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편 기억하라
최고 운영 회의에 출석하기 위한 연소현을 태운 사인교(四人轎)는 거침없이 대로들을 달렸다.
그들이 가로지르며 순식간에 변해 가는 풍경에서, 행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담 너머로, 창밖으로 내다보는 이조차 없었다.
이것이 기관이라 불리는 조직이 낙양검가 내에서 가지는 '우선적 권한'의 힘이었다.
“어지럽지는 않으십니까?”
맞은편에 앉아 있는 지휘관의 물음이었다.
“가마를 들쳐 멘 이들이 경신법으로 내달리는 와중에, 눈은 가리고, 같은 골목을 몇 번씩 돌거나, 가끔 지붕 위를 뛰어넘으면서, 어기럽지 않냐고?”
연소현은 뒤로 몸을 기대었다.
좁아터진 사인교 안에서는 편히 몸을 기대기도 힘들었지만.
“송구스럽습니다만….”
“지침이지. 나도 안다.”
연소현이 편히 있을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최대한 구부리고 있던, 지휘관이 미소를 지었다.
"...."
그가 뭐라고 수하들에게 전음(傳音)을 날리자, 사인교 주변을 경계하며 달리던 무사들이 진형을 넓게 조정했다.
그리고 그들은 품에서 작은 종같은 것을 꺼내어 흔들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기관 고유의 방청(防聽) 태세인가?”
연소현의 물음에 지휘무사가 전음으로 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귀가 예민하시군요. 이로써 제 전음은 새어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연소현은 대답 없이, 고개만을 끄덕였다.
'제 수신호를 보시고 궁금한 점이 많으실 테지만, 이동 시간이 길지 않으니 제게 주어진 시간도 적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는 연소현의 반응도 확인하지 않고, 서둘러 전음을 이어 나갔다.
'저만이 알고 있는 정보원에 의하면….'
이렇게 시작하는 정보는 신뢰도가 무척이나 떨어지는 정보였다.
하지만 연소현은 잠자코 전음을 들었다.
'그 수신호'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과거 특정되지 않은 어느 시점에, 이공자와 삼공자가 최고 운영 회의에 의해 소환된 적이 있습니다.'
연소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들은 최고 운영 회의로부터 한 가지 확답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가 눈을 가리고 앉아 있는 연소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최고 운영 회의는 가주직인이 후계자 선정에 영향을 끼칠 일이 없게 만들겠다.'
연소현이 눈가리개 안에서, 두 눈을 감았다.
지휘무사는 전음을 서둘렀다.
'당장에 믿어 달라고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어차피 곧 최고위원들을 만나시면, 그들의 행동을 통해 직접 확인하실 수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그는 간절한 눈빛을 담아 연소현을 바라보았다.
'부디 간청드리옵니다, 대공자님.'
전음에서도 그의 마음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들을 조심하셔야 하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도록 모든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도착이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그가 최대한 서둘러 당부를 전했다.
'일단은 최대한 머리를 숙이셔야 할 시점이옵니다. 이번 위기를 넘기셔야, 후에라도 대의를 도모할 수 있는...'
연소현이 그의 말을 끊었다.
“돌아갈 때는 규정상 다른 지휘 무사가 동승하겠지?”
“그것은 보안 사항이라 답변드리기가 힘듭니다.”
지휘무사가 전음을 사용하여, 이중으로 답했다.
'예 그렇사옵니다.’
그러자 연소현이 '전음'으로 그에게 답했다.
'그렇다면, 지금 전해 두도록 하지.'
그는 자신의 귓가로 파고든 연소현의 전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 밖에서 그의 기척을 느낀 기관의 무사들이 일제히 검에 손을 가져갔을 정도였다.
“여긴 아무 이상 없다! 대공자께서 준비 중이시니, 다들 거리를 벌리고, 경계를 유지하라.”
방청 태세가 해제되었다.
목적지가 코앞이었다.
'무공을, 하실 줄, 아셨습, 니까?’
그의 심리적 동요를 드러내듯 전음이 불안정했다.
'보아하니, 자네는 지금 기관 내부에서 외로운 싸움을 벌여 나가고 있군.'
'...맞습니다.’
'잘 듣게. 이 말은 자네의 형이자 내 친구이기도 했었던, 전임 기관장에게도, 내가 똑같이 해 주었던 말이니.'
"...!"
연소현은 수신호만으로도 그가 누군지 알아챘었던 것이었다.
사인교가 목적지에 멈췄다.
'자네가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오거든 기억하게.'
연소현은 지휘무사의 도움을 받아, 사인교에서 내려서며 전음을 이어 나갔다.
'이 검가에는, 나 연소현이 있다.’
지휘관은 연소현이 두꺼운 눈가리개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같은 느낌을 받았다.
'자네 형이 죽었던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내 당부를 잊었거나, 무시했기 때문이었어.'
저쪽에서 인계를 받기 위해 다른 조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를 찾아오게.'
다른 조의 무사들이 전음 도청 가능 범위 안에 들어왔다.
지휘관은 그저 연소현을 멍하니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형이 그렇게 극찬하던, 소년의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을수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수하의 말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아, 괜찮다. 모두 들어라. 우리는 지금부터 첫 번째 철수 지점으로 이동한다.”
대공자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수하들과 경신법을 펼쳐 달리면서, 그는 형의 유서를 떠올렸다.
과거 기관의 총책임자였던 형을 떠올렸다.
수십 번을 넘게 읽어 내용을 모두 외워 버린 그 유서를.
'네가 이 유서를 보게 된다면, 당연히 내가 죽었다는 뜻이겠지.'
자신의 형은, 스스로의 죽음에 대비하면서도, 태연자약하기 짝이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친우(親友)였던 대공자의 당부를 잊었거나, 무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해라 동생아.’
'이 낙양검가에는 대공자 연소현이 있음을.'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가 칩거를 풀고 다시 세상에 나온다면, 반드시 그를 만나 보아라.'
그는 대공자 연소현이 이번 위기를 넘기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연소현의 칩거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에게 도움이 되기 위한 정보를 찾아 헤맸던 그였다.
결국, 자신이 어렵게 알아낸 정보를 연소현에게 전달하는 것에는 성공했다.
'최고 운영 회의는 가주직인이 후계자 선정에 영향을 끼칠 일이 없게 만들겠다.'
이제 남은 것은 연소현의 몫이었다.
* * *
낙양검가, 이공자의 진영.
이공자의 책사, 한명휘가 손(孫) 장로에게 말했다.
“…오늘 안으로 결론이 나겠군요.”
이공자 측 책임 책사들과 함께 느긋한 모습으로 앉아 있던 손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 운영 회의가 일을 미루는 일은 결코 없으니, 오늘 내로 대공자 문제는 해결이 될 걸세."
그들은 새 소식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최 책사가 손톱을 물어뜯다가, 손 장로에게 물었다.
“…최고 운영 회의가 주군과의 약속을 어길 리가 없겠지요?”
손 장로가 피식하고 웃었다.
“그 자리에 우리의 주군만 있었다면, 혹여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곳에는 삼공자도 함께 있었어. 최고위원들은 자신들의 평판을 위해서라도, 약속을 반드시 지킬걸세.”
손 장로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만일, 그들에게 신뢰와 신용이 없었다면 말일세….”
책사들의 시선이 그를 향해 모였다.
“태상가주께서 의식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이 본가를 계속 운영하는 것을 잠자코 납득했겠는가?”
그의 눈이 번뜩였다.
“본가의 그 괴물 같은 권력자들이?”
* * *
연소현은 여전히 눈을 가린 채, 기관의 무사들을 따라, 끊임없이 걸었다.
귓가에 울리는 그들의 묵직한 발소리가 이명처럼 남아 울리는 듯했다.
연소현은 투덜거리는 중이었다.
“…어차피 최고 운영 회의가 열리는 장소는 항상 불규칙적으로 바뀌잖나.”
그가 구시렁거렸다.
“이런 짓은 보안을 구실 삼아서, 소환인을 정신적으로 압박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죄인도 아니고 소환인에게 이러는 건, 지극히 부당한 처사란 말이다.”
내부 경계를 책임지는 지휘무사가 대답했다.
“불만 사항이 있다면, 정식으로 기관에 항의하시오, 무검자(無劍者).”
조롱기가 가득했다.
“소용없겠지만.”
연소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내가 정말 마음먹고 달려들면, 너흰 '예전처럼' 박살이 날 텐데, 괜찮겠나?”
"...."
“'선배들에게 내 이야기를 지겹도록 들었을 텐데?”
돌아오는 답변은 없었다.
대신 어째서인지 그들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양옆의 무사들에게 팔짱 끼워진채 걷던 연소현은 이제 질질 끌려 가다시피 했다.
“야! 얘들아! 이번엔 살살 해 줄 테니까, 좀 천천히 가자!”
당연히 더욱 거칠어졌다.
연소현은 그들에게 매달린 채 킬킬거리며 웃었다.
“너희들. 내가 이거 다 기억해 둘 거다.”
“…마음대로 하시오, 무검자.”
* * *
“앞으로 직진하시오.”
그들은 연소현의 눈가리개를 풀어 주고, 앞으로 떠밀었다.
연소현이 비틀거리다가 겨우 균형을 잡았다.
“얘들아 농담 좀 했다고, 너무 심한 거 아니냐?”
뒤에서 석문(石門)이 쿵 하고, 닫혔다.
“…정 없는 것들.”
연소현은 고개를 내젓고, 긴 복도를 따라 앞으로 향했다.
기나긴 복도를 따라서 인공적으로 조성된 개천이 양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개천 위로는 천장이 트여 있어, 자연광이 스며들고 있었다.
역시 돈지랄은 검가가 중원 최고 아닌가, 연소현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복도를 따라 설치된 진법은 심리적으로 그를 위축시키려 들었고, 불안하게 만들려 했다.
하지만 한낱 진법 따위가 그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휘적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복도의 끝에 다다르자, 반구형(半球形)의 넓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운데에 서시지요, 대공자.”
남자로도 여자로도 느껴지는, 변조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반구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석굴(石窟)의 형태 때문이었다.
“여긴 예전에 아버지께서 개인 연무장으로 쓰시던 곳인데….”
연소현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석굴의 한가운데에 섰다.
천장의 구멍에서부터 뻗어 내려 온 햇살이 그를 비추었다.
“…그것은 저희도 마음 깊이 송구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대공자.
하지만 부디 저희의 사정도 헤아려 주시길.”
이전과 다른 인물이지만, 역시나 변조된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들은 반구형의 석굴을 빙 둘러 뚫려 있는 작은 석굴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홉 개의 굴, 아홉 명의 인원이 었다.
연소현은 한 바퀴 천천히 돌면서, 그들을 향해 인사했다.
“오랜만이오, 구인(九人)의 최고 위원(最高委員)들.”
연소현이 방금 깨달았다는 듯이, 자신의 손바닥을 쳤다.
“아. 그동안 교체된 분들도 계시겠군. 처음 뵙겠소, 본인은 연소현이라고 하오.”
대답은 없었다.
그가 미소 지었다.
“본인만 인사를 하니, 이상하군. 다들 인사부터 주고받는 것이 어떻겠소?”
그 말에 변조된 목소리가 대답했다.
“최고위원들은 인사 따윈 주고받지 않소이다.”
다른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최고 운영 회의만의 엄격한 내규에 따라, 최고 운영 회의를 구성하는 모든 인원은 서로의 신원을 알아서도, 알려고 해서도 안 되니까요.”
연소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적어도 두 분은, 최고위원이 된 후에 나를 처음 보는 분들이군.”
"...."
“자랑은 아니지만….”
연소현이 미소 지었다.
“이 자리에서 내 상대를 한 번이라도 해 본 기억이 있는 최고위원들은, 이딴 말에 절대 대답하지 않는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