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77화 (77/350)

제2편 선(線)과 경계(境界)

염 장로가 지친 기색이 완연한 무사장(武士長)에게 물었다.

“그래. 어땠나?”

무사장이 의자에 주저앉으며, 혀를 내둘렀다.

“아오, 말도 못 합니다. 한동안 본가의 공개 석상에서 못 보던 극형들이 아주 그냥 쏟아져 나오는데….”

염 장로가 그 거대한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재판을 맡은 황보(皇甫) 장로가 간만에 신이 난 모양이군.”

“신이 두 번만 났다가는, 본가의 무사들도 제정신으로는 못 볼 꼴이 펼쳐질 겁니다.”

무사장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일벌백계의 효과가 있지. 데리고 간 애들은 어떻게 반응하던가?”

무사장이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제가 이렇게 지친 것을 보시고도 모르시겠습니까? 수습 무사 놈들은 어떻게든 제 발로 걸어왔는데, 문사란 것들은….”

염 장로가 껄껄 웃었다.

“이제 그놈들도 대공자를 얕보는 소리는 절대 못 하겠지.”

“그건 확실합니다.”

무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는 길에, 심지어 '대공자가 내원의 집사들이 책값을 안 내줘서 전부 죽여 버렸다'는 이야기까지 들어 보았습니다.”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적어도 앞으로 아랫것들 입에서 무검자 어쩌고 하는 말은 절대 안나올 것 같습니다.”

염 장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또 소문이라고?”

무사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염 장로를 올려다봤다.

“이 정도의 일이 있었으니, 별의 별 소문이 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염 장로가 뒤로 몸을 기댔다.

“…기분이 이상해. 아무래도 대공자의 노림수가 아직 끝나지 않은것 같군.”

“노림수요?”

“참모들을 전부 불러 모아라.”

* * *

낙양검가, 이공자 진영.

대회의실.

정례 회의를 위해 대기하던 젊은 문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 주제는 당연하게도, 대공자에 대한 것이었다.

얼굴에 여드름이 숭숭 난 문사가 운을 뗐다.

“야. 책값 소문 들었냐?”

“당연히 들었지. 무검자가 폭발해서 감찰부를 동원해서 내원을 탈탈 털어 버렸다던데?"

“호법원에서도 두 개 부가 나섰다더라. 그냥 하룻밤 만에 작살을 내 버렸네.”

“아침부터 중앙 광장에서 피바람이 거하게 불었지.”

“저기 저 친구 봐 봐. 아까 중앙광장 근처를 지나왔다던데, 아직도 얼굴이 새하얗군.”

“아, 미친…. 이걸 어떻게 불러야 하냐? 책값 분노 사건? 책값 대학살?"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젊은 문사들이 한쪽에서 대화 중이었다.

“결국에 그 무검자도 본가의 정당한 직계혈족이니. 예견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어, 우리 측에서는 별로 할 수 있던 것도 없었다고 하더군.”

“정보 관련 인원들만 죽어 나가고 있다고 하던데. 요즘 퇴근도 못 하고 있다고 들었네.”

다른 쪽에서는 중년에 가까워 보이는 문사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현재 대공자는 태상가주님의 명으로 칩거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오? 이런 일을 저질러도 괜찮은 것이오?”

“그런 문제라면 위에서 어련히 알아서들 하시지 않겠소.”

“…게다가 엄밀히 논하자면, 굳이 대공자가 칩거를 어긴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하오.”

“하긴. 이 검가가 전부 자기 집인데, 무슨 문제가 있겠소?”

“…자기 집에서 생긴 문제를 처리한 것뿐, 이라는 논리인가.”

그때 대회의실의 앞문이 벌컥 열리자, 좌중이 조용해졌다.

열린 앞문으로 긴 수염의 책사 하나가 급히 모습을 드러냈다.

“자! 다들 이 회의실을 비우게! 어서!”

그의 말에 다들 작은 목소리로 구시렁거리며,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책사 어르신.”

“뭔가?”

앞쪽에 중년 문사 하나가 예를 표하고 입을 열었다.

“여기는 곧 정례 회의가 있을 예정이었는데, 무슨 급한 일이 있으신 겁니까?”

“지금….”

긴 수염의 책사가 그를 향해 입을 열어 대답하려고 하는 순간.

책사들이 앞문으로 쏟아져 들어 오기 시작했다.

“이 애들은 다 뭔가?! 자네 아직도 회의실 안 비우고 뭐 하고 있나?!”

어느 책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문사들이 허겁지겁 짐들을 안아 들고, 뒷문으로 달렸다.

“히익, 최 책사님이다…!”

“한 책사님도 계셔!"

“달려! 달려!”

순식간에 썰물 빠지듯, 대회의실이 비었다.

“앞문, 뒷문 할 것 없이 전부 통제해! 아예 전각 자체를 통제하란 말이다!”

무사들이 우르르 통제를 강화하는 동안, 낮은 서열의 책사들이 서둘러 대회의실을 정리하고, 필요한 기밀문서와 보고서들을 자리에 앉은 이들에게 돌렸다.

“저, 저기 차는 어찌 준비하면….”

대회의실을 책임지는 집사의 물음에 최 책사가 벼락같이 고함을 내질렀다.

,,아까 전각을 통제한다는 말을 못 들었나?! 너희도 당장 전부 이 전각에서 나가란 말이다!”

최 책사가 집사의 눈앞에서 앞문을 쾅 하고 닫았다.

뒤에 앉은 책사 하나가 옆의 책사에게 히죽거리며 속삭였다.

“저 양반, 사공자 건으로 탈탈 털리더니 요즘엔 온 동네에 화풀이를 하고 다니나 보군.”

“원래도 성격이 개차반이었는데 이제는 누가 말리지도 못하겠어. 저 양반 사단에 속한 애들이 요즘 전부 강남(江南)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더군.”

최 책사가 입에서 불을 뿜었다.

“다들 정숙하지 못하겠나?!”

그의 일갈과 함께 긴급회의가 시작되 었다.

작은 신장의 책사가 단상에 서서 진행을 시작했다.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설마 대공자의 행보에 문제를 못 느낀 사람은 없겠지.”

그가 서류 하나를 들어 보였다.

“아직 한명휘 책사의 긴급 보고서를 읽지 못한 이들은, 지금이라도 내용을 확인하도록 하게.”

그때까지 일말의 여유가 있던 책사들의 얼굴에도 진지함이 깃들었다.

* * *

“삼공자 측의 반응은 어떤가?”

삼공자를 담당하는 책사 집단 중 하나가 앉은자리에서 대답했다.

“그쪽도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긴급회의를 시작한 것으로 보이오. 우리만 심각하게 여기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지.”

다른 책사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전에 돌던 소문, 대공자가 사공자와 함께 사업 하나를 진행한다는 이야기도 확인을 해 보아야 하지 않겠소?”

“하지만 사공자 측에 붙여 놓았던 귀들이 전부 떨어져 나갔으니….”

"안에서는 힘들지만, 여전히 검가 외부에서 사공자 사업 진행에 대한 동향을 감시하던 인력들이 있었지 않습니까?”

책사들의 시선이 최 책사를 흘끔거렸다.

최 책사가 부들부들 떨며 입을 열었다.

“그런 눈으로들 보지 마시오! 현재 그들은 대공자 소문을 추적하거나, 내원 사건으로 전부 돌려놓은 상태니까.”

작은 신장의 책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전부 회의에서 결정했던 사안이었으니 넘어가는 것이 좋겠군.”

“일단 의도가 중요합니다. 왜 이 런 시기에 대공자가 행보를 시작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겠지요.”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던 이유도 여러 측면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소.”

“솔직히 지금에 와서 대공자가 후계자 경쟁에 뛰어들어 무슨 이익이 있다는 말입니까?”

“애초에 승산이 있기는 있소?”

“저희가 계산해 본 바에 따르면, 대공자의 승산은 사실상 전무(全無)한 것으로 예측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대공자에 대한 소문 공작을 강화해야 합니다. '무검자'라는 악명을 더욱 적극적으로 퍼트려야...”

“그런 것 따위, 오늘 중앙 광장에서 극형 행렬이 시작된 이후부터 아무런 대책이 되지 못하네.”

“원각정에 근래에 새로 합류한 시녀들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내원에서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그녀들이 배후에 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라고….”

“고작 치맛바람이라고? 자네 항주(杭州)로 휴가를 다녀오더니, 거기 정신을 두고 왔나?”

“뭐야?!”

한동안 토론이 격렬하게 이어졌다.

서열이 낮은 책사들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서열이 높은 책사들은 그들의 토론을 참고하기도 하고, 때때로 토론 방향을 수정해 주기도 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본 책사가 한마디 하겠소.”

한명휘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좌중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이 모든 일은 대공자에게 내려진 태상가주의 명이 '칩거'라는 애매한 형태였기 때문에 생긴 것이오.”

최 책사는 그런 한명휘를 고깝게 바라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하는 바요. 칩거는 검가법전(劍家法典)상에서 법률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형태의 징계이지.”

다른 상급 서열 책사도 입을 열었다.

“애초에 징계(懲戒)라는 해석도 임의적인 것에 불과하오. 정황상, 칩거를 굳이 '명령'했다는 점에서 해석한 것일 뿐.”

한명휘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대공자는 지금 선(線)을 밟아 보는 중'인 것이라, 본 책사는 판단하는 바요.”

“선이라….”

상급 서열 책사 하나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칩거라는 것이 법률적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행보를 시도해 보는 중이라는 것인가…?”

“그것보다 정확히 하자면, 선을 밟아 나가면서 활동 경계를 확대해 나갈 의도가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을 것이오.”

잠시 회의장이 침묵 속에 잠겼다.

작은 신장의 책사가 단상을 두드렸다.

“…그 해석이 맞는다면, 대공자의 내원 사건은 시작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맞겠지. 하지만 아직은 더 많은 시각으로 접근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하오.”

한명휘가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공자의 행보를 제어할 명분을 잃게 될 것이오.”

다른 상급 책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대응을 시작하면, 검가 내에서라도 막을 수 있을지 모르지. 하지만 그가 낙양으로 나선 이후라면? 하남성 전체로 활동 범위를 넓힌 이후라면?”

“결국에 그가 장강(長江)을 건널 때는 무슨 명분으로 막겠소?”

“그렇다면 애초에 그가 활동을 못 하도록 강제해야 하지 않겠소?”

“아예, 후계자 자격을 박탈하거나?”

회의장이 한바탕 시끄러워졌다.

그때 서열이 낮은 책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대공자가 그렇게까지 날뛴다면, 칩거 명령을 내리셨던 태상가주가 그를 직접 막지 않겠습니까?”

상급 책사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뭔가를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그것에 대해 말을 하는 이는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책사는 이공자 진영에서 기밀을 취급할 자격이 있었지만, 낙양검가의 기밀 사항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자신의 발언이 이들의 심기를 건든 것인가 싶어, 하급 책사가 당황했다.

“죄, 죄송….”

그때 앞문이 열리며, 탄탄한 체격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모든 책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예를 표했다.

신장이 작은 책사가 단상에서 내려와 그에게 대표로 인사했다.

“본가의 장로님을 뵙습니다.”

노인이 손을 들어 인사들을 받아주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미안하구먼. 책임 책사급만 남고, 다들 전부 자리를 비워 줄 수 있겠는가?”

본격적인 회의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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