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81화 (81/350)

제6편 기관(機關)

멀리 험준한 숭산(嵩山)의 이름 높은 봉우리들에 쌓인 눈이 아침 햇살을 맞아 새하얗게 작열하고 있었다.

절벽에서 쏟아지는 몇 줄기의 폭포는 금빛을 찬란하게 쏟아 내며 무지개를 그려 냈다.

울창한 산림(山林)은 완만한 평지까지 흘러내려 금지(禁地)로 알려진 원각정의 수림(樹林)이 되었다.

새벽녘부터 피어오른 안개는 숲의 신선한 공기를 머금고 원각정을 감쌌고, 원각정의 부엌서는 굴뚝을 통해 밥을 짓는 냄새가 멀리 퍼졌다.

그것은 언제나처럼 완벽히 평화로운 원각정의 새벽 풍경이었다.

“…기관(機關)에서 오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원각정의 대문에서부터, 그 평화가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지금부터 여러분은 기관의 통제에 따릅니다.”

그것은 존댓말의 형식을 하고 있었지만,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명백한 명령이기도 했다.

“원각정의 경비 임무를 수행 중인 모든 인원은, 무기를 반납하고, 현재 수행 중인 임무를 중단합니다.”

탈명귀검(奪命鬼劍)은 인상을 쓰고 상대를 노려봤다.

“…무슨 상황인지, 말해 줄 리는 없겠지?”

“특임대장(特任隊長). 당신에게는 기관의 임무 수행에 관련된 정보를 취급할 권한이 없습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피풍의(披風衣)를 걸친 상대에게서는 일말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매끈한 금빛 가면 뒤에서, 차가운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이제부터 이 지역은 기관이 통제합니다. 여러분은 즉시 기관의 통제에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하, 젠장. 새벽부터 뭔 일이야?”

“뭐, 잘됐지. 오랜만에 휴가를 받은 셈으로 치자고.”

이제까지 누구를 상대로도 물러난 적이 없었던, 특임대원들이 순순히 무기를 반납하고 물러섰다.

그리고 그 자리를 황금 피풍의를 걸치고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이들이 차지했다.

기관의 지휘무사(指揮武士)가 재차 입을 열었다.

“특임대장.”

그의 시선은 지독하게도 무감정했다.

탈명귀검은 그가 내민 손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대에게 거부권은 없다. 즉시 협조하라.”

바뀐 말투는 경고를 의미했다.

“대장….”

동료들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탈명귀검을 향했다.

날 선 긴장감이 묵직한 침묵으로 임했다.

“…제길.”

결국, 탈명귀검은 눈에서 힘을 풀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허리께에서 무기를 풀었다.

“…나는 대공자님의 개인 호위 임무를 맡고 있기도 하니, 원각정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시오.”

그에게서 무기를 건네받은 기관의 지휘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 절대 저희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마십시오.”

* * *

세쌍둥이는 한창 밥을 짓고 요리를 하던 중에, 들이닥친 이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하던 일을 중단하고, 통제에 따라 주시길 바랍니다.”

그녀들 중 하나가 주걱을 치켜들고 말했다.

“아니, 당신들 임무랑 밥 짓는게 무슨 상관이라고 이러십니까?”

“우리는 대공자님께서 드실 아침 식사를 준비 중이라고요!”

“전부 폐기하라.”

피풍의를 걸친 기관의 무사가 손을 내젓자, 다른 무사들이 움직였다.

“저기요!”

“이봐요!”

그들은 아궁이에 물을 뿌렸고, 솥에는 재를 뿌려 요리들을 모두 망쳐 놓았다.

심지어는 이미 조리가 완료되어 덮어 놓았던 요리들에도 재를 뿌리는 것이 아닌가.

“야! 너희 미쳤어?!”

새벽부터 땀 흘리며 모든 정성을 담아 준비하던 요리를 망쳐 버리는 모습에 세쌍둥이가 폭발했다.

“그냥 덮어 놓기만 하면 될 것을, 왜 재를 뿌리고 지랄이야?!”

“너희가 그 잘난 기관에서 나왔으면 다냐?!”

분노한 이령이 기관의 무사를 밀쳤지만, 오히려 나가떨어진 것은 그녀 쪽이었다.

그것은 내공도 아니고 뭣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무사들이 입고 있는 엄청난 무게의 중갑(重鉀) 때문이었다.

"...."

황금색 피풍의 사이로 드러나는 엄청난 수준의 중장무장을 보며, 그녀들은 이를 악물었다.

“이제부터 너희의 모든 일상 임무는 기관을 통해 통제된다.”

* * *

연소현의 처소 앞마당에서, 기관의 지휘무사가 명령서를 꺼내어 펼쳐 들었다.

“이 시각을 기점으로 원각정은 완전한 봉쇄 상태에 들어갔음을 본가의 최고 운영 회의와 기관의 이름으로 선언합니다.”

어느 평화로운 날 아침, 원각정은 그렇게 폐쇄됐다.

* * *

“그리고 일상 임무가 아닌 개인적인 용무의 경우엔, 이쪽의 여성 무사가 시녀장을 담당하고 있으니, 먼저 말씀해 주신 뒤에, 반드시 그통제에 따라야 합니다.”

자신의 검을 건네주며 정아가 물었다.

“측간에 용무가 있을 때도 말입니까?”

기관의 무사가 무감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용건을 말씀하시면 담당 여성무 사가 그때그때 설명해 드릴 겁니다.”

여성 무사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측간의 경우엔 문을 개방한 상태에서 이용하셔야 하며, 절대 저의 시선에서 벗어나시면 안 됩니 다.”

정아는 그녀에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힘든 임무를 맡으셨군요.”

여성 무사가 가면 뒤에서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에게는 기관의 임무 수행에 관련된 정보를 취급할 권한이 없습 니다.”

정아가 자신의 방을 뒤지는 이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들이 하는 일들도 다 임무 수행에 필요한 일들입니까?”

“그렇습니다.”

기관의 무사들이 장롱에서 그녀의 속옷을 마구 꺼내고 있었다.

직접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세쌍둥이 시녀들의 방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으리라.

“야! 이놈들아…!”

들려오는 외침에 정아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기관의 무사들이 원각정의 밭 일부를 파헤치고 있었다.

무럭무럭 자라던 채소들이 뿌리째 뽑혀 여기저기 던져졌다.

“그건 우리가 힘들게 키운 채소들이라고!”

삼령이 그들을 막으려 했지만, 그녀를 붙잡은 기관의 무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것도?”

“그렇습니다. 모두 임무입니다.”

정아가 용안으로 무감정하고 태연하게 대답하는 기관의 무사를 바라봤다.

“일부 사실이긴 하나, 자기 자신도 의문을 품고 있군요. 필요한 보안 절차가 아니라, 누군가의 명령을 받은 건가요?”

“모두 보안 절차입니다.”

그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태도로 답했지만, 정아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인님을 만나 뵈어야겠습니다.”

방에서 나가려는 그녀를 기관의 무사들이 막아섰다.

“허가할 수 없는 사항입니다.”

"...검을 내준 것을 후회하게 되는군요.”

방 안에 있던 기관의 무사들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은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저희, 기관은 본가의 최고 운영 회의에서 직접 명을 받는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그의 시선이 정아를 향했다.

“우리에게는 칼을 들이대는 자를 신분의 고하를 불문하고 즉결 처분(卽決處分)할 권한이 있다, 시녀장.”

* * *

“이건 그냥 차(茶)인데요.”

세쌍둥이 시녀 중, 일령이 삐딱한 눈으로, 자신을 가로막은 기관의 무사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출입 가능한 곳은 여기 까지입니다. 쟁반을 제게 넘기고, 돌아가십시오.”

두 잔의 차가 올려진 쟁반을 넘겨준 그녀는 투덜거리며, 건물 밖으로 나왔다.

거기에는 이미 돌층계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자신의 쌍둥이 자매들이 있었다.

그녀들의 시야에 들어오는 원각정 구석구석마다 황금색 피풍의를 걸친 무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많은 무사가 원각정 전체를 이 잡듯 샅샅이 수색하고 있었다.

“...완전히 점령군이 따로 없네요.”

“아… 오늘의 요리는 회심작이 었는데요.”

“원각정 전체를 제집처럼 헤집고 다니네요.”

“제집이라. 과연 자기 집에서 저런 짓거리를 할까요…?”

“저 못난 가면을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군요.”

자신들의 뒤에 서 있는 무사들을 향해 들으라고 한 말이었지만, 그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그녀들은 일제히 한숨을 쉬었다.

* * *

연소현은 기관의 무사가 들고 들어온 쟁반 위에 놓인 찻잔에 손을 뻗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와 마주 앉아 있던 기관의 지휘무사가 손짓하자, 뒤에서 대기하던 무사가 연소현의 찻잔을 들었다.

그가 가면을 비껴 올리고 한 모금, 신중하게 차를 검사했다.

연소현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어디의 무슨 차로 감별(鑑別)되나?”

무사는 아무런 대답 없이, 공손한 태도로 찻잔을 연소현의 앞에 돌려놓았다.

대신 지휘무사가 입을 열었다.

“너무 그를 나무라지 말아 주십시오. 그저 저희는 대공자님의 안전을 위해 임무를 수행 중….”

연소현이 말을 끊었다.

“내 안전이 아니라, 나를 소환한 '최고 운영 회의'의 안전을 위해서겠지.”

연소현 앞에는 그를 소환한다는 내용이 담긴 서류가 놓여 있었다.

서류에는 최고 운영 회의를 의미하는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

잠시 아무 말이 없던, 지휘무사가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기관(機關)은, 낙양 검가의 유일한 방패이며, 최고이자 최후의 방패로, 그 모든 구성원은….”

연소현이 다시 그의 말을 가로챘다.

“모든 구성원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떠한 이유가 있더라도, 자신이 낙양검가의 가주를 수호하기 위해 존재함을 잊지 않는다.”

기관의 서약(誓約)이었다.

연소현은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기관의 서약을 아시는군요.”

“알지.”

연소현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요즘엔 서약이 수정된 것도 알고 있지.”

"...."

“가주를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낙양검가의 핵심(核心)을 수호하는 것으로 말이야.”

연소현의 날카로운 시선이 지휘 무사의 가면을 꿰뚫는 듯했다.

“지금 너희가 지키는 것은 가주(家主)인 아버지가 아니라, 최고 운영 회의의 최고위원들이니까.”

기관은 본디 낙양검가의 최고 의사 결정권자, 즉 가주를 보호하기 위한 경호처였다.

그 임무를 위해서, 작전 수행에 있어 가장 우선되는 권한을 부여받은 조직이기도 했다.

“엄밀히 말씀드리면….”

가면 뒤의 눈이 연소현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대공자께서 말씀하시는 가주님은 현재 은퇴하시어 태상가주님이 되셨고, 본가는 현재 '최고 운영 회의' 가주 대행 체제로….”

“그래. 법적으로 따지면, 나 또한 그냥 대공자가 아니라 본가의 가주 대행이다.”

“대공자께서는 가주 대행으로 정식 절차를 거쳐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니, 가주 대행으로서 권한도 주장할 수 없는:”

“그래?”

연소현은 품에서 검가의 가주직인(家主職印)을 꺼내어 탁자 위에 놓았다.

“다시 권한 어쩌고를 말해 봐라.”

햇빛을 반사해 번쩍이는 검가금인(劍家金印)의 모습에, 지휘무사가 침음을 흘렸다.

“말해 보래도?”

그가 한숨을 쉬었다.

“…역시 들었던 그대로입니다. 대공자님을 감히 언변(言辯)으로 상대할 수는 없군요.”

비꼬는 말이었지만, 연소현은 개의치 않았다.

“그럼 헛소리는 그만하고, 날 최고 운영 회의로 데려가기나 해라.”

그는 찻잔을 들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쓸데없이 내 식구들 괴롭히는 것도 그만두고.”

지휘무사는 가면 뒤에서 고개를 내저었다.

“당연히 아시겠지만, 저희는 주어진 지침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연소현이 코웃음을 쳤다.

“헛소리. 네놈들이 지금 이 원각정에서 벌이고 있는 짓거리는, 명백히 표준 절차에 어긋난다.”

“기관의 절차에 대한 것은….”

연소현이 가만히 가주직인을 쓰다듬자, 그가 입을 다물었다.

“뻔하구나.”

그런 지휘무사의 두 눈을 직시하며, 연소현이 입을 열었다.

“멍청한 최고위원 하나가 소환 전에 내 기를 좀 죽여 놓으려고 하는 짓거리겠지?”

"...."

연소현이 이를 드러냈다.

“일부러 이제까지 나를 만난 적이 없는 지휘무사를 보낸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나를 아는 자라면 이런 짓거리 따위 절대 하지 않을 테니까.”

최고위원을 깎아내리는 말에 지휘무사 뒤에 대기하던 무사가 노골적으로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감히 가주직인을 앞에 두고 함부로 처신하지 못했다.

"...."

그러나 연소현 또한 더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의 시선이 지휘무사가 '몰래'만들어 보이는 수신호(手信號)에 머물러 있었다.

-대기 요망(待機要望)-

그것은 연소현 자신과 지금은 세상을 떠난 '그의 친구'만이 알고 있는 수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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