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편 눈먼 돈
내원 본관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집무실.
이곳에서는 저급한 화로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집무실은 봄날처럼 따스했는데, 이는 집무실 한가운데에 위치한 중후한 책상 덕분이었다.
장한 두 명이 누워 자도 좋을 정도로 거대한 책상의 상판에는 열양석(熱陽石)이 들어 있어, 훈훈한 온기를 내뿜고 있었다.
날이 더워지면, 그 상판에는 열양석 대신 한빙석(寒氷石)이 교체되어 들어가게 되리라.
개인 정원을 통해 햇볕이 드는 창가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창가를 따라 늘어선 각종 향나무의 분재(盆栽)들에서 비롯된 향이었다.
해동국(海東國에서도 귀하다는 청자(靑瓷)들에 고이 모셔진 분재들이었다.
자개로 장식된 흑요석 가위가 분재를 섬세하게 다듬어 가고 있었다.
가위를 쥔 손은 주름이 자글자글하면서도, 피부가 곱디고와 굳은살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대공자가, 직접?”
예, 대공자는 현재 원각정을 담당하는 사계집사를 만나고 있습니다.”
흑요석 가위가 깨졌다.
평정심이 흔들린 탓이었다.
애초에 단단하기 짝이 없는 향나무를 손질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소재였다.
깨져 버린 가위를 보며 노인은 혀를 찼다.
“이런….”
웬만한 예술품 가격에 맞먹는 가위가 아까워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평정심이 흐트러진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었다.
보고하던 중년인의 시선이 가위를 향했다.
“명장(名匠)의 작품인데, 아쉽군요.”
“그런가…?”
노인은 부서진 가위를 버렸다.
그 행동에는 조금의 아쉬움도 없었다.
“하지만 가위는 많다네.”
노인이 탁자의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제각기 다른 모양의 흑요석 가위들이 정연한 모습으로 들어있었다.
하나하나가 이름 높은 장인들이 만든 예술품들이었다.
“필요하면 더 구하면 그뿐이지. 이것들은 아무리 비싸도 대체 가능한 물건에 불과해.”
중년인은 조용히 노인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니….”
노인은 서랍을 닫았다.
“손만 다치지 않으면, 분재만 상하지 않으면 족한 것이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노인이 손을 내밀자, 중년인이 지팡이를 공손히 건네주었다.
이어서 외투를 걸치는 것을 거들었다.
“나는 잠시 자리를 비울 터이니, 잘 처리하도록 하게.”
중년인이 깊이 머리를 숙였다.
“예, 총관님.”
노인이 떠난 자리에 중년인만이 남았다.
그의 시선이 노인이 가위를 버린 목함(木函)으로 향했다.
그 목함 안에는 부서진 가위들로 가득했다.
“가위는 많다, 인가….”
그의 허리께에서 일곱 개나 되는 금실 술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 * *
“좋은 향이군. 훌륭해.”
연소현이 찻잔의 향을 즐기며 말했다.
“...황송하옵니다.”
부랴부랴 모습을 드러낸 내원 의전실(儀典室) 소속의 삼계(三階)의 전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연소현이 코웃음을 쳤다.
“찻잎이 좋은 것인데, 왜 네가 황송하다는 것이지?”
"...."
의전집사가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났다.
“으음. 복건(福建) 무이산(武夷山)의 찻잎이군. 무이산에는 뛰어난 명차(名茶)를 생산하는 가문이 많지.”
입을 다문 삼계집사 대신, 세쌍둥이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주인님의 차에 대한 조예에는 따를 이가 없사옵니다.”
“무이산은 저도 들어 본 적이 있사옵니다.”
연소현이 불현듯 생각났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무이산의 명차 가문들 말인데, 분명 그중에서 서문가(西門家)도 있었지…?”
그의 시선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서문집사를 향했다.
“그렇사옵니까?”
“그러고 보면 천녀도 들어 본 것 같사옵니다.”
“무이산은 그 유명한 사패천(邪覇天)의 영역이지 않사옵니까?”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시녀들 사이에서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사패천은 다름 아닌, '이공자'의 외척(外戚) 세력이었다.
그가 불편한 기색의 서문집사를 바라보았다.
“혹시 네가 그 서문가와 관련이 있느냐?”
“…지금 시간이, 대공자께는 한가한 시간대일지도 모르겠사옵니다만, 저희 내원은 아주 바쁜 시간대이옵니다.”
“그런가?”
그녀의 말에 연소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그가 향만 즐긴 차를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방 집사에게 밀어주었다.
“너는 이거나 마시고 있거라.”
“소, 송구하옵니다만….”
연소현은 떨고 있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입을 다물게 했다.
“왜 서적값을 내어 주지 않은 것이냐?”
방 집사가 급히 입을 열었다.
“저, 전부 제가 잘못:“
연소현이 그녀의 앞에 놓인 찻잔을 톡톡 건드렸다.
“너는 이거나 마시래도.”
그의 시선이 서문집사를 향했다.
잠시 그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보던 서문집사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겨우 책값에 지나지 않사옵니까? 제가 직접 나서서 해결을 짓도록 하겠사옵니다.”
“나는 왜 책값을 내주지 않았는지 물었는데?”
세쌍둥이들이 자기들끼리 조잘거렸다.
“맞는 말이에요. 저 집사는 동문서답을 하고 있네요?”
“게다가 주인님께 사죄를 올리지도 않고, 뻔뻔하네요.”
“겨우 사계집사가 무슨 배짱이 저리도 두둑한 것일까요?”
그녀들은 속삭였지만, 이 조용한 대기실에서 그녀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들은 없었다.
대번에 서문집사 측 집사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참아야 할 시점이었다.
그 무검자가 내원총관의 이름을 걸고넘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그들이었다.
서문집사는 이를 악물고 답했다.
"…필요하시다면 제가 지금 당장이라도 사죄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연소현이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언제 사죄를 하라고 했더냐?”
세쌍둥이들이 다시 소곤거렸다.
“왜 책값을 내어 주지 않았냐고 물었는데 이상한 답변만 하는 것일까요?”
“왜 자꾸 딴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삼령이 서문집사를 보며 얄미운 미소를 지었다.
“계속된 동문서답이라, 혹시 서문가 출신이라서 그런 것일까요? '서문'동답?”
유치하기 짝이 없는 실없는 소리에 연소현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겨우 시녀 따위에게 놀림을 당하는 것은 서문집사로서 참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한낱 시녀 주제에 감히…!”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던 그때 가만히 있던 정아가 입을 열었다.
“감히 본가의 대공자님 앞에서 소리를 높이는 것인가?”
서문집사는 엉덩이를 공중에 띄운 채로, 다시 앉지도, 그렇다고 마저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녀의 얼굴이 분노와 치욕으로 붉어졌다.
그때 연소현이 탁자를 내리쳤다.
“아! 진짜 답답하게 구는구나. 도대체 왜 책값을 내주지 않았냐고 묻지 않느냐?!”
서문집사가 폭발했다.
“당연히 대공자께서 내원으로부터 원각정에 할당된 예산을 전부 가져가셨기 때문이지 않사옵니까?!”
“내가 받아 간 예산이 전부일 리가 없을 텐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그것이 전부이옵니다!”
연소현이 웃었다.
“한 줌의 예산도 남기지도 않고, 내 앞으로 나온 예산을 전부 털어서 내게 주었다고?”
“지금 내원을 모욕하시는 것이옵니까?!”
정아가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주인님. 거짓말이옵니다.”
그녀의 말에 참고 있던 집사들이 벌떡 일어났다.
“거짓말이라니?!”
“증거라도 있느냐?!”
“감히 근본도 없는 천출(賤出)의 시녀 따위가?!”
정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증거가 있느냐?”
집사 중의 하나가 품에서 서책을 하나 꺼내 들었다.
“이것이 바로 원각정에 대한 장부(帳簿)다!”
“그건…!”
서문집사가 급히 손을 들어 올렸지만, 일령이 집사의 손에서 장부를 낚아채는 것이 빨랐다.
“주인님, 여기 장부이옵니다.”
그녀가 공손히 연소현에게 장부를 바쳤다.
“자, 그럼 한번 볼까?”
연소현은 빙글빙글 미소 지으며 장부를 펼쳐 들었다.
그러고는 옆에 앉은 방 집사에게 물었다.
“방 집사야. 이 장부가 진짜 장부이더냐?”
방 집사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맞사옵니다. 진짜 장부이옵니다.”
“그래? 그럼 한번 볼까.”
연소현이 장부를 넘기기 시작하자, 서문집사는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다른 집사들도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연소현이 장부를 휘리릭 넘기는 꼴에 다들 속으로 비웃음을 지었다.
'아니, 무슨 장부를 저딴 방식으로 들여다보는 것인지.’
'계산을 맞추어 보아야 할 것인데, 그저 책장만 넘기기 바쁘구나.'
'하! 이제 보니, 시녀들 앞에서 잘난 척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이었구나.'
연소현이 장부를 덮었다.
“으음. 이 장부상으로는 문제가 없구나.”
그 말에 서문집사와 그녀의 집사들이 다들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되었사옵니까?”
“아니.”
서문집사의 말에 연소현이 고개를 저었다.
“이건 내원에서 원각정에 지출한 금액에 대한 장부일 뿐. 이래선 애초에 제대로 된 장부라고 할 수도 없다.”
서문집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신가요?”
“그래. 그러니 내가 직접 내원의 장부서고(帳簿書庫)에 들어가 봐야겠다.”
연소현의 말에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내원의 장부서고라니요? 대공자께서는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이 아니시옵니까?”
일령이 끼어들었다.
“감히 본가의 대공자께서 하명하 시는데, 자격을 논하는 것입니까?!”
옆에서 다른 집사가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계집아. 너야말로 착각하지 말거라. '대공자'라는 명칭은 저분의 신분일 뿐, 현재 칩거 중이신 대공자께서는 본가에서 아무런 직위도 없으시니.”
“그러니 내원에서도 기밀에 해당되는 사항을 요구하실 자격이 없으신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연소현이 장부를 두드렸다.
“그러면 내원총관에게 가서 직접 물어봐야겠군.”
서문집사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도록 하시지요. 어차피 내원총관께서도 대공자님께 장부서고 출입을 허가하시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맞는 말이었다.
내원총관이 일을 귀찮게 만든 그녀를 잘라 낼지 모른다는 것과 별개로, 그가 내원 전체의 장부가 보관되는 장부서고를 열어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럼 어쩔 수 없네.”
연소현이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 영감이 내가 여기까지 왔다는데, 집무실에 남아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정아가 그에게 물었다.
“그럼 여기까지 하시겠사옵니까?”
“그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인 것 같구나.”
'끝났다.'
그 말에 서문집사와 그녀의 집사들이 미소를 지었다.
“대공자님.”
서문집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대공자에게 예를 표했다.
“제가 이 자리를 빌려, 대공자님께 이제까지의 일들에 대해 사죄를 올리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녀의 집사들이 다들 일어나 마찬가지로 정중히 예를 올렸다.
방 집사 또한 급히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대공자께 사죄드리옵니다.”
서문집사가 나긋한 목소리로 연소현에게 말했다.
“앞으로는 제가 직접 나서서, 내원으로 말미암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 이 일은 이쯤으로 하시는 것이….”
연소현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아니. 답답하네, 진짜. 사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왜 책값을 안 내줬냐니까?”
"...."
대공자의 어린아이와 같은 처사에 서문집사와 그녀의 집사들이 할 말을 찾질 못했다.
연소현이 그런 그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물어도 제대로 답변을 해 주지 않고, 내가 직접 답을 찾는 것에도 한계가 있으니 이 일을 어쩌겠느냐.”
그가 정아를 돌아봤다.
“시녀장은 감찰부(監察部)를 소환하도록 하거라.”
감찰부라니.
모두의 움직임이 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