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68화 (68/350)

제18편 썩은 외피(外皮)

서문집사의 집무실.

“함 장로님의 측근께서도 기별을 주셨습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도와주시 겠다고 확답하셨습니 다.”

“이공자님 쪽에도 서신을 보내어 두었습니다. 곧 회신이 올 것입니다.”

“감찰부에 끈이 닿아 있는 분들께서도 힘을 써 보시겠다고 합니다.”

방 집사도 상기된 얼굴로 서문집사에게 말했다.

“검가 내에 계시는 집안의 어르신들께서 반드시 도와줄 것이니, 마음만 단단히 먹고 계시라고 전하셨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의자에 앉아 있는 서문집사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서문집사님?”

“음? 그래. 알겠다.”

연이어 좋은 소식들이 날아들었지만, 서문집사의 얼굴은 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그때 집사 하나가 집무실로 뛰쳐 들어왔다.

“방금 감찰부에서 일단의 인원들이 출발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본조사를 위한 인원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들 서문집사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말이 없었다.

“자 자, 다들 주목하게.”

그러자 개중에 가장 선임 집사가 나서서 시선을 모았다.

“감찰부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빨라, 아예 그들이 출발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상관없네.”

모두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본조사의 결과는 우리가 지금 남은 시간 동안 얼마나 더 최선을 다하느냐에 달려 있으니, 다들 끝까지 노력해 보세.”

“좋아!”

“해 봅시다!”

다들 박수를 치며, 힘차게 외치고, 다시 서신을 쓰는 것에 집중했다.

비상시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모든 명단의 인물들에게 서신을 보낸 뒤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최대한 머리를 짜내어 가느다란 줄이라도 떠올리기 위해서 힘썼다.

여전히 서문집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전에 보았던 광경이 머릿속 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 부서진 가위는 뭐였지?’

그녀는 이제까지 내원에서 일해 오며, 자살한 시신을 수도 없이 보았다.

신입 시절에는 시신을 직접 처리해야 했던 적도 있었다.

내원의 인원들이 얼마나 그런 처리에 능숙한지는 지금 상황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낙양검가 다른 일반적인 조직 내에서 회계비서만큼 높은 직위의 인물이 자살했다면, 온 부서가 난리가 났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의 집무실을 오가는 누구도, 회계비서가 자살한 소식을 못 들었다.

내원은 그런 곳이었다.

내원은 낙양검가에서 가장 강한 권력인 가주를 보필하는 부서였고, 가장 많은 비밀이 존재하는 조직이기도 했다.

그런 곳에서는 언제나 일이 터지기 마련이었으며, 내원의 최고위직들은 언제나 꼬리를 잘라 왔다.

'하지만 회계비서가 바로 그 최고위직이잖아:'

최고위직이 꼬리가 되어 잘려 나 간것을 본 적은 처음이었다.

'이 일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지?’

그녀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이것이 원각정의 예산 문제가 아니었단 말이야? 책값으로 트집을 잡아, 원각정의 예산 내역을 털어 우리에게 복수하려던 것이 아니었단 말이야?’

그녀가 물어뜯는 손끝에서 선홍색 핏방울이 흘렀다.

'도대체…, 어째서….'

그녀는 불현듯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집사들과 시종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하는 꼬락서니가, 무대 위에서 한바탕 춤을 추는 꼭두각시들의 놀음처럼 느껴졌다.

* * *

“대공자님! 본조사가 확정되었사옵니다!”

헐레벌떡 대기실로 뛰어 들어온 강호의 두 눈이 커졌다.

“어, 왔느냐. 여기 앉거라.”

연소현이 빈자리를 가리켰다.

“식사 중이셨사옵니까…?”

그는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공자는 현재 적진(敵陣)이나 마찬가지인 곳에서 태연하게 식사를 한단 말인가?

그는 흘러내린 안경을 추스르며, 연소현이 권한 자리에 앉았다.

그가 앉자 내원 내 의전 담당 집사들과 시녀들이 떨리는 손길로 그의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그가 급히 거절했다.

“아, 아니에요. 조사원인 제가 이 곳에서 식사를 얻어먹을 수는...“

연소현이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본조사에는 끼지도 못했을 것 아니냐? 맘 편히 먹도록 해라.”

“어, 어떻게 아셨사옵니까?”

안 그래도 그는 그것 때문에 상당히 낙심한 상태였다.

연소현이 피식 웃었다.

“너희는 이제 모두 나가라.”

그의 말에 따라 시중을 들던 인원들이 모두 자리를 비웠다.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연소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감찰부가 내원에 본조사까지 할 생각이라면, 아직 조무래기인 네게 일을 맡길 리가 없지.”

“…그건 그렇사옵니다.”

“게다가 네게 챙겨 줄 공은, 선 조사를 한 것으로 충분하고도 남을 터이니.”

“…그렇다고 들었사옵니다.”

“그 공도 다른 조무래기들이라면 받지 못했을 것이다. 네 할아버지의 체면이 있으니 받을 수 있는 것이지.”

“…맞사옵니다.”

풀이 죽은 그를 바라보며, 연소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대신 감찰부의 최고위직에게서 무언가 따로 지시를 받은 것이 있겠지?”

“…그러하옵...?!”

그가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아니옵니다! 소인은 누구에게도, 아무런 지시도, 받은 적이 없사옵니다!”

세쌍둥이 시녀들이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작게 키득거렸다.

그런 그녀들의 모습에 이미 글렀다는 것을 느낀 그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절대 임무의 내용은 말씀을 드릴 수 없습니다.”

연소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야 어차피 뻔하지. 네가 장부서고에 출입했다고 할 때부터 예상했다.”

“…예?”

연소현이 멍청한 표정의 수재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오늘 보았던 장부들의 내용. 너라면 틀림없이 모두 기억하고 있지 않더냐? 그러니 그것과 관련된 임무겠지.”

"...."

“너한테 맡길 정도면, 커다란 임무는 아니겠지. 해 봐야 내원의 예산 집행 내역에 관련된 기밀 보고서를 꾸리는 것 정도일 것이고.”

"...."

“아마 네 보고는 누군가가 본가의 장로회의(長老會議)에서 써먹게 될 것이다. 당연히 네 이름은 보고서에서 빠져 있겠지만, 장로들쯤 되면 누가 만든 보고서인지 다들 알게 될 것이고.”

"...."

"네게 기회를 준 이가 누군지는 몰라도, 네 할아버지와 상당한 친분이 있는 인물인 모양이구나.”

"...."

연소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강호를 무시하고, 식사를 계속 했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강호의 입에서 탄식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째서 할아버지께서 제게 보내는 서신마다 대공자님의 이야기가 적혀 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사옵니다.”

“네게 내원 장부서고를 열어 보여 준 이가 누구냐?”

잠시 침묵하던 강호가 대답했다.

“…내원 회계비서이옵니다.”

“아마 지금쯤 죽었을 것이다.”

"...."

“내원이 항상 해 온 짓거리를 보면, 자살이겠지.”

강호와 더불어 연소현의 시녀들까지도 깜짝 놀라 연소현을 바라보았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강호의 말에 연소현이 빙긋 웃었다.

“애송아. 보고서를 작성할 때 너무 나대지 않도록 해라. 어차피 너를 알리는 정도만 하면 족하니.”

"...."

연소현은 젓가락을 들어 강호를 가리켰다.

“적어도 너 자신의 힘으로 무슨판에 끼어들고 있는 것인지 파악할 정도가 되기 전까지는, 공에 목말라하지 말라는 뜻이다.”

강호는 젓가락이 아니라 시퍼런 칼날이 자신을 겨누는 것처럼 느꼈다.

“알겠느냐?”

"예, 예! 알겠사옵니다.”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느라, 헐거운 그의 안경이 드디어 빠져 달렸다.

“네 녀석이 낙양 한구석에서 시체로 발견되거나 시체도 남기지 않고 실종되면, 네 할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지. 그래서 내 특별히 알려주는 것이야.”

강호는 안경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가, 감사하옵니다.”

그는 꼿꼿이 앉은 자세로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사실 그는 내심 낙양검가의 대공자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자신의 할아버지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대공자였다.

거리가 멀어지자 이제는 붓이 마르도록 그와 가까이 지내길 거듭해서 당부했던 할아버지였다.

황제 폐하 앞에서 전시를 치르고 당당히 수석까지 했던 그였다.

수재(秀才) 중의 수재라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어 왔던 그였다.

그러고도 할아버지의 눈에는 아직 철없는 손주에 불과한 그였다.

“주인님.”

빼어나게 아름다워 그가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대공자의 시녀장이 입을 열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대략적으로라도 알려 주실 수 있겠사옵니까?”

세쌍둥이로 보이는 시녀들도 입을 모았다.

“천녀들도 궁금하옵니다.”

연소현이 식사를 마치고, 수저를 놓았던 시점이었다.

“흐음.”

연소현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을 시작했다.

“내원이 어떤 곳이냐?”

정아가 답했다.

“본가의 가주님과 그 직계혈족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필하는 부서이지 않사옵니까.”

“그렇지. 그런데 지금 본가의 가주님은 어디에 계시지?”

“병상(病床)에 계시옵니다.”

“그래. 게다가 가주 자리에서 물러나셔서 태상가주가 되셨지. 그러면 내원의 상황이 어떻게 되겠느냐?”

“…구심점을 잃었으니, 내부 인원들의 단결력은 떨어지고, 권력은 흩어지겠지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그렇사옵니까?”

“내원은 원래부터 본가에서 가장 오래된 조직이었고, 지금도 가장 많은 예산을 사용하는 부서 중 하나이기도 하지.”

정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있는 곳에 권력이 있고, 권력이 있는 곳에 돈이 있는 법이라 배웠사옵니다.”

"그래. 그런데 그들이 구심점이 없으니 어떻게 되겠느냐?”

“...감히 짐작하자면, 권력이 필요한 자들은 권력에 붙고, 돈이 필요한 자들의 위에는 권력으로 임했을 것으로 추측되옵니다.”

“역시, 내 시녀장답군.”

“과찬이시옵니다.”

연소현이 탁자를 두드리며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내원의 껍데기가 모두 썩어 가고 있던 것이야. 그것이 이 사달의 원인이나 마찬가지인 것이고.”

“껍데기 말이옵니까…?”

“그래. 껍데기들이다. 오늘 보았던 이들을 기억하느냐? 약 십여 년 안에 두각을 드러내고 급격히 부상한 자들이지. 그렇지 않으냐, 조사원 강호?”

멍하니 이야기를 듣던 강호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맞사옵니다.”

“십여 년이라면 역시 태상가주께서 쓰러지신 이후의…?”

“그래.”

연소현이 탁자를 두들겼다.

“원래 내원의 가치보다는, 이합집산(離合集散)과 이전투구(泥田鬪狗)에 익숙한 이들이지.”

연소현이 비죽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각자 선택한 후계자 밑에 빌붙어 추대하며, 그들에게 위협이 되나 가능성이 희박한 사공자는 밀어내고, 자신들의 권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 대공자는 무시하는 것이지.”

모두가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강호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손에 땀을 쥔 채로 연소현에게 물었다.

“…이제 대공자께서 말씀하신 판의 배경은 이해했사옵니다. 그렇다면 그 판이라는 것의 진상은….”

연소현이 탁자를 두드리던 손가락을 세워 들었다.

그의 시녀장이 벽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접근하고 있사옵니다.”

잠시 뒤.

발걸음 소리와 함께 집사 하나가 파리한 얼굴을 드러냈다.

“가, 감찰부에서 파견된 인원들이 내원에 들어섰다고 하옵니다.”

연소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 다.

“자, 그럼 감찰부에서 누가 왔는지 보러 가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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