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편 장로 회의(長老會議)
낙양검가.
장로원(長老院), 대회당(大會堂).
염 장로가 장로원의 정기 회의에 참석할 때는, 항상 전투 작전에 돌입하기 직전의 긴장감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감각을 최대한 일깨울 정도로, 하지만 긴장에 몸이 굳지는 않을 정도로.
그렇게 적절한 긴장을 유지하다 보면, 그의 직감이 속삭일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다음 안건은, 검가법전(劍家法典)상에서 쓰이지 않는 용어의 대체 혹은 삭제와 미비(未備)된 용어의 정립에 관한 안건임을 알립니다.”
옆에 앉아 있던 동료 장로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제일 지루한 시간이군.”
염 장로 또한 평소였다면, 당연히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무사 출신의 그에게 가장 끔찍한 시간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뒷덜미가 근질근질하고 코가 간질간질한 것이 뭔가 심상치가 않았다.
“…대체 혹은 삭제 대상 용어로는...."
벌써 조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를 지정하고 표현하는 용례로서….”
어차피 이런 학술적인 안건은 장로원의 소위원회(小委員會)로 옮겨가 다루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 계파마다 있는 해당 업무에 수십 년간 매진해 온 동료 장로들이 해결할 몫이었다.
나머지들은 웬만하면 그 의견에 따르기 마련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세 번째로 미비된 용어의 정립에 대한….”
하지만 오늘은 그래선 안 될 것 같은 어떤 확신이 들었다.
“…이에 해당하는 용어는, 근속(勤續), 칩거(蟄居), 용퇴(勇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것 봐라…?,
그는 옆에서 졸고 있는 같은 계파의 장로를 툭툭 쳐서 깨우면서, 이공자와 삼공자의 계파에 속해 있는 장로들에게 시선을 향했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무료한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졸거나 하품하는 이가 없었다.
염 장로의 직감이 확신으로 변하 는 순간이었다.
“…따라서 이 안건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해당 소위원회로 이관하기 위한 간이 표결(簡易票決)을 진행….”
그리고 뭔가 이상함을 느낀 것은 노골적으로 뒤로 기대서 반쯤 자고있던, 장로원주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잠깐!”
자그마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찬란한 위업들의 소유자로 일각에서는 '작은 거인이라고 불리는 노인이었다.
“누구야?! 이딴 장난질을 치는 새끼가?!”
그런 그가 자신의 책상 위에 서서 쌍욕을 외쳤다.
그의 욕설과 막말 그리고 기행(奇行)은 완전 폐쇄 형태로 이루어지는 장로 회의 시간에서만 볼 수있었다.
“내가 분명 이야기했을 텐데? 중요 안건을 이딴 식으로 소위원회에 묻어서 가려는 새끼는 찾아서 잡아 죽여 버린다고!”
엄격한 내규에 따라 내공이 한 푼어치도 들어 있지 않은 외침이었지만, 넓은 대회당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무, 뭐야?”
“아, 간 떨어질 뻔했구려.”
졸고 있던, 혹은 딴생각을 하던 장로들이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
“원주(院主). 무슨 일이오?”
“일단 원주를 좀 진정시키시오!”
몇몇 장로에 의해서 쌍욕을 하던 장로원주가 강제로 끌어 내려져 앉혀 졌다.
쌍욕을 퍼붓는 장로원주의 입을 틀어막은 장로 하나가 큰 소리로 물었다.
“누가 설명 좀 해 보시오!”
낄낄거리며 그 광경을 지켜보던 호법원주(護法院主)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대공자의 칩거 범위를 소위원회로 옮겨 마음대로 정하고 싶었던 모양이오.”
“뭐…?”
장내가 아수라장으로 돌변하는데에는 별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 *
'역시 괴물들이구먼.'
염 장로는 혀를 내둘렀다.
평소에는 대공자에 대해서 하나도 관심이 없던 장로들도, 상황에 대해 파악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이딴 식으로 매번 일이 진행되니, 후계자 계파에 속한 이들이 통으로 묶여 욕을 먹는 것을 왜 모르나?!”
“그게 싫으면 당장 삼공자 계파부터 처신을 잘했어야지!”
“뭐?! 이 사파(邪派) 추종자 놈이?!”
“이미 망해 버린 정파(正派) 새끼가 입만 살아서는?!”
이공자와 삼공자의 계파에 속한 장로들이 멱살을 잡기 일보 직전이었다.
거기다가 재미 반 흥미 반으로 끼어든 장로들까지 더해져 난리굿을 벌이는 중이었다.
저잣거리에서 쌈박질을 벌이는 장돌뱅이들을 방불케 하는 모습이었다.
내공을 쓸 수도 없고, 회의 내용이 밖으로 새어 나갈 일이 없는 장로 회의의 단점이었다.
회의 진행을 담당하는 장로가 염 장로의 곁에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부탁하네, 염 장로.”
염 장로는 한숨을 크게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거대한 주먹을 내리쳐, 단숨에 책상을 두 조각으로 박살 내 버렸다.
“싸우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신다면, 이 염 아무개가 누구라도 상대해 드리겠소.”
일순, 대회당의 움직임이 멎었다.
몇몇 장로들이 벌써 끝났다는 둥 아쉬움을 토로했다.
부추기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장내는 소강상태로 접어든 이후였다.
누구도 내공 한 푼 없이 소머리를 잡아 뜯는 염 장로와 드잡이질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으니.
* * *
이후 회의는 안건이 안건이니만큼, 상식적이고 진지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법전상에서 칩거 범위를 정하는 것이야, 합의를 거치다 보면 될 것이니 별문제가 아니고. 소급 적용도 예외 조항을 달면 큰 문제는 아니지.”
“하지만 문제는 그 대상이 대공자이기 때문이 아니겠소?”
“…내원에서의 일을 대공자의 '칩거 거부 선언으로 받아들인 이들이 많나 보군.”
“아무래도 이공자와 삼공자 계파의 장로들이 아니겠소?”
“하긴, 그 대공자라면 언제 무슨 일을 시작해도 이상하진 않지.”
“과거 대공자가 그리 무서웠소?”
“…묻지 말게. '그 이야기'는 장로원에서도 금기(禁忌)나 마찬가지니.”
“굳이 우리가 대공자의 칩거 범위를 지금에 와서 제한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장로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의사 진행 발언 순서가 된 이공자 측의 손(孫) 장로가 발언대에 섰다.
“다들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못 느끼는 분들이 많은 것 같군요.”
그가 사람 좋아 보이는 표정으로, 허허 웃어 보였다.
“이 안건으로 이득을 보는 것은 후계자 계파들에 속한 이들뿐인 것 같소만?”
한 장로의 물음에, 손 장로가 단상에 바짝 다가섰다.
“지금 현재 대공자 연소현의 신분이 무엇이라고 알고 계십니까?”
“그야….”
당연히 대공자라고 답변하려던 장로의 낯빛이 굳었다.
염 장로의 낯빛 또한 마찬가지로 굳었다.
평소라면 그도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근래에 연소현에 대해 조사와 공부를 거듭해 왔기에 알 수 있었다.
“뭔데 그럽니까?”
“누가 설명 좀 해 주시오.”
평소 칩거하던 연소현에 대해서는 관심을 끊었던 장로들을 중심으로 웅성거림이 커졌다.
“염 장로. 저게 무슨 소리인가?”
옆에서 묻는 같은 계파에 속한 동료 장로의 물음에 염 장로가 입술을 달싹였다.
“…잊으셨소? 대공자는 현재 본가의 가주직인(家主職印)을 가지고 있소.”
“그게 왜….”
동료 장로의 얼굴이 굳었다.
단상에 선 손 장로가 점차 묵직하게 가라앉아 가는 분위기에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다들 눈치채셨군요. 엄밀하게 따지면, 그의 현재 신분은 대공자이자 또한 본가의 '가주 대행'입니다.”
“가주 대행?!”
장로들이 웅성거렸다.
“그는 현재 칩거 중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가주 대행은 직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분이기도 합니다. 현재 직위로서의 가주 대행은 '최고 운영 회의'가 수행하고 있습니다만….”
그가 좌중을 바라봤다.
“그렇다고 해서 대공자의 신분이 가주 대행이 아니라고 잘라 이야기 할 순 없지요.”
“저 말이 사실입니까, 집법원주?!”
집법원주(執法院主)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의 억지가 있지만, 대공자가 가주직인을 태상가주께 직접 건네받았다고 알고 있으니. 해석이 틀렸다고 할 순 없소.”
“정식으로 위임받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상관없소.”
장로 하나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학술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소! 실제로 그가 그리 주장을 한다고 해서 누가 그것을 받아들이겠소?!”
소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다수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보시오.”
고개를 저었던 장로 하나가 입을 열었다.
“만약 대공자가 지금처럼 활동을 통해 충분히 힘을 키운 다음, 자신이 정당한 가주 대행임을 주장하면 어떻게 되겠소?”
“최고 운영 회의가 판단을 하지 않겠는가?”
“만약 최고 운영 회의가 대공자가 가주 대행임을 부정하고, 대공자가 그것이 태상가주의 뜻이 아니라고 하면서 불복하면?”
순간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단어가 떠올랐다.
내전(內戰).
염 장로 또한 침음했다.
한층 더 무거워진 분위기에 단상에 서 있던, 손 장로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다들 심각성을 깨달으셨겠지요?”
그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진해졌다.
“어째서 본 장로 회의가 대공자의 칩거에 대해서 명확한 제약 사항을 걸어야 하는지, 그 또한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 * *
잠시간의 휴회(休會)가 선언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간의 휴회였기 때문에 누구도 이 대회당에서 나갈 수는 없었다.
“애초에 왜 아직도 대공자가 가주직인을 가지고 있는 것이오?”
“누구보다 얌전하게 칩거하는 대공자였으니, 그런 것이 아니오?”
"...그것보다는 아무도 회수할 수 없었다가 정확한 말이 아니겠소.”
“최고 운영 회의가 태상가주님의 이름으로 회수하려 했다면, 진실을 아는 이들을 중심으로 반발이 크게 일어났을 것이고….”
“만약 억지로 밀어붙였다고 하더라도, 가법상에 검가금인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가주'와 '가주에 의해 허가를 받은 대상'뿐이오.”
“...태상가주님도, 현재의 가주 대행인 최고 운영 회의도 해당하지 않는군.”
누군가가 혀를 찼다.
“미친. 이제까지 우리는 진천뢰(震天雷)를 깔고 앉아서, 그 위에서 졸고 있었군.”
"아니, 애초에 태상가주께서 대공자에게 마지막으로 내렸던 명령을 어길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겠소?”
회의가 다시 시작되자, 여기저기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당장 대공자의 칩거 범위를 제한해야 하오!”
“정확히는 검가법전에 칩거라는 용어를 새로 추가하고, 정립해야겠지.”
“당장 표결을 시작하시오!”
하지만 잠자코 있는 이들도 많았다.
이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감찰부주(監察部主) 또한 그들 중 하나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소용없을 것이오.”
좌중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침착하게 지켜보던 장로원주 또한 동의를 표했다.
“그의 말이 맞아. 본가의 가주는 가법보다 위에 있지. 그것은 가주 대행도 마찬가지요.”
호법원주와 집법원주도 동의했다.
“동의하오.”
“이 문제가 본관의 법정까지 오면, 본관도 같은 판결을 할 수밖에 없소.”
“그렇게 되면 오히려 현재까지 애매한 대공자의 위치를 확정하는 것을 돕는 꼴이 되겠지.”
이공자와 삼공자 계파의 장로들이 일제히 그들에게 비난의 외침을 날리기 시작했다.
“정숙! 정숙하시오!”
진행을 맡은 장로의 외침도 소용이 없었다.
"아가리 여물고 조용히 하라고 이 버러지 같은 새끼들아!”
장로원주가 책상 위에 올라서서 고함을 치자, 그때야 목소리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내전을 막기 위한, 방법은 한 가지뿐이군.”
그 목소리는 혼잣말처럼 작았지만, 모두의 입을 다물게 하는 데에는 중분했다.
대회당이 고요해지자, 원로와 마찬가지의 대우를 받는 내원총관(內院總管)이 말을 이었다.
“이 문제를 '최고 운영 회의'로 올리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