의장이 앉아 있던 석굴에서 가공할 기파(氣波)가 터져 나왔다.
“감히 본가의 최고 운영 회의장에서 본 의장의 명을 무시하는 것이냐?!”
순간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
최고위원들은 귀를 감쌌고, 기관 무사들은 일제히 낙엽처럼 뒹굴었다.
의장이 손을 내젓자, 그들은 거대한 빗자루에 쓸린 것처럼 복도 밖으로 튕겨 나갔다.
그리고 그가 다시 손을 당기자, 거대한 석문이 무서운 기세로 닫혔다.
석굴의 천장에서는 그 여파에 의해 홁먼지들이 떨어져 내렸다.
단 한 호흡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야말로 신위(神威)라는 말에 어울리는 수법이었다.
“대공자님….”
하지만 그런 신위를 선보인 의장의 목소리에는 슬픔이 묻어날 뿐이었다.
“…대공자님께서는 매번 신입 최고위원이 있을 때마다, 이 일을 반복하실 생각이시옵니까?”
이게 무슨 말인가.
'이 일'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게다가 의장은 어째서 연소현에게 극존칭을 사용한단 말인가.
이제까지 펄펄 뛰던 두 신입 최고위원이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물론.”
신입 최고위원들의 시선이 급히 누워 있는 연소현에게로 향했다.
“당신들이 그 스스로 부끄러운 역사를 전하지 않는데, 유일한 목격자인 나라도 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가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몸에서 천장에서 떨어졌던 흙먼지가 흩날렸다.
“그 자리에 올라, 이 가문 전체를 제 것인 양 운영하기 전에, 당신들은 자신들의 원죄(原罪)부터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