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74화 (74/350)

제24편 절멸(絶滅)

연소현은 조금 전까지 침실에서 명상에 잠겨 있었다.

내원 의전비서가 정성껏 마련해준, 임시 숙소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전혀 다른 곳에 서 있었다.

깊이 뒤틀리고 침전되어 썩을 만큼 썩어 버린 시간의 무게.

숨이 막혀 오는 공간감.

연소현에게는 이제 슬슬 익숙해지는 감각이었다.

제암진천경의 내부(內部).

혹은 우주(宇宙)의 외부(外部).

연소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르신?”

그는 영락한 신선을 불렀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가 모르는 목소리였다.

“…자네를 부, 부른 것은 그가 아니라, 보, 본좌(本座)라네. 연, 연자(緣者)여.”

그 목소리는 긴장이나 공포로 떨리는 것이 아니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말을 더듬을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그의 육체가 큰 천형(天刑)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 었다.

“…선천적인 기형(畸形)이군.”

연소현은 그리 어렵지 않게 그의 천형을 파악했다.

“클, 클클. 마, 맞네. 역시, 가진바 의술, 이 출중하, 군.”

꼽추는 자신의 추악한 외모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소현의 반응이 마음에 든 듯했다.

“당신은 나를 아는 것 같소만, 나는 당신을 모르오.”

꼽추는 몇 번의 시도 끝에 고개를 충분히 저어 보이는 데 성공했다.

“본좌가 누, 누구인지, 무엇인, 인지는 조금도 중요, 요하지 않네. 본좌는 이, 이미 비원(悲願)을 이루고, 먹혀, 버린 잔재(殘在)에 지, 지나지 않음이니.”

그의 처진 혹에 가려진 눈알이 기이하게 빛났다.

연소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저 선배(先輩)라 불러도 되겠소?”

“마, 마음대로.”

“선배는 무슨 연유로 나를 찾으셨소?”

꼽추가 땅에 끌릴 만큼 긴 팔을 들어, 연소현을 정확하게 가리켰다.

“경고(警告)."

연소현은 그의 말을 경청할 자세를 갖추었다.

현재의 꼽추는 그의 말처럼, 잔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랐지만.

지금의 연소현으로서는 감히 짐작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감을 품고 있었다.

“흐음.”

입을 다문 꼽추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했다.

“…제암진, 천경이 어, 어떤 기준으로 연자를 선택, 하는지 아는가?”

“모르오.”

얼마든지 잘난 척하며 떠들 수 있었지만,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짐작에 기반을 둔 추측뿐이었다.

“역시, 혀, 현명하군.”

꼽추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비정상적일 정도로 두껍고 짧은 목은 고개를 움직이는 행동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렇게 행동했다.

“제암진천경은 '재능', 을 기준으로 연자를 고, 고른다네.”

연소현은 잠시 그의 말을 되뇌었다.

그것은 무(武)에 대한 재능을 말하는 것인가.

문(文)에 대한 재능을 말하는 것인가.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종류의 재능이 있었다.

여전히 자신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어떤 재능을 일컫는 것이오?”

꼽추 사내는 치열(齒列)이 모두 무너져 내린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연소현은 그 모습에서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무미건조하고, 뒤틀렸고, 지독하게도 인위적인 미소.

그것은 제암진천경이라는 천고의 마물에 선택받은 연자들의 미소였다.

“그, 그것은 세상(世上)을, 멸망 시킬 수 있는 재능.”

그와 동시에 연소현의 人]야가 붉게 물들었다.

그것은 꼽추의 기억이었다.

불길이 사납게 휘날렸다.

사방을 가득 메운 불길은 공기를 찾아서 그 포악한 손길을 뻗었다.

탈 수 있는 모든 것이 화마(火魔)에 타오르고 있었다.

갈 곳을 찾지 못하는 화염은 대기(大氣)마저 전부 태우려는 듯이, 아우성을 질러 댔다.

거대한 건물들도, 정원도, 그리고 몇천, 몇만이나 되는 시체들도, 이제 형체조차 남지 않았다.

세상 전체가 불타고 있었다.

그 작열지옥(灼熱地獄)의 한가운데에서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추악한 꼽추 사내가 아니었다.

9척(尺)에 달하는 거대한 근육질의 거인(巨人).

그의 육체가 대지를 짓밟을 때마다 땅이 움푹 파여 들어가고, 불길이 마치 그를 두려워하듯 자리를 피했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불길이 그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불길을 다루고 있었다.

그는 화염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대는 보고 있는가?”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의 압도적인 힘과 격(格)이 연소현에게 엄습해 왔다.

“…보고 있소.”

그가 소현에게 말했다.

“보게나, 이 대재앙을. 그리고 느끼게나, 연자라 불리는 이가 끝에 다다랐을 때 가지는 힘을….”

그는 마치 불을 연주하듯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거대한 불기둥이 일어나며, 형체만 유지하던 거대한 전각(殿閣) 하나를 빨아들이듯이 삼켜 버렸다.

“천재지변과 같은 힘이지.”

하지만 그의 눈빛은 허무했다.

“…하지만 이 힘에 의해서 본좌의 세계가 멸망에 치달은 것이 아닐세.”

연소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말이오?”

거인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걸렸다.

“이 힘은 자네의 눈 앞에 펼쳐진 결과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라는 뜻이네.”

연소현은 곧바로 이해했다.

“강한 힘으로 세상을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세상을 멸망시켰기에 강한 힘을 받은 것이로군…!”

제암진천경은 악인을 먹어 치울 때마다 더 큰 힘을 부여했다.

그의 힘은 세상 전체를 멸망시킨 대가였다.

거인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본좌는 그저 여기저기 불씨를 심은 것밖에 없었다.”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사적으로도 대화재는 항상 최악의 결과를 남겼소. 지금 내가 살아가는 세상 또한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대화재를 성공적으로 진압할 방법은 없소.”

거인은 허무한 눈빛으로 불타는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저 오랜 시간 전 대륙을 떠돌며, 발품을 팔고 다닌 것이 전부였어. 그냥 그렇게 본좌는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전쟁에서 승리했네.”

불타던 전각 한 채가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다.

“그 거대하던 제국들이, 전부 무너져 내렸지.”

"...."

“그들이 가진 모든 기반은 도시에 있고, 유수(有數)의 도시들이 불에 휩싸인 시점에서 본좌의 복수는, 원한은 너무도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지.”

대신 그에 대한 대가로 그의 세상 또한 함께 끝나고 말았다.

“악인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려던 신선들의 유지는 억겁(億劫)의 세월 속에 퇴색했다. 작금의 제암진천경은 누구도 그 실체를 파악할 수도 없는 미지(未知)의 존재가 되었지.”

예전에 영락 신선도 같은 말을 했었다.

“제암진천경은 세상을 멸망시킬수 있는 재능을 가진 자를 원하네. 그리고 본좌는 그 재능이 매우 뛰어났지.”

그의 손 위에서 시뻘건 불꽃이 춤췄다.

“업화(業火)를 다루는 본좌의 재능은 세상을 너무나 쉽게 파멸로 이끌었지. 장담하건대 이 무간지옥에 먹혀 버린 어떤 연자도 본인만큼 이 방면의 재능이 뛰어나지 못 했다네.”

그가 연소현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

연소현은 그 말에 긍정도, 부정도 표하지 않았다.

거인은 그런 연소현에게 미소 지었다.

“자네가 새 연자가 된 이후, 본좌는 계속 자네의 모습을 관찰해 왔네. 그리고 확신했지.”

연소현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거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자네는 본좌보다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세상을 멸망시킬 힘을 여기 품고 있지.”

거인은 거대한 손가락을 들어 연소현의 머리를 가리켰다.

“자네에게 그 작은 가문을 멸문(滅門)시켜 버리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지 않나?”

중원제일가라 불리는 낙양검가를 작은 가문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어폐가 있었지만, 그 말을 하는 이는 자신의 세상을 모두 불태워 버린 이였다.

“하지만 자네는 그 쉬운 길을 걸을 생각이 없더군.”

드디어 연소현이 입을 열었다.

“…나는 내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제암진천경과 손을 잡았소. 가문을 멸문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거인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놀라울 만큼, 선했다.

도저히 증오로 세상을 모두 불태워 버린 사내의 웃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제암진천경의 연자의 웃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크

“본좌는 그저 한 여자아이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서, 제암진천경의 연자가 되었네.”

"...."

그가 연소현의 앞으로 다가와 앉았다.

하지만 연소현은 여전히 그를 올려다봐야 했다.

"하지만 모든 연자가 그랬듯, 본좌 또한 모든 것을 멸망시키고야 말았지.”

그의 깊은 두 눈이 연소현을 직시했다.

“…제암진천경이 바라는 대로.”

연소현이 침묵했다.

오늘, 그는 한도 끝도 없는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보이는 이마다 크든 작든, 업(業)을 품고 있었고, 제암진천경이라는 천고의 마물은, 피아(彼我)를 구별치 않고 그를 흔들어 댔다.

“하지만 자네는 그 광기에 답하지 않았지. 그 허기에 흔들리지 않았지.”

연소현은 참아 냈다.

제어했다.

현재 낙양검가에 필요한 것은 대공자 연소현이라는 예리한 칼날이지, 암천존자라는 모든 것을 태우는 불길이 아니었다.

그가 바라는 미래를 위해, 낙양검가는 반드시 건재해야 했다.

연소현이 미소 지었다.

“…어릴 때부터 남들이 시키는대로 사는 것을 싫어했을 뿐이오.”

거인은 천둥 같은 소리로 웃었다.

주변의 불길이 미친 듯이 춤을 췄다.

한참을 웃던 그가 연소현을 미소지으며 바라보았다.

"...자네를 지탱하는 한 죽이, 소중한 이들과의 약속이라는 것을 이 본좌가 모를 것 같은가?”

연소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연자 선배들은 도무지 후배의 사생활이라고는 지켜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군.”

다시 한 번 거인이 요란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무엇이 그리도 웃긴지, 눈물까지 흘려 가며 웃는 거인이었다.

눈물은 순식간에 증발하여 버렸지만.

“…그것은 미안하게 생각하네. 하지만 앞으로도 지켜보지 않을 수가 없으니, 어쩔 수가 없군.”

연소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곳에서 딱히 재미있는 거리가 있을 리 없으니, 내 선배의 고약한 취미를 이해해 보도록 하겠소.”

그때, 시커먼 연기로 가득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허락된 시간이 끝나 가는군.”

하늘을 올려다보는 거인에게 연소현이 물었다.

“그래서 선배가 처음에 말한 그 경고란 것은 무엇이었소?”

거인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본좌라는 존재의 결말 자체가 자네에게 거대한 경고가 아니던가?”

“…그렇구려.”

거인의 눈빛에서 연소현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후회와 참회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얼마 동안 이 공간에서 고통받고 있었던 것일까.

빗방울이 점차 거세졌다.

* * *

침상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연소현이 눈을 떴다.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동녘이 밝아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정아가 방 안으로 급히 들어왔다.

“…안 좋은 기척이 느껴져, 감히 여쭙지도 않고 들어와 보았사옵니다.”

연소현이 미소 지었다.

“별것 아니다.”

별것 아닐 리가 없었지만, 정아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주인이 지고 있는 무게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그녀 자신뿐이었다.

“…수사가 일단락되었다고 하옵니다. 그리하여 내원에 내려졌던, 호법원의 봉쇄령이 종료되었다고 알려 왔사옵니다.”

이제 내원을 떠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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