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편 오만함의 대가(代價)
방 집사는 작은 탁자를 앞에 두고 앉아,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난방이 전혀 되지 않는 방이 추운 것도 있었지만, 겨우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중앙감찰각이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정신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혼자 격리되었다가, 이곳으로 끌려왔다.
그럼에도 그녀는 비상 수칙을 기억했다.
사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비상 수칙만 계속 되뇌고 있었다.
탁자 맞은편에 의자가 하나 더 있는 걸 보면, 곧 누군가 들어와 조사를 시작하리라.
문이 벌컥 열리자, 그녀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어이쿠. 여긴 왜 이리 추워?”
인상 좋은 사내가 들어오려다가, 밖에 대고 외쳤다.
“야! 여기 화로 넣는 거 까먹으면 어떻게 하냐? 사람 얼어 죽겠다!”
방 집사는 재빠르게 사내의 모습을 확인했다.
"게다가 이 어두운 방에 유등(油燈) 하나 없이, 지금 뭐 하자는 거야?!”
그는 아무것도 소지하고 있지 않았다.
그 흔한 지필묵도 지참하지 않았고, 그녀를 몰아붙일 증거 서류들도 들고 오지 않았다.
“아이고, 이거 미안해요. 우리 애들이 철저한 것처럼 보여도 다들 알고 보면 이렇게 허술한 면이 있다니까.”
“…아, 아닙니다.”
그가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때 열린 문으로 붉은 옷의 인원들이 화로를 들고 들어왔다.
방 안이 대번에 훈훈해졌다.
유등도 몇 개가 들어와 방이 환해졌다.
“얘들아, 이 아가씨 너무 추워 보인다. 가서 따뜻한 차 한 잔도 좀 가져와라. 너는 외투라도 좀 벗어 드리고.”
"예.”
그녀의 어깨에 붉은 외투가 얹어졌고, 곧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가 그녀 앞에 대령되었다.
문이 닫혔다.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계속해서 되뇌고 있던 비상 수칙이 가정하고 있는 상황과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자, 여기 차 한잔 마시면서, 몸이라도 좀 녹여요. 그러다 고뿔 걸릴라.”
“가, 감사합니다….”
사내는 그녀를 향해 손짓하며 넉살 좋게 미소 지었다.
“자, 이제 방씨 가문 아가씨는 나와 함께 담소라도 좀 나누면서 시간이나 죽입시다.”
“예?”
그녀의 반응에 그가 잠시 당황하더니,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아, 이거 참. 내 정신 좀 봐 봐. 내 소개도 안 하고 있었네.”
그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나는 본가 내의 방씨 가문 어르신들에게 신세를 졌던 적이 있는 화복이라고 해요.”
“아아….”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화복의 얼굴에 어린 친근한 미소가 진해졌다.
* * *
“그럼, 이 모든 일에 대해서 본인(本人)은 전혀 모른다는 겁니까? 짐작이 가는 것도 없고?”
서문집사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녀의 조사를 맡은 특수 감찰조사원이 서류들을 탁자 위에 펼쳐 보였다.
탁자에 놓인 유등 하나가 방을 어스름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 모든 증거가 있는데도?”
그녀가 눈을 돌렸다.
“모릅니다.”
그가 탁자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여기 보면, 장로회의에서 원각정에 배정한 올해 예산이 나와 있지 않습니까?”
“예.”
“그리고 여기에는 대공자님께 그 예산 전체를 지급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가 자료 한 장을 들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대공자님에게는 채 절반도 지급하지 않은 것으로 나와 있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모르는 일입니까?”
“모르는 일입니다.”
“그럼 잠시 다른 이야기로 넘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순순히 물러났다.
“원래 내원에 배정되는 예산을 특정 직계혈족에게 이렇게 금전의 형태로 지급하는 것이 허가되어 있습니까?”
“예.”
“이렇게 큰 금액을 말입니까?”
“…내원 내규(內規)에는 금액의 양에 대해 정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후계자 중에 내원의 시중을 거절한 이들이 늘어남에 따라, 과거 위로부터 이를 허가하는 결정이 있었던 것만 알고 있습니다.”
“내원의 시중을 받지 않는 후계자라 함은, 대공자, 이공자, 삼공자, 사공자를 말하는 것입니까?”
예”
“그 결정에 대해서는 상층부의 일이었으니, 자세한 과정은 모르시겠군요.”
“예.”
그가 서류들을 모았다.
“지금 본인이 어떤 혐의(嫌疑)를 받고 있는지 아십니까?”
서문집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혐의라니요? 지금은 단순히 참고인 조사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가 피식 웃었다.
“본인은 감찰부가 조사만 하는 곳으로 알고 있었습니까?”
"...."
“장부 조작, 이중장부 작성, 횡령….”
그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혐의 사항을 하나씩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역(叛逆).”
반역이라는 말에 서문집사가 펄쩍 뛰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반역이라니요?!”
그녀가 벌떡 일어나며 외치자, 오히려 그가 황당해하며 물러나 앉았다.
“아니, 지금 본인이야말로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는 것 아닙니까?”
“무슨 상황입니까?!”
그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지금 본인을 포함한 감찰 대상자들이 '어떤 신분을 가진 이'의 금전에 손을 댄 것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요?”
"...."
연 씨의 가문에서 그 직계혈족의 금전에 손을 댔다.
장부를 조작했고, 일부는 빼돌리기도 했으며, 마음대로 예산의 사용처를 정해 왔다.
명백한 반역죄에 해당하는 짓거리들이 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 그대로 의자 위에 주저앉았다.
“나는..., 나는….”
그녀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누군가 문을 가볍게 두드리고 들어왔다.
“진술서들인가?"
“예.”
문이 닫히고, 그가 문서들을 넘겨보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터놓고 말하면, 오히려 내가 다 황당하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아니, 이리도 큰 죄를 저지르면서, 이렇게까지 허술하게 일을 처리해?”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도 고작해야 이딴 낮은 직위의 연놈들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진술서들을 넘겨 가며, 필요한 부분만 대충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대공자님께 예산의 전액을 내어 주었는데, 그러고도 대공자께서 부가적으로 소비를 하시기 시작했다.”
그가 한 장을 넘겼다.
“…그래서 원각정에 배정된 예산을 남겨 그 부가적인 소비에 대응했다.”
한 장이 또 넘어갔다.
“여기 보복이라는 말도 있군. 대공자가 예산을 가져가고도 내원의 돈을 마음대로 쓰자, 화가 났다. 그래서 보복할 생각으로 예산을 더 남겼다.”
또 한 장이 넘어갔다.
“그러고도 누구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자, 점점 더 많은 예산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가 더 이상 진술서를 읽는 것을 포기했다.
“아니, 당신들 진짜 제정신이야? 원각정의 예산과 대공자님이 내원의 돈을 쓰는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고?”
그가 탁자를 내리쳤다.
“애초에 내원의 재산 전체가 가주님과 직계혈족을 위한 것이 아니던가?”
그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볼 뿐이 었다.
“결국에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대공자님이 한마디만 하면, 이렇게 될 줄 몰랐냐고? 나 참, 그 이름 높은 내원에서 잔뼈가 굵은자들이 도대체…."
“…어요.”
“뭐?”
“몰랐어요. 몰랐습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아뇨.”
그녀의 멍한 시선이 그를 향했 .
“…그 대공자님이 이럴 줄을 몰랐습니다.”
* * *
내원 본관,
중앙감찰각 임시 조사 본부.
“다녀왔습니다〜.”
문이 열리고 화복이 서류를 흔들어 보이며 들어왔다.
“방 집사가 자백했나?”
중앙감찰각주, 독고야연이 커다란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예이, 깔끔하게 모든 혐의를 인정했습니다요.”
그가 그녀의 책상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수고했다.”
“수고랄 것도 없었지요. 그저 어린아이 손목 비틀기였는데요, 뭐.”
“그렇지.”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증거도 넘쳐 나고, 증언도 넘쳐나고, 심지어 수법도 허술하고.”
그가 입맛을 다셨다.
“애초에 이거 우리가 나설 만한 사안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대답은 없었다.
독고야연은 그저 서류들을 확인할 뿐이었다.
“…뭐,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감찰부주님이 직접 내리신 명령이신데, 그렇죠?”
“떠보지 마라.”
“…아, 예. 죄송합니다.”
그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나저나 그 대공자도 엄청나게 얕보였던 모양입니다. 직계혈족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살펴야 할 내원이 이런 취급을 하다니요.”
그가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아무리 상대가 '무검자'라지만 말입니다.”
그녀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여겼던 자들이니, 이리도 쉽게 무너진 것이지.”
“그건 맞습니다.”
그가 손뼉을 쳤다.
“그러고 보니, 각주께서 직접 대공자를 조사하신 것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잘되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죠? 하긴 자신이 고발한 사건이니, 협조를 안 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그가 그녀의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을 뒤적거렸다.
그런 그를 향해 독고야연이 입을 열었다.
“찾아봐야, 대공자님의 증언은 없다.”
“예?”
대답은 없었다.
“하긴….”
그가 짧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혼자 추리했다.
“아무리 본가에서 취급이 안 좋은 대공자라지만, 수사 기록에 직계혈족을 끼워 넣었다가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지요.”
역시 대답은 없었다.
그가 책상에 기대서 입맛을 다셨다.
“저도 한 번쯤은 대공자를 상대해 보고 싶은데 말입니다.”
그가 미소 지었다.
“옛날에는 대공자가 그렇게 유명 했다지요? 감찰부의 기록을 뒤져 보니 꽤 자주 이름이 거론되더군요. 물론 제 직위로 자세한 사항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가 책상에 몸을 기울여,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대공자가 칩거를 깰 것이라는 소문을 들어 보았습니까?”
“그래.”
그의 눈이 위험한 빛을 띠었다.
“그 소문의 진위를 조사해 보실 생각 없으십니까? 태상가주님의 명령과 관련된 사항이니, 우리가 조사해 볼 만한 일이 아닙니까?”
대답이 없었다.
그가 입맛을 다셨다.
“아니면 저에게라도 임무를 할당해 주시면….”
“화복.”
그녀의 백안이 그를 향하자, 그는 급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예, 각주님.”
그는 지나칠 정도로 영민했고, 각주가 '저런 시선'으로 누군가를 바라보는 일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넌 지금까지 아주 잘해 오고 있다. 널 뽑아서 중앙감찰각으로 데려온 보람을 느꼈지.”
“감사합니다.”
그가 정자세를 풀지 않고, 히죽하고 웃었다.
냉혈(冷血)이라는 말에 딱 맞는 자신의 상관이 칭찬을 하는 일은 거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어진 말은 그의 기분을 바닥으로 처박았다.
“그러니 죽을 자리에 알아서 기어들어 가려 하지는 마라.”
“…예.”
대답은 하면서도 전혀 납득하지는 못하는 수하의 모습에, 중앙감찰각주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너 스스로가 어떤 판에 끼어드는지 판단하지도 못한 채로, 머리부터 밀어 넣지 말란 이야기다.”
그것은 연소현이 강호에게 했던 말과 거의 같은 말이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공자와 관련된 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위험한 판이라는 말씀입 니까?”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 다.
“그것은 옛날에 내가 대공자께 직접 배웠고 후에 깨달은 교훈이다. 잊지 마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자신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상관이, 과거 이야기까지 꺼낼 정도라면, 명심해야 할 일은 맞았다.
그를 잠시 백안으로 바라보던 그녀가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내원 내의 사건은 간단하지만, 내원 밖으로 흘러 버린 예산은 우리가 전부 감당하기 힘들겠군.”
“그렇습니까?”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일들이 모두 감찰부주가 그녀에게 지시를 내리며, 말했던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가 혼자 먹을 수 있는 덩어리가 아니다.”
“그럼, 지원을 요청해야겠군요.”
그가 외투를 집어 들었다.
“부탁하지.”
“별말씀을요.”
콧노래를 홍얼거리며 문을 향해 걷던 그가 멈춰 섰다.
“…어, 각주님?”
“왜?”
그가 눈을 깜빡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 교훈을 배우셨던 그때 말입니다. 대공자가 칩거하기 전을 말씀하시는 거겠지요. 그렇다면 당시 가르침을 내렸다는 대공자가 도대체 몇 살 때의 이야기입니까?”
대답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