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편 죄여 오는 올가미
“지시하신 대로, 장부서고(帳簿書庫)를 감찰조사원에게 개방해 주었습니다.”
“…고생했네.”
“아닙니다. 젊은 친구가 머리가 어찌나 총명한지, 순식간에 파악을 마치더군요. 제가 설명하거나 거들것도 없었습니다.”
“그 대공자가 직접 지명한 조사원일세. 전시를 수석으로 합격했던 수재 중의 수재라더군.”
“그런 인재들이 모여드는 낙양검가의 미래가 밝습니다. 저도 안심이 되는군요.”
“회계비서(會計祕書). 자네 또한 그런 인재 중 하나일세.”
“하하. 천하의 총관비서(總管祕書)께서 말씀이라도 그렇게 해 주시니, 기분이 좋습니다.”
“…자네의 노고는 잊지 않겠네.”
“뒷일은 맡겨 주시지요.”
“부탁하네.”
집무실을 떠나는 중년인, 총관비서의 허리께에서 일곱 개의 금실술이 흔들렸다.
자신의 집무실에 홀로 남은 회계 비서의 시선이 책상에 머물렀다.
총관비서를 통해 받은 작은 보자기가 그 위에 있었다.
* * *
대기실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서문집사가 감찰조사원 강호에게 물었다.
“…내원을 떠나지만 않으면 되겠지요?”
강호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요.”
그녀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장부를 잠시 쳐다보다가 미련을 버렸다.
이제는 원시적인 해결책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연소현에게 인사도 올리지 않고 돌아서서 대기실을 벗어났다.
그녀의 뒤를 집사들이 따랐다.
강호가 안경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절대 내원을 벗어나지 마세요.”
"...."
잠시 걸음을 멈췄던 서문집사가 나직한 코웃음 소리만 남기고 떠났다.
강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권력을 가진 이들의 뻔뻔함은 어디나 마찬가지로군요….”
일령이 그에게 물었다.
“저렇게 풀어 두어도 괜찮은 건가요?”
“아, 예. 괜찮습니다. 아직 저들의 신분이 죄인도 아니고, 게다가 감찰부의 이름으로 명을 내렸으니, 어긴다면 즉시 추포령(追捕令)을 발동시키면 되니까요.”
“그것보다는 저들이 뒤에서 꾸밀 일들이 걱정되는데요?”
“하하. 그 정도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연소현에게 예를 갖추어 말했다.
“대공자님, 저는 돌아가서 보고를 올려야겠사옵니다. 상황이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한 것으로 판단되옵니다.”
"그래. 그러도록 하여라.”
강호의 시선이 탁상에 놓인 장부를 향했다.
“이 장부는….”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내가 보관하는 편이 안전하겠지.”
강호는 시녀들의 허리께에 걸려있는 검들을 둘러보고, 연소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예, 송구하게도 제 경지가 낮아 만일의 사태를 고려한다면, 그것이 좋을 것으로 판단되옵니다.”
“알겠다.”
“그럼, 보고를 마치는 대로 즉시 돌아오도록 하겠사옵니다.”
연소현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일별하고,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는 의전집사에게 물었다.
“넌 거기서 뭘 하고 있느냐?”
“저, 저는….”
“됐고, 가서 식사나 준비해 오너라. 벌써 점심시간이구나.”
“예! 예! 알겠사옵니다!”
그가 급하게 달려 나가다가 다리가 꼬여 자빠졌다.
하지만 아무도 그 모습에 미소를 짓거나 웃는 이가 없었다.
“자아....”
연소현은 의자에 몸을 깊이 묻었다.
“내원총관. 자네는 어느 선까지 잘라 낼 준비가 되었지?”
그의 눈빛이 빛났다.
세쌍둥이 시녀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지금 연소현의 모습은 너무도 평안했다.
살기도 없었고, 기세도 없었다.
그러나 염 장로의 집사에게 잔혹 하게 폭력을 행사했던, 그날 밤의 모습보다도 지금이,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 * *
내원, 인적이 없는 곳.
서문집사가 다른 집사들을 돌아 보았다.
“비상시의 행동강령에 대해서 모두 숙지하고 있겠지?”
예,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도록 해야겠지.”
그녀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 애송이 조사원 놈에게 한 방을 먼저 먹긴 했지만, 아직 우리는 시작도 하지 않았지.”
“맞습니다.”
그녀가 집사들을 바라보았다.
“그 애송이 조사원 놈이 보고하는 것을 막을 생각은 하지 말아라. 뒷배가 있는 놈 같으니. 하지만 감찰부의 본조사가 시작되는 것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집사들이 결연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무검자 놈에게 한 방 먹여 줄 수 있도록 해 보자.”
그녀가 짧게 지시했다.
“모두 움직여.”
집사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들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고, 자신이 누구에게 도움을 구하며, 자신이 누구를 달래어야 할지 너무나 잘 준비해 놓고 있었다.
모두가 빠져나간 자리, 남아 있던 방 집사가 떨리는 눈으로 서문 집사를 바라보았다.
“…서문집사님은 누구부터 만나 보시겠습니까?”
“지금 당장 만날 수 있는 가장 높은 분부터 뵈어야겠지.”
서문집사가 방 집사를 바라보았다.
“너도 본가 내에 있는 방씨 가문의 어르신들께 기별을 넣도록 하여라.”
"예, 서문집사님.”
방 집사까지 모습을 감추자, 서문집사는 발걸음을 옮겼다.
내원의 더욱 깊은 곳으로 향할 시간이었다.
'무검자 놈…, 이 치욕은 언제가 되었든 반드시 갚아 주고 말겠다.'
조금 전까지는 방심하고 있었기에, 선공(先攻)을 허용했을 뿐이었다.
자신들의 영향력을 본격적으로 발휘하면, 이 정도의 위기는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판단했다.
* * *
염 장로는 가족들 그리고 참석 가능한 최측근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다.
무사 출신답게, 식단은 낙양검가의 장로치고 단출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덩치에 맞게, 양은 무식하게 많았지만
그때 수하 하나가 들어와 그에게 쪽지를 건네주고 사라졌다.
“ 으음."
그가 숟가락을 놨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대공자와 관련된 소식입니까?”
측근의 물음에 염 장로는 쪽지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대답했다.
“이 자식아. 아무리 그래도 너는 대공자'님'이라고 불러야지."
“죄, 죄송합니다.”
염 장로가 혀를 찼다.
“여기도 저기도, 대공자를 얕보는 자들이 넘쳐 나는군.”
구석에서 혼자 죽을 떠먹던 집법희(執法姬), 염백하가 한숨을 쉬었 다.
“한심한 자들….”
그녀의 혼잣말은 속삭이듯 작았지만, 염 장로의 측근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백호만이 바닥에서 고깃덩어리를 뜯어 먹으며 정신이 없을 뿐.
“대공자가 지명해서 소환했던 감찰조사원이 감찰부로 돌아갔다는구나.”
“아마, 상부에 보고 중이겠지요.”
“그래. 이제 그냥 끝나지는 않겠다.”
그가 측근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이 평소에 대공자를 얼마나 무시하는지 알고 있다.”
측근들이 그의 시선을 피했다.
대공자를 직접 만났던 염 장로가 그가 느꼈던 연소현에 대해서 직접 설명을 해 주었지만,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잘 보아 두어라. 대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무검자라면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무검자라면 일을 키울 리가 없을 것이다.”
그가 음식물을 우적우적 씹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던 놈들. 대공자를 잘 안다고 자신했던 놈들일수록, 그 착각이 어처구니없게 무너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테니.”
염백하가 고기를 더 달라고 보채는, 백호를 쓰다듬었다.
“아쉽네. 내가 건강했다면, 지금 당장 내원으로 뛰어갔을 터인데.”
그녀는 작게 속삭였다.
"그랬다면 한동안 백호, 네 식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인데 말이야.”
그녀의 말을 들은 측근들은 한동안 수저를 움직이지 못했다.
* * *
“회계비서께서는 안에 계시는가?”
회계비서의 집무실 앞을 지키는 삼계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예. 안에 계십니다. 하지만 손님을 받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지급(至急)한 일이야.”
“예외는 없습니다.”
집사는 책상에 앉아 서류를 처리하는 중이었다.
“내가 아니라 회계비서께도 지급한 일이라는 말일세.”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예외는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서문집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그가 당장 일에 휘말린 자신을 순순히 만나 주리라는 것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원에서 예산과 관련된 인물 중, 그녀 같은 실무자들이 접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책임자가 회계비서 였다.
그라면 이런 상황을 빠져나갈 구멍 정도는 몇 개나 가지고 있을 터였다.
운이 좋다면, 그 수단에 편승할수 있을 것이고, 운이 나빠도 최악의 상황은 피하게 해 줄 힘이 있었다.
“…일단 안에 기별하도록 하겠네. 문책은 나중에 따로 받지.”
삼계집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정말로 방문객을 막을 생각이었다면, 무사들을 입구에 세워 두었으리라.
“회계비서님. 회계비서님과 함께 예결위에 속해 있는 사계집사인 서문입니다.”
그녀는 몇 번 문을 두드렸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대답이 없으시면, 그분께서 정말 기분이 안 좋은 것이니 그냥 돌아가시는 것이….”
삼계집사의 말을 무시하고 서문집사는 문을 벌컥 열었다.
"...."
겁도 없이 허락조차 받지 않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에 삼계집사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이런 미친….”
삼계집사가 얼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서문집사를 뒤따랐다.
급히 집무실에 뛰어 들어간 그는 자리에 주저앉은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회계비서님, 죄송합니다! 이자가 막무가내로….”
그의 목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이, 이게 무슨;“
그의 다리가 주체할 수 없이 떨려 왔다.
몸을 휘청이던 그는 구르다시피 집무실을 벗어나 달렸다.
“누구 게 없느냐?! 누구 없냐고 하지 않느냐?!”
정신없이 외치는 삼계집사의 목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하지만 서문집사는 주저앉은 자리에서 일어날 기색이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유등 하나 없이 어두운 실내를 가로질러, 회계비서의 책상 위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대들보 아래, 목을 매단 시신 한구가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방 안에는 시신이 쏟아 낸 오물의 악취가 감돌고 있었다.
굳게 닫힌 덧창문들 사이로, 햇볕이 몇 줄기 들어오고 있었다.
그중 한 줄기 햇볕이 시신의 허리께에 매달린 금실술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여섯 개의 금실 줄.
그 시신은 회계비서의 것이었다.
“…이, 이럴 리가.”
겨우 새어 나온 서문집사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회계비서의 시신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는 원각정의 예산에 최종적인 책임이 있었지만, 그 정도는 얼마 든지 회피할 수 있는 위치의 인물이었다.
그녀가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무릎이 휘청였고, 다시 주저앉았다.
그녀는 차라리 기었다.
기어서 창문에 다다른 그녀는 벽을 붙잡고 일어나 창문을 열어젖혔다.
덧창문이 열리며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에 회계비서의 얼굴을 볼수 있었다.
그는 허연 얼굴로 눈을 뒤집고, 혀를 길게 물고 있었다.
다시 주저앉을 뻔한 그녀는, 그의 책상 위에서 작은 비단 주머니를 볼 수 있었다.
단아함 속에 감춰진 화려한 멋이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길로 그 비단 주머니를 주워 들었다.
그녀가 보자기를 책상 위에 뒤집어 들자, 안에서 검은 물건이 책상에 떨어졌다.
그것은 부서진 흑요석 가위였다.
장인의 솜씨로 화려하게 새겨졌던 자개가 일부 부서져 흩어졌다.
그 자개들이 반사한 햇빛이 보석처럼 눈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