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편 사건종결(事件終結) (1)
내원 본관, 의전실.
“대공자님. 음식은 입맛에 맞으셨는지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연소현에게 다가온 노부인(老婦人)이 곱게 미소 지었다.
궁장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노인이었는데, 움직임 하나하나에 기품이 가득했다.
“대공자님. 그리 딱딱하게 부르지 마시고, 옛날처럼 불러 주시지요.”
“그래, 파파(婆婆). 아주 맛있었어. 파파가 직접 요리한 모양이지?”
파파라고 불리자, 그녀는 활짝 미소 지어 보였다.
“그럼요! 도련님이 드실 음식인데, 이 노인네가 오랜만에 직접 힘을 써 보았지요!”
“후후. 고마워.”
“별말씀을요.”
그녀가 연소현과 '감히' 같은 식탁에 둘러앉은 이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식사는 어떠셨나요?”
그녀의 눈빛은 따스했지만, 누구하나 제대로 눈을 마주하는 이가 없었다.
정아를 제외하고는.
“저희 같은 아랫것들에게까지 훌륭한 만찬을 대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노부인의 깊은 눈에 이채가 서렸다.
“후후. 도련님이 원하시는 일이었는데, 저 같은 노인네가 어찌 거부할 수 있겠나요.”
연소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파파. 이제부터….”
“네에, 도련님. 편히 대화를 나누실 수 있도록 전부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가 정중하고 우아하게 예를 표하고, 모든 인원과 함께 의전실을 빠져나갔다.
화려하게 장식된 커다란 문이 닫히자마자, 경직되어 있던 세쌍둥이 시녀들이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엄청나게 맛있었던 것 같지만…. 아니, 정말로 맛있었던가요?”
“아마도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요.”
“…제게는 묻지 말아 주세요. 기억이 없으니까요.”
강호가 입을 열었다.
“아까 저분이….”
일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내원의 의전비서(儀典祕書)님이죠. 허리께에 금실로 엮은 술이 여섯 개가 있는 것은 보셨죠?”
“육계 (六階)라….”
“…겉으로는 그저 우아하고 친절한 노부인처럼 보이지만요.”
“으으. 내원의 사람들은 웃어도 진심으로 웃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아요.”
“밖에서 같은 내원의 인원들이 고문을 당하고 비명을 지르는데, 저리도 평온하다니요.”
“내원은 정말 무서운 곳이네요.”
정아가 조심스럽게 연소현에게 물었다.
“주인님. 의전비서와 과거부터 친분이 있으신 것 같은데, 제 생각이 맞사옵니까?”
연소현이 피식 웃었다.
“그녀는 믿어도 좋다. 적어도 음식에 하독(下毒)을 하거나 뒤끝이 있는 인물은 아니니.”
그 말에 세쌍둥이 시녀들이 부르르 떨었다.
강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정말 훌륭한 식사였습니다. 솜씨가 정말 좋은 분이시더군요. 굳이 대공자님 곁에 남아 있었던 보람이 있었습니다.”
연소현이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네가 여기 아직도 남아 있는 이유가 만찬 때문은 아니었을 터인데?”
강호가 잠시 굳었다.
그는 안경을 추스르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아무래도 낮에 대공자께서 해 주셨던, 이야기의 뒤가 너무 궁금해서 말이옵니다.”
세쌍둥이 시녀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썩은 껍데기에 대해서 말씀하시던 와중이었지요.”
“지금 잡혀 있는 이들이 그런 내원의 썩은 껍데기들의 일부겠지요?”
“어처구니없는 자들이었어요.”
정아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 모자란 저희에게 부분적이나마 진상에 대한 가르침을 내려 주실 수 있으시겠사옵니까?”
강호가 급히 물었다.
“도대체 내원 회계비서는 왜 죽어야 했던 것이옵니까? 중앙감찰각이 이런 일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무엇이옵니까? 그리고 호법원의 일부와 육부가 동시에 개입하다니요? 그리고….”
“그만, 그만.”
연소현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지만, 강호는 기어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대공자님께서는 이 일에 어떻게 관련되어 계신 것이옵니까?”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시선은 한없이 진지했다.
연소현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추측은 무엇이냐?”
연소현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는 강호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저는 어쩌면, 대공자께서 오늘 펼쳐졌던 모든 일의 배후에 계실 수 있다고 생각하옵니다.”
연소현이 빙긋 미소 지었다.
“낮에 중앙감찰각주의 말을 들었으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구나.”
“그것은…, 맞습니다.”
강호가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다.
만약 그녀가 연소현에게 했던 말을 듣지 못했다면, 그는 아직도 일의 갈피를 잡지 못했을 터였다.
“내가 모든 일의 배후라….”
연소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정확히 하자면, 이 모든 일은 나와 내원총관(內院總管), 그 늙은이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강호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그렇다면, 내원 회계비서는…!”
“그래, 맞다. 그는 내원의 수장(首長)인 내원총관의 명으로 자살한 것이지. 아니, 이런 경우엔 자살당했다고 하던가?”
연소현이 키득거렸다.
“내가 직접 내원에 모습을 드러내자, 내원총관, 그 늙은이가 먼저 움직였던 것이야.”
정아가 물었다.
“…어째서 회계비서였던 것이옵니까?”
“혹시 그가 썩은 껍데기로 불리는 이들의 정점(頂點)이었던 것이옵니까?”
강호의 물음에 연소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연소현이 화려한 식탁 위에 놓인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그저 '방화선(防火線)'이었다.”
“방화선…?”
이령이 과거 특수교육에서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산불이 났을 시에, 불이 일정 이상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나무들을 미리 베어 놓는 것을, 방화선이라고 들었던 것 같사옵니다.”
“그래. 그 방화선이다.”
“그렇다면….”
모두의 표정이 아연했다.
“내가 알기로 그는 적어도 오늘의 이 사건에 대해서는 별 책임이 없는 자였다. 단지….”
내원총관은 기왕 연소현이 나타난 것을 어쩔 수는 없었다.
피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상황이 강요된다면, 적어도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은 피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연소현의 등장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동안 내원에 필요했던 '일'을 추진하려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그 일이란 바로 썩은 껍데기를 내원에서 제거하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그 일'은 이제까지 정치 적인 문제로 자신의 손으로 할 수는 없었다.
“…정치적인 문제 말씀이시옵니까?”
정아의 물음에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들은 이공자와 삼공자를 따르는 이들이지. 그런 이들을 직접 제거해 버리는 것은 정치적인 문제를 불러일으키지.”
“…하지만 그들은 제멋대로 주인을 섬기는 자들이지 않사옵니까?”
“그 주인들이 미래에 가문의 주인이 될지도 모르는 후계자들이라는 것이 문제인 거지.”
“아….”
그렇기에 내원총관은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 남의 손을 빌려 '썩은 껍데기'를 벗겨 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 늙은이는 자신을 충실히 따르는 최고위직인 회계비서를 직접 날려 버렸지. 그것으로 외부에 자신의 뜻을 알린 것이다.”
연소현이 탁자에 선을 그어 보였다.
“이 아래로는 누가 처분되어도 상관없다.”
시녀들과 강호는 연소현이 그은 선 아래가 붉게 물드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그렇다면…!”
강호가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내원집사는 대공자께서 내원 본관에 당도했다는 것을 들은 순간, 이미 대공자님이 어떤 행동을 하실지 정확히 예측했다는 말씀이옵니까?!”
“약삭빠른 늙은이 같으니라고.”
연소현이 혀를 찼다.
“그 짧은 순간에 실행 가능한 계획을 세우고, 자신을 평생 따른 수하의 목을 끊어 버릴 줄이야….”
이야기를 경청하던 모두의 목이 서늘해졌다.
“그런….”
연소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감찰부주(監察部主)와 호법원주(護法院主)을 끌어들인 것도 그 늙은이의 짓이다. 일종의 거래였던 것이겠지.”
강호가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내원의 격렬한 저항 없이, 직계혈족과 관련된 대규모 비위(非違)를 적발하고 격멸하는 공과 방화선을 지키는 것을 교환한 것이었군요.”
“그런….”
세쌍둥이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 늙은이는 전전 대(前前代)의 가주, 그러니까 내 할아버지 때부터 검가에 충성을 바쳐 온 노괴(老怪)다.”
원래라면 진즉 은퇴하였어도 모자랄 나이의 인물이었다.
“흑막(黑幕)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이를 이 검가에서 찾아 목록을 만든다면, 그 노괴는 당연히 상위권에 들어가야 할 인물이지.”
경청하던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연소현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는 여전히 따뜻했다.
온열수정(溫熱水晶)이 아래에 박혀 온도를 천천히 낮춰 주는 찻잔 덕분이었다.
“…그 노괴가 이렇게 나온 이상, 당장엔 나도, 거슬리는 껍데기들을 적당히 벗겨 내는 것으로 만족해야겠지.”
아무도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그중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강호였다.
'이것이…, 낙양검가의 대공자.'
이 대공자야말로, 그가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낙양검가에 들어 온 이유였다.
그는 직접 대공자와 만나고 싶었다.
할아버지는 세간에 무검자라 알려진 그에게서 무엇을 보았던 것인가.
어째서 그 이름 높은 할아버지가 그리도 그를 추켜세우는지,
어떻게 나이가 일흔이나 차이 나는 할아버지와 그가 친구가 될 수 있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감히 언젠가는 그와 겨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자신보다 두 살이나 어린 대공자의 앞에서, 격이 다르다는 것이 무엇인지 느끼고 있었다.
그때 정아가 입을 열었다.
“…천녀의 추측에 불과하지만, 대공자님이라면 필시 그 정도는 예측하셨던 것이 아니시옵니까?”
“당연하지.”
"...!"
강호가 경악했다.
“시, 시녀장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정아는 담담했다.
“잊으셨습니까? 감찰부에 미리 조사 요청을 하셨던 것은 주인님이 하신 일입니다. 적어도 감찰부주와 내원총관의 거래 이전에 있었던 일이었지요.”
“그럼 내원의 조사를 요청하는것을 알게 된 감찰부주가 내원총관에게 먼저 접촉했을 가능성도….”
“그가 그런 인물이었다면 주인님께서 감찰부에 요청하지 않으셨겠지요.”
“그, 그렇군요. 그렇다면…?”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중앙감찰각을 끌어들이고, 호법원에서 두 개의 부(部)를 동원하게 만든 것은 내가 한 일이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했지.”
“만약 내원총관이 자살한 회계비서에게 책임을 전부 떠넘기고 원각정의 일을 덮으려 했다면, 중앙감찰각과 대형 충돌이 있었겠군요.”
그리고 그 충돌에는 엄청난 유혈사태가 동반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중앙감찰각주가 그토록 화를 냈던 것이리라.
강호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 그렇다면 대공자님께선 어떻게 감찰부주를 움직이신 것이옵니까? 그리고 또 호법원주는 어떻게…?”
정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주인님께서는 감찰조사원, 강호를 지명하셔서 소환 요청하셨었습니다.”
“…기밀 보고서!”
강호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감찰부주는 대공자님의 지명으로 저에 대해 떠올렸던 겁니다! 제가 완전기억능력을 가졌다는 것을요! 그런 제가 내원의 장부서고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 감찰부주는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겁니다!”
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제가 내원에서 잘못되어 돌아오지 않는 상황을 막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미리 중앙감찰각을 준비해 두었던 겁니다! 그들만이 내원 전체와 정면충돌이 가능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