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78화 (78/350)

제3편 최악의 가정(假定)

잠시 후, 문이 굳게 닫혔고, 책임 책사들은 전부 앞자리로 이동해 앉았다.

노인은 단상에 급히 마련된 의자에 앉아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주군(主君)께서 직접 주관하신 장로급 회의에 참석하고 오는 길이네.”

낙양검가의 장로가 이공자를 주군이라고 일컬었지만, 이 자리에서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이는 없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평소와는 다르게 자네들이 그 자리에 함께하지는 못한 것이니 부디 양해들 해주게.”

작은 신장의 책사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아닙니다. 양해라니요, 말씀이 과하십니다."

“손(孫) 장로님.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허락하네.”

한명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책사들이 접할 수 있는 정보가 제한되면, 전체적인 시야가 부족해집니다. 그리고 일을 진행함에 있어 단계가 많아지면, 즉각적인 대응이 어려워집니다.”

책사들은 불만스러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침묵으로 한명휘에게 동조했다.

손 장로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자네들에게 직접 와서 함께하는 것이 아닌가?”

한명휘가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감사한 일이오나, 요즘 주군의 세(勢)가 부쩍 커지며, 조직이 경직되어 가고 있는 징후가 포착되고 있습니다.”

손 장로가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혁신을 위해서 자네들을 더 높은 위치로 끌어올려 달라?”

“…욕심인 줄은 알고 있습니다만.”

“욕심이라 치부할 것이 아니라, 훌륭한 야망이 아닌가? 야망은 언제나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훌륭한 원동력이지.”

인자한 인상의 손 장로가 허허하고 웃었다.

“자네들의 마음은 잘 알았으니, 우리 처지도 좀 이해해 주게나.”

그의 허옇고 긴 눈썹 아래로, 깊은 눈동자가 한명휘를 직시하고 있었다.

“이미 자네들이 알고 있는 본가의 기밀만 해도, 우리를 충분히 곤란하게 하는 참이니.”

한명휘의 등이 대번에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물러날 시점이었다.

“…사안이 한시를 다투는 시점에 헛소리를 늘어놓아 죄송합니다.”

“아닐세. 아닐세. 이런 이야기는 언제든지 환영이구먼.”

손 장로가 작은 신장의 책사에게 물었다.

“우리의 훌륭한 책사들의 논의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노부도 좀 알 수 있겠는가?”

“예. 저희 책사들은 내원에서의 사건이 대공자가 이어 갈 행보의 첫 초석이라는 점을 어느 정도 합의하고, 앞으로의 대처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던 중이었습니다.”

“역시 훌륭하군!”

손 장로가 손뼉을 치며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논의의 방향이 너무 많은 곳을 향하고 있어, 좀 좁힐 필요가 있겠구먼 어디 이 노부가 방향 하나를 제시해 보아도 되겠는가?”

“손 장로님의 말씀을 경청하겠습니다.”

모든 집사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허허, 고맙군.”

손 장로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자아. 대공자와 관련하여, 우리가 반드시 막아야 할 최악의 상황은 무엇인지 가정해 보게나.”

모두가 침묵을 지키자 손 장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떻겠나? 자네들이 대공자라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전략일지 구상하겠지?”

한명휘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대공자라면 가지고 있는 검가금인을 최대한 활용하려 할 것입니다.”

“그렇지. 검가금인(劍家金印)은 본가 가주의 무한한 권력을 상징하는 물건이지.”

최 책사도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검가금인을 휘두르는 것은 대단히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경쟁자들로부터 권한 남용의 죄로 고발을 당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연소현은 종잇값이나 책값 따위를 치르는 곳에나 사용할 뿐.

그동안 거창한 일에 가주직인을 사용했던 적이 없었다.

“그렇네! 그렇다면….”

다른 책사들도 하나둘씩 끼어들기 시작했다.

“현 상태에서 가주직인을 마음대로 사용하려면 너무나 거창한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검가의 권력자들이 납득을 쉬이 할 리가 없습니다.”

“애초에 모든 이들을 납득시켜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저 충분히 세력을 모을 정도만 되면….”

“세력을 모으기 위해서 가주직인을 내세워 봐야, 얼마나 모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세력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굳히는 곳에 가주직인을 사용해야겠습니다.”

“아까도 이야기가 나왔지만, 결국 선을 밟아 나가며 활동 범위를 넓히고, 명성을 알리는 것으로 세력은 모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세력을 모은 후에….”

“하지만 후계자 선정까지 충분한 시간이….”

논의가 격렬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논의가 충분히 진행되자, 손 장로가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자아, 그럼 이제 이 노부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여러분에게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네.”

좌중의 시선이 손 장로에게로 모였다.

“대공자는 첫째로 칩거 명령의 허점을 이용해서 내외부의 활동을 통해 명성을 키우고.”

그가 손가락 두 개를 폈다.

“둘째로, 그렇게 모은 명성과 세력을 바탕으로 가주직인을 내세워, 자신이 검가의 정당한 가주 대행(家主代行)임을 주장하여.”

손가락 세 개가 펼쳐졌다.

“내원 같은 가주 충성파들의 지지를 얻어, 후계자 선정 단계를 뛰어넘어 가주 대행임을 굳혀 나가는 것이지.”

그가 좌중을 바라보았다.

“어떤가?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가?”

모두가 침묵했다.

손 장로의 가정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만들어 낸 그 전략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나직한 한숨 소리만이 간간이 나올 뿐이었다.

“흠흠."

작은 신장의 책사가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을 뚫고, 겨우 목소리를 냈다.

“…몇 차례, 우리 측이나 삼공자 측 같은 반발 세력과의 대규모 내전을 각오해야 해야 합니다만.”

손 장로가 답했다.

“십 년. 거의 십 년을 칩거해 있던 자가 이제 세상으로 나오려 하면서, 그 정도 각오가 없겠나?”

다른 책사도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가주 충성파가 그 정도 명분만으로 대공자를 따르리라는 것은 막연한 기대가 아닌지….”

손 장로가 입맛을 다셨다.

“그들은 자네들이 봐 왔던 어떤 이들보다도 제정신이 아니네. 논리로써 그들을 이해하려 해선 안 된다네.”

머리를 쥐어짜던 책사가 말을 꺼냈다.

“…일단은 대공자 측에 이런 전략을 짜낼 인재가 있어야 성립하는 가정이긴 합니다.”

손 장로가 그를 바라봤다.

“대공자가 단독으로 이 전략을 충분히 수립할 능력이 있음을 내 장담하지. 어쩌면 대공자는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한 모든 과정까지도 혼자서 그려 낼 수 있을 걸세.”

다시 한번 거대한 충격이 책사들을 휩쓸었다.

“그가 삼공자 측의 좌(左), 우(右) 대군사(大軍師)와 같은 급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아마도.”

책사들의 입이 닫혔다.

손 장로는 그런 그들을 보며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과거의 대공자를 아는 나 같은 인물들이, 이제까지 자네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에는 다 이유가 있으니 이해해 주게."

“…저희도 은밀한 소문이나 감춰진 이야기들은 몇 번 들어 왔습니다만.”

“대공자의 과거에 대한 소문들이 그저 과장된 이야기라고 여겼겠지만, 아니라네.”

이제 다들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눈을 질끈 감고 있던 한명휘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 모든 논의가 제가 쓴 보고서에서 시작되었습니다만.”

“대단히 훌륭한 보고서였네. 주군도 몇 번이나 감탄했다고 하시더군.”

그 말에도 한명휘는 전혀 들뜬 기색이 없었다.

“감사합니다만, 지금은 그저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군요. 혹시 제가 썼던 논리들이 지나친 확대해석에 불과하고, 일련의 일들은 그저 우연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손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자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우주의 섭리에 지배받는 존재이니, 그의 삶이라 하여 우연이 없을 리가 없지. 하지만….”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행동에는 우연이 존재하지 않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낸 그의 행적만으로는….”

손 장로가 손을 들어 보였다.

“들은 바에 의하면, 대공자가 합동 수사본부에서 내원 전체에 대한 조사를 요구했다더군. 거절당하긴 했지만.”

“…사건을 더 키울 생각이었던 것이군요.”

“자신이 돌아왔음을 더 많은 이들에게, 더 크게 알리고 싶었던 것일 테지.”

한명휘 또한 결국에 침묵했다.

“이제 내가 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라고 했었는지 다들 이해하겠는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손 장로는 그것이 이들이 절망했기 때문임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진정한 책사들은 칼이 목 아래 파고드는 와중에도, 살아서 빠져나 갈 궁리를 멈추지 않는 이들이었으니.

그들이 자신의 세계에 빠져 머리를 굴리는 동안, 손 장로는 문을 열고 대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돌아온 그는 일단의 하녀들과 함께 였다.

그녀들은 빠르게 냉차(冷茶)와 다과를 책사들에게 분배하고, 대회의장을 빠져나갔다.

한명휘는 냉차 한 잔을 단번에 들이켜고, 주전자를 기울여 다시 한 잔을 더 들이켰다.

“…대공자가 그렇게 최악의 상대라면, 애초에 그가 움직일 '말'을 주지 않아야 합니다.”

최 책사는 다과를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전략이 가주직인의 소지를 가정하고 있다면, 가주직인을 빼앗아야 합니다.”

“아니면 애초에 후계자로서 자격을 박탈해 버리든가….”

손 장로가 미소 지으며 그들을 거들었다.

“우리가 직접 감히 가주의 상징인 검가금인을 건드릴 수는 없지. 후계자 자격 또한 마찬가지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나?”

작은 신장의 책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암살?"

“성공 가능 여부를 떠나, 예전과는 다르게, 이 시점에서는 너무 부담이 큰 방법이군. 삼공자 측은 납득할지 몰라도, 본가의 대부분은 크게 반발할 걸세.”

다른 책사가 입을 열었다.

“현재 상황에서 대공자의 칩거 명령을 검가의 장로 회의(長老會議)에서 건드릴 수 있습니까?”

“어떻게 건드린다는 겐가?”

“장로 회의는 '법을 만드는 조직'이기도 하지요. 칩거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이 기회에 만드는 것은 어떻습니까?”

한명휘가 벌떡 일어났다.

“맞습니다! 이번 대공자의 행위로 인해서, 우리에게 명분은 충분합니다!”

손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를 원각정 안에 가두어, 가주직인을 내세울 빌미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군. 좋아! 아주 훌륭해!”

다른 책사들도 연이어 문제를 지적하고, 대책을 수립하는 것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의외의 변수가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일단 가주직인 자체가 변수가 될 가능성이 있겠지요.”

“그렇다면 거기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겠습니다.”

“거기에 대해 자네들이 알아야 할 사항이 있네.”

그들의 회의는 거침없이 이어졌고, 어느새 깊은 밤이 되어서야 끝났다.

“자, 모두 지금 시간까지 고생많았네.”

여전히 활기로 가득한 손 장로가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체력이 바닥난 책사들도 덩달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자네들의 고견들을 듣고, 최악의 상황을 막을 책략을 수립할 수가 있어서 노부는 기쁘기 그지없다네. 그렇다면 자네들은 쉬도록 하게.”

그가 자신의 벗어 둔 외투와 문서들을 집어 들었다.

“노부는 지금부터 주군께 이 책략을 보고드리러 가 보겠네. 자, 그럼.”

다들 피로가 가득한 얼굴로, 흐느적거리며 일어나 그에게 인사했다.

“…손 장로님.”

그가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때, 그의 뒤를 따른 한명휘였다.

“오, 한 책사. 아직 용건이 남았나?”

“혹시....”

한명휘의 지쳤지만, 형형한 시선이 손 장로를 향했다.

“저희가 오늘 세운 대책. 이미 오늘 있었던 장로급 회의에서 나왔던 것이 아닙니까?”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자네?”

손 장로가 크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런 훌륭한 계책을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흉내나 낼 수 있을 것같은가?”

손 장로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으며 걸어 나갔다.

문이 닫히자, 뒤에서 최 책사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말했다.

“…무슨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무리에 같은 주제를 던져 놓고, 거기서 나온 결과를 합친다.

그렇게 해서 계획에 만전(萬全)을 기하는 방식은, 그들 또한 수하들을 상대로 즐겨 사용하곤 했다.

“화가 나는 점은….”

작은 신장의 책사가 옷자락에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우리 전체가 한나절이 넘게 걸린 일을, 저 노인네들은 불과 한 시진 만에 했었단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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