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75화 (75/350)

제25편 내원(內院)

내원 본관,

임시 합동수사본부, 지휘실.

호법육부장(護法六部長)이 연초를 물고, 서류를 한 다발 들고 들어왔다.

“부장이 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원래 부장이 이렇게 할 일이 많은 직위였습니까?”

호법일부장(護法一部長)이 결재란에 인장을 찍으며, 피식 웃었다.

“이렇게 위에서 밀어붙이는 수사는 우리까지 직접 나서야 원하는 속도가 나오니까.”

한숨을 쉰 육부장이 자신의 임시 책상에 서류 다발을 내려놓고 앉았다.

“일단 중앙감찰각은 전부 철수했습니다. 관련 서류는 전부 이첩받았고요.”

일부장이 직인을 찍으며, 입을 열었다.

“감찰부에서 최초로 조사를 시작했다는 이를 기억하는가?”

육부장이 연초를 꺼내 물고, 이마를 문질렀다.

“…강(姜) 뭐였는데, 그 말단 조사원 말입니까?”

“감찰조사원, 강호. 기억해 두게.”

“그런 말단을 왜…? 일단 기억해 두겠습니다.”

“그리고 집법원(執法院)에서 연락이 왔네.”

일부장이 방금 전해 받은 문서를 넘겨주며 말했다.

"공개재판 기일을 당장 오늘 오전으로 잡았다고 하더군.”

육부장의 입이 벌어졌다.

“…오늘 오전요?”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였다.

그는 집법원의 문양이 박힌 서류를 넘겨 가며, 인상을 썼다.

“아직 우리는 외부 관련인 조사도, 후속 수사도, 마무리를 못 했는데요?”

그가 서류를 탁 하고 내려놨다.

“이거 적당히 덮고 가겠다는 표현입니까?”

그리고 곧바로 자신이 한 말을 부정했다.

“아니, 그러면 그자들이 공개재판을 추진할 리가 없는데. 그렇다면..?”

일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에 털어서 먼지 나오는 자들을 줄줄이 모두 엄벌에 처하겠다는 뜻이지.”

육부장의 표정이 아연했다.

“…이게 그렇게 큰 건이었습니까?”

일부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집법원은 본가의 기강이 무너지고 있다고 해석한 것일세.”

육부장이 연초에 불을 붙일 생각도 못 하고 침음했다.

“…책값 소문을 들었을 때는 웃고 말았는데.”

그는 어젯밤 일부장에게 들었던 내원총관과 대공자에 대한 전음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호법원의 인원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보고했다.

“대공자께서 돌아가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잠시 머뭇거렸다.

“내원에서는 무슨 개문식(開門式)을 한다고 합니다.”

* * *

일부장은 내려가서 대공자에게 인사를 올리는 대신, 창문을 열었다.

일출(日岀)의 눈부신 햇살과 함께, 차가운 바람이 들이쳤다.

“안 내려가 보십니까?”

일부장이 대답 대신 턱짓으로 창밖을 가리키자, 육부장은 창가로 다가섰다.

임시 지휘실이 본관 삼 층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내원 본관의 안마당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다.

“…안 내려가는 게 낫겠군요.”

안마당에는 직계혈족인 대공자를 환송하기 위한 의전집사들과 의전시녀들로 가득했다.

깃발과 악기를 든 그들의 질서 정연한 모습이 제법 그럴싸했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내원 인사비서(人事祕書), 내원 서무비서(庶務祕書), 내원 보안비서(保安祕書), 내원 외무비서(外務祕書)….”

일부장이 아래를 바라보며 늘어놓는 직위에, 육부장이 마른침을 삼켰다.

“…앞줄은 칠계(七階), 뒷줄은 육계(六階). 내원 최고위층들이군요.”

특히 내원의 칠계 정도 되면, 그들의 업무 성격상 장로 위는 받지 못해도, 사실상 장로 신분이라고 봐야 하는 이들이었다.

일부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현재는 저들이 장로급으로 취급 받고 있지만, 태상가주께서 현역이실 때는 저들의 의지가 가주님의 의지와 마찬가지였지.”

육부장이 밖에서 자신이 보이지 않게, 몸을 적당히 숨기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최고 운영 회의가 태상가주님을 보필하고 있으니까요. 태상가주께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면, 저들도 다시 제 위치를 되찾겠지요.”

“…그렇지.”

일부장은 '의식이 없는' 태상가주가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것이라 여기지 않았지만, 대충 맞장구쳤다.

이제 막 낙양검가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육부장에게는 절대 알려 줄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장로가 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한 낙양검가의 어둠이 얼마나 깊은지.

일부장 자신도 가끔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으니.

"...그나저나 대공자도 대단하군요.”

"그래.”

대공자는 시녀들을 대동하고, 내원의 최고위층과 태연하게 인사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가끔 농담이라도 하는 것인지, 주변 이들의 웃음소리가 임시 지휘실까지 들려왔다.

“...대공자의 농담을 저렇게 태연하게 받아 주고 있는 내원의 최고위층도 그리 제정신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내원을 수사했던 그들조차, 껄끄럽기가 짝이 없어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물며, 고발 당사자인 대공자를 눈앞에서 보는 최고위층은 더욱 불편해야 했지만,

그들 중 누구도 놀란 기색이 남아 있다거나, 겁을 먹거나, 분노하는 이들도 없었다.

“…급작스러운 감찰과 수사로 수하들이 그렇게 잘려 나갔는데.”

호법원에서 잔뼈가 굵으며, 오랜 시간 수사를 통해 경험을 쌓아 온 육부장이었다.

장담하건대, 저 내원의 최고위층들의 얼굴과 몸짓에는 아무런 부정적인 감정이 없었다.

위화감이 육부장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우리로서도 보기 드문 장면이니 잘 봐 두게.”

일부장이 드물게 흥분하는 기색으로 낮게 속삭였다.

“지금 저 모습이 본가에서도 가장 비밀스러운 조직에 속하는 내원의 속성을 한눈에 보여 주고 있으니.”

“위화감을 느낄 뿐입니다만…?”

일부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자네가 지금 느끼는 그 위화감이 바로 진정한 내원의 모습이야. 우리가 이번에 수사하며 보았던 이들은 전부 내원의 이름에 부끄러운 잔챙이들에 불과하지."

“…위화감이 들 만큼 저들이 감정을 잘 꾸민다는 겁니까?”

“아니.”

일부장이 침착하게 설명해 주었다.

“저들은 정말로 신경 쓰지 않는 것뿐일세.”

“…아랫사람이 잘려 나가는 것 정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고요? 그건 권력자들의 특징이 아닙니까?”

일부장이 나직하게 코웃음을 쳤다.

“저들은 같은 최고위층의 동료가 지금 당장 목이 날아가도 신경 쓰 지 않아. 그 자신의 목이 날아가는것 또한 마찬가지지.”

“그게 무슨:"

“내원의 최고위층들은 자신을 그저 하나의 부속으로 여기고 있다네. 내원이라는 조직을 이루는 부속들. 언제든지 대체 가능하고, 언제든지 소모될 각오가 충만한 이들이지.”

일반적인 권력자들이 가진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사상이었다.

“아니, 무슨 그런 미친….”

일부장의 시선이 육부장을 향했다.

“자네는 이 내원의 본관 뒤가 어딘지 잊었나?”

* * *

내원 본관의 뒤, 작은 전각.

절의 본당처럼 넓은 공간에,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노령의 인물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반개(半開)하고 있는 그의 깊은 눈 안에는 일개 범부(凡夫)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깊은 사유와 광기가 교차하고 있었다.

쪽문이 열리고, 허리에 일곱 개의 금실 술을 걸고 있는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원총관님. 봉쇄령이 종료되었습니다.”

내원 종관비서의 목소리에 노인의 두 눈이 완전히 열렸다.

“대공자가 떠난다고 하느냐?”

“예. 본원(本院)은 절차에 따라, 개문식을 진행 중입니다.”

연소현에 의해서 노괴라 불린, 그 내원총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공자가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앞으로 모든 것이 뒤바뀔 것이야.”

“…모두 언제라도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내원총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다. 가위가 부러질지언정, 손을 다치지 않고, 분재가 상하지 않으면, 될 뿐.”

내원총관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나조차도 그저 하나의 가위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그가 일컬었던 '손과 분재'는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그때 한 인원의 목소리가 전각 밖에서 들려왔다.

“약왕(藥王)께서 금일 진료를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내원총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내원 총관비서가 밖을 향해 말했다.

“총관께서 허가하셨으니, 들어오시라 전하거라.”

"예.”

잠시 후, 쪽문이 열리고 꾀죄죄한 인상의 노인이 보따리를 안고 들어왔다.

약왕이었다.

내원총관은 그런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내원 총관비서도 함께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약왕이 나직하게 혀를 찼다.

“자네도 그 나이에 고생이 많구먼.”

내원총관이 미소를 지었다.

“요즘만큼 어르신의 그 끝 모를 정력(精力)이 부러울 때도 없습니다.”

“…'그놈'이 움직이기 시작하니, 힘이 부쩍 부치는 게지?”

내원총관이 그저 쓴웃음을 짓는 것을 보고, 약왕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 나중에 보약(補藥)이라도 한첩 지어 줄 터이니, 보중(保重)하도록 하게."

내원총관이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저보다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네.”

약왕은 내원총관을 지나쳐 안으로 길게 이어진 통로로 들어갔다.

“자네가 '목숨보다 귀히 여기는 분'은 내가 이 이름을 걸고서라도 지켜 낼 것이니 걱정 말게나.”

내원 직속 의원들이 약왕의 뒤를 따라 통로로 모습을 감추었다.

내원총관은 그 통로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은 가주(家主)님을 위해.”

내원 총관비서가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은 가주님을 위해.”

그들이 서 있는 곳, 내원의 본관 뒤에 자리 잡은 그곳은, 낙양검가의 최심부(最深部).

오로지 낙양검가의 가주만을 위한 영역이었다.

* * *

일부장이 차가운 바람을 얼굴에 맞으며, 내원 본관의 안마당을 바라봤다.

“…저들의 모든 것은 낙양검가의 가주님만을 위해서 존재하지. 굳이 표현하자면, '극단적 가주 충성파'라고 할까?”

육부장이 마른침을 삼켰다.

“…낙양검가는 알면 알수록 터무니없는 곳입니다.”

일부장이 피식 웃었다.

육부장이 팔에 돋은 소름을 거칠게 비비며 물었다.

“그렇다면, 저들 모두, 그 뭐라더라….”

"'세뇌(洗腦)' 말인가?”

“아, 예. 저들 모두 그 세뇌라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본가에는 '그런 전문가'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일부장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 좌도방문(左道傍門)의 기술은 '특정 대상'에게서만 충성을 끌 어낼 수 있다고 들었네. 한계가 명확한 편이지.”

육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는 본가의 가주가 바뀌게 되었을 때의 공백이 너무나 커지겠군요.”

“그래. 가주가 바뀌는 것만으로, 수족이 되어야 할 이들이 전부 실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되어 버릴 테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가문은 계속 굴러가야 했다.

“…그렇다면 더 무서운 일이군요. 저런 큰 권력을 지닌 모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생각이라는 것 아닙니까?”

일부장이 미소 지었다.

“…본가의 무사들을 떠올려 보게.”

“…으음.”

육부장에게서 침음이 새어 나왔 다.

광적일 정도로 충성(忠誠)과 충정(忠情)에 목을 매는 살인귀들.

가문이나 주군(主君)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

“…왜 후계자들이 그렇게도 서로 소가주(小家主)가 되기 위해 싸우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래. 하지만 나도 지금 잘 모르겠는 것이 있네.”

“뭡니까?”

일부장이 자신의 턱수염을 쓰다 듬었다.

“저들 말일세. 내원의 최고위층들. 도대체 왜 전부 이 새벽부터 나와, 대공자를 환송하는 것이지?”

육부장의 눈이 커졌다.

“…그 개문식인가 뭔가 하는 것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내가 알기로는 개문식은 그저 표준 절차에 불과해.”

일부장의 눈에 의문이 깃들어 있었다.

“그저 개문식 때문에 지금처럼 최고위층들이 쏟아져 나올 필요가 없다는 말일세.”

제암진천경 -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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