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76화 (76/350)

제1편 소문(所聞)의 결과

개문(開門)을 알리는 수문무사(守門武士)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함께, 내원의 정문들이 일제히 개방되기 시작했다.

갖가지 악기를 든 의전집사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악기를 연주했다.

갖은 깃발을 든 기수들이 대공자와 시녀들의 뒤를 따랐다.

개중 가장 커다란, 낙양검가의 대공자를 상징하는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모든 이들이 절도 있게 움직이는 와중에 대공자 특유의 휘적거리는 걸음걸이가 눈에 띄었다.

“내원의 최고위층들이 개문식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육부장의 시선이 내원 본관 앞에서 도열한 내원의 최고위층들을 향했다.

“그럼 저들은 무슨 이유로…?”

* * *

낙양검가, 이공자 진영.

새벽 태양 빛이 날카롭게 벽면을 가득 채운 서류들을 비추고 있었다.

“내원총관과 무검자라니….”

이공자의 책사, 한명휘는 자신의 추론 결과를 몇 번이고 되짚어 보고 있었다.

“내원총관은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강한 의혹이 깃들어 있었다.

“…도대체 무검자가 어째서?”

그때 그의 측근 하나가 열려 있는 그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어, 방금 이상한 보고가 하나 들어왔습니다.”

한명휘는 대답이 없었지만, 측근은 평소대로 보고를 했다.

“대공자가 내원을 떠나는데, 개문식을 했다는군요.”

별것 없는 보고에 생각을 방해받은 한명휘가 인상을 썼다.

“그게 뭐가 이상하다고 나한테까지 보고를 하는 것이야?!”

측근이 찔끔하며 급히 보고를 이어 나갔다.

“그, 그런데 내원의 최고위 인사들이 나와서 개문식에 참석했답니다.”

“그것이 뭐가…?!”

역정을 내려던 한명휘의 행동이 멎었다.

“원래 그들이 참석하게 되어 있던가?”

한명휘가 관심을 드러내자 측근이 급히 나머지 내용을 전달했다.

“소식을 전해 온 자에 의하면, 아니랍니다. 게다가 그들은 개문식이 시작하기 전에 대공자와 담소를 주고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반신반의하면서 보고를 마쳤다.

“간간이 웃음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입니다.”

보고를 마친 측근이 한명휘의 눈치를 살폈다.

“당장 오늘 새벽까지 내원을 뒤집어 놓은 주범인 대공자와 담소를 하고 분위기가 좋았다니…. 정보원의 신뢰도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일단은 추후에 다른 정보원으로부터 확인을 다시 해 보겠습니다.”

“…아니다.”

"예? 재평가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한명휘가 서류로 가득 찬 벽면을 보며 입가를 떨었다.

“그 보고가 확인해 볼 필요도 없이 사실일 것이라는 말이다!”

“아니, 그게 어째서….”

한명휘에게 물으려던 측근이 입을 다물었다.

한명휘의 기색이 심상치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러면 모두 말이 되는 것이지. 말이 돼!”

그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 밑의 책사들을 모두 불러 모아! 당장! 외부에 있는 놈들까지 전부 들어오라고 해!”

“예, 예! 알겠습니다!”

측근이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홀로 남은 한명휘는 벽면을 향해 다가갔다.

이제 모든 것이 끼워 맞춰지고 있었다.

“그래…. 무검자 놈 아니, 대공자 연소현.”

그가 연소현을 부르는 명칭이 바뀌었다.

과거 어린 대공자를 가장 가까이서 보던 이들이 누군가?

여럿을 댈 수 있겠지만, 그중 가주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필하는 내원이 빠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고위 인사일수록 태상가주와 그리고 대공자와 가까웠을 것이다.

그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동안 죽은 듯 지내 왔던 대공자의 얼굴을 보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것도 대공자가 방문했던 어제가 아니라, 오늘 개문식이라는 명분까지 만들어서?

“그놈들, 내원 최고위의 미치광이들은, 제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서 모여든 것이야! 바로….”

그는 그 순간, '대공자가 칩거를 끝낼 것'이라던 소문의 출처까지도 알 수 있었다.

“이 가문에 또 한 명의 후계자가 등장하는 순간을 직접 보기 위해서!”

그는 절규하듯 외쳤다.

“혹시나 자신들이 섬기게 될지도 모르는 이를 직접 보고 싶어서!”

그가 발작하듯 외쳤다.

“이번 사건이! 이번 사건의 전부가! 대공자 그놈의 출정식(岀征式)이었어!”

* * *

우아한 궁장으로 몸을 감싼 노부인, 의전비서는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는 저 멀리 마지막 문을 나서는 대공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닫히는 마지막 순간, 돌아본 대공자와 시선이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환히 미소 지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자신은 확신했다.

그리고 그들 중 분명 몇몇은 그녀와 같은 생각을 공유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그런 이들에게 있어, 개문식 따위가 아니었다.

이것은 대공자 연소현의 귀환을 알리는 환영식이었다.

'잘 돌아오셨사옵니다, 도련님.'

그녀의 시선은 문들이 전부 닫힐때까지, 그곳을 향해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언젠가 도련님을 섬기는 날이올 것을, 이 파파(婆婆)는 확신하고 있사옵니다.’

과거 어린 연소현의 전담 집사였던 노부인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왔다.

* * *

세쌍둥이 시녀들의 기분은 하늘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원각정에 다다른 지금은 아무도 뒤를 따르지 않았지만, 개문식을 하던 그 순간만큼은 그녀들이 꿈꿔오던 그 순간이었다.

“정말로 낙양검가의 대공자를 섬기는 시녀들에게 어울리는 순간이 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어서 여러분도, 이제부터 개문식을 하도록 하세요!”

“깃발도 이렇게 들고! 나팔도 불고! 척척 발맞춰 걸으면서!”

원각정의 정문을 지키던 특임대원들이 당황해했다.

“아, 아니, 소저(小姐)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요?”

“개문식이라니? 그게 뭔지 아는 사람 있나?”

하나같이 중년인 그들은 이 딸뻘의 소녀들에게 유난히 약했다.

그때 탈명귀검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개문식이고 뭐고, 아무래도 좋은데….”

그가 원각정의 숲길을 가리켰다.

“대공자님은 벌써 시녀장과 함께 들어가셨소.”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세쌍둥이 시녀들이 꺅꺅거리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깐!”

그의 외침에 삼령이 돌아봤다.

“그 선 밟기 말이오. 대공자께서 '선을 밟으러 간다'고 하셨던 것. 그게 대체 뭐요?”

삼령이 어깨를 으쓱였다.

“주인님께서는 그저 이제 선을 밟았으니, 알아서 움직이게 될 것이라고 하셨어요.”

* * *

얌전히 주인의 뒤를 쫓던 정아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

“음?”

“어제 감찰조사원 강호에게 말씀해 주셨던 것들 말이옵니다.”

“아. 그게 왜?”

정아의 내리깐 눈이 반짝였다.

“내원에서의 노림수들은 훌륭하셨사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이번 사건 안에서의 노림수만을 말씀해 주셨던 것이 아니옵니까?”

연소현의 발걸음이 멎었다.

“…역시, 시녀장의 눈을 속일 수는 없군.”

그가 정아를 돌아보았다.

“이제부터 우리 손에서 벗어난 일들이 재미있게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야.”

그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였지만, 어째서인지 정아는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 * *

낙양검가, 중앙 광장(中央廣場).

정오까지 한 시진을 앞두고, 많은 이들이 중앙 광장에 자의(自意)로 혹은 타의(他意)로 모여들었다.

원각정의 시녀장, 정아에게 괜한 시비를 걸었다가 재교육을 명받았던 수습 시녀들도 이 자리에 있었다.

그것은 교육의 일환이었다.

그녀들의 교육을 담당한 집사부의 교육집사가 그녀들을 이곳으로 데려왔던 것이었다.

'어머, 들으셨어요? 지금 우리가 참관하러 가는 재판이 바로 그 대공자의 서적값과 관련된 재판이래요.’

'어머, 어머. 남사스럽게 그런 것을 굳이 공개재판까지 한단 말인가요?,

'우리 가문이었다면 조용히 처리했을 터인데요.'

'이걸로 그 원각정의 시녀장이라는 여자는, 또 한 번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네요.'

'그러게요.’

출발 전까지 그런 잡담을 즐겁게 나누던 그녀들이었다.

그랬던 그녀들이 지금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귀를 틀어막고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그마아안! 그마아아안!”

형틀에 묶인 여인, 서문집사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는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온몸을 뒤틀었다.

그녀의 비명에 공개재판을 이끌던 집법관(執法官)이 내공으로 가득한 호통을 쳤다.

“저 계집이 아직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못했구나! 집법사자는 뭘 하고 있는가?!”

그의 호통이 광장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얼굴에 기괴한 화장을 한 집법관의 모습은 방금 지옥에서 올라온 판관을 떠오르게 했다.

교육집사가 수습 시녀들을 다그쳤다.

“수습 시녀들은 감은 눈을 열고, 귀를 막은 손을 당장 떼라!”

수습 시녀들 뒤에 서 있던, 집사부의 시녀들이 움직였다.

그녀들은 수습 시녀들의 고개를 강제로 들게 하고, 고개를 들어 눈을 뜨고 억지로 보게끔 했다.

교육집사가 그런 그녀들을 둘러 보았다.

"기억해라! 저것이 본가의 지엄한 법도를 어기고, 감히 대공자님을 우롱하여 본가의 기강을 무너뜨린 자들이 맞이하게 되는 최후의 모습이다!”

번쩍거리는 화려한 복장에 얼굴에는 무시무시한 화장을 그려 넣은 집법사자들의 손이 움직였다.

“끄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과 함께, 서문집사의 가죽이 산 채로 벗겨져 나가고 있었다.

무자비한 손놀림이었다.

"우우욱...!"

수습 시녀 중의 몇몇이 구토를 했지만, 집사부 시녀들은 놓아주지 않았다.

홀러내린 토사물이 그녀들의 앞섶을 더럽혔다.

서문집사의 옆에서는 다른 이의 형벌이 집행 중이었다.

“아아아!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목이 찢어져라, 비는 것은 다름 아닌 방 집사였다.

“좋다! 아주 잘 뉘우치고 있구나!”

높은 단에 앉은 집법관이 제법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태도로 네 목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네 죄를 뉘우치도록 해라!”

집법사자가 공포에 질린 그녀의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끓는 물을 그녀의 하체에 부었다.

그녀의 입에서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났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쇠로 만든 빗을 든 집법사자가 그녀의 익은 살결을 그대로 벗겨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유해(遺骸)라도 모시고 돌아갈 생각으로 나온 방씨 가문의 하인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집법관이 그런 그들을 향해 호령했다.

“너희 방씨 가문의 하인들은 돌아가 전해라! 가문의 몇몇 인물들이 본가에 몸담고 있다 하여, 감히 청탁을 넣은 대가가 무엇인지!”

하인들이 무너지듯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 자리에서 똑똑히 보고 듣고 전하도록 하여라! 감히 본가의 기강을 어지럽힌 죄인의 최후가 어떠했는지!”

그녀들 말고도, 서문집사 아래있었던 이들이 전부 극형(極开。을 선고받았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비명을 내 지르며, 지독한 형벌을 온몸으로 치러 내고 있었다.

중앙 광장에 자의로 타의로 모여든 이들은 그 광경을 두려워하며, 공포에 떨며, 지켜보고 있었다.

몇몇은 죄인들을 조롱하거나, 손가락질하기도 했으며, 비웃기도 했다.

서문집사는 결국 가죽이 모두 벗겨져, 중앙 광장의 입구 중 하나에 깃발처럼 내걸렸다.

방씨 가문의 하인들은 살이 모두 벗겨지고, 목이 잘려 나간 아가씨의 몸통만을 들고 귀환했다.

죄인들의 머리는 고통에 울부짖 으며 죽음을 맞이한 그대로 방부처리되어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에 전시되었다.

그들의 옆에는 그들의 죄목이 낱낱이 적혀 있어, 그곳을 지나는 모든 이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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