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편 올가미
젊은 여집사는 최대한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대기실에 들어갔다.
“…본가의 대공자님께 인사 올리옵니다.”
그녀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척하며, 대공자를 향해 예를 표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씩씩거리던, 시녀 중 하나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로, 슬쩍 시선을 돌려 보니, 원각정의 시녀복이 보였다.
시녀 따위에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대신 대공자를 향해 자신을 소개했다.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사옵니다. 그저 편하게 방 집사라고 불러 주시면 되옵니다.”
대답은 대공자의 곁에 서 있는 여인에게서 나왔다.
“방 집사라 했느냐?”
여인의 목소리에서는 냉기가 느껴 졌다.
“예, 그렇게 불러 주십시오.”
그녀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켰다.
'겨우 무검자의 시녀장 주제에….’
방 집사는 정아에 대해, 내원의 정보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이공자와 삼공자 사이에서 저울질하다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대공자 곁으로 도망친 요녀(妖女).
'아마도 이번 방문 또한 저 정아라는 년이 무검자를 부추겨 생긴 일이겠지.’
덕분에 자신만 귀찮아졌다.
“네가 원각정의 대금 지불을 거부했느냐?”
정아라는 시녀장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무거웠다.
“저기… 대금 지불 요청이라면, 서적 비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겨우 몇 푼 하지도 않는 책값가지고 귀찮게 굴기는.’
그녀는 겨우 내원의 이계(二階) 집사에 불과했다.
연소현이 수집하는 희귀 서적들의 가격을 겨우 몇 푼이라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문제였지만, 그녀 자신은 깨닫지 못한 문제였다.
게다가 지불 '요청'이라니.
이런 그녀의 태도는 내원이 그 소속원들에게 사유화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요청이라고? 언제부터 내원이 본가의 직계혈족의 비용을 처리하는 업무가 '요청 사항'이 되었지?”
방 집사는 급히 고개를 더욱 숙여 보였다.
“아아. 죄송합니다, 시녀장님. 제가 잠시 말을 실수하여….”
정아가 대답도 없이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천한 출신의 계집년이 무검자만 믿고 거들먹거리기는….'
그녀의 태도에 방 집사는 속으로 분노를 억눌렀다.
“그쯤 하면 되었으니, 설명이나 해 보거라.”
“예, 대공자님.”
연소현이 끼어들자, 눈엣가시 같던 시녀장이 물러났다.
방 집사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당장에 다그치지 못할망정, 설명을 듣겠다니.
'누가 무검자 아니랄까, 말하는 것부터 물러 터져서는.'
그녀는 어찌할지 모르겠다는 투로 연소현에게 호소했다.
“…그렇게 서류에 문제가 생겨, 제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 옵니다.”
“그래?"
연소현이 되묻자, 그녀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사옵니다! 실로 아뢰옵기 송구스러운 일이옵니다!”
이쯤 하면 대공자의 성격에 물러 나리라.
그녀는 이쯤에서 방점을 찍어야겠다고 판단했다.
“그 서적 중개인을 다시 불러들여, 제대로 처리할 터이니, 한번만 용서해 주시면….”
그녀는 무릎을 털썩하고 꿇었다.
눈물 몇 방울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제발 이 천한 것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주시어….”
안 그래도 접객당 출신의 시녀 따위에게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 분하기 짝이 없었던 터라, 눈물이 저절로 방울졌다.
“어디서 방정맞게 행동하는 것이냐?!”
“당장 그치지 못해?!”
옆에서 시녀들이 땍땍거렸지만, 그녀는 무시했다.
어차피 대공자만 공략하면, 끝나는 문제였고, 그녀는 자신의 미색에 자신이 있었다.
최근 미색이 고운 아이들만 시녀로 들인다는 대공자라면, 이런 자신의 눈물을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저런. 겨우 이 정도 일로 우는 것이냐?”
아니나 다를까, 대공자가 혀를 찼다.
“소, 송구하옵니다. 대공자님.”
그녀는 더욱 열심히, 눈물을 쏟아 냈다.
“...시녀장. 이 아이가 말하는 것을 들어 보니, 실수였던 것이 분명 한 것 같구나. 이쯤 하고 넘어가면 어떻겠느냐?”
그것은 요청처럼 들렸지만, 사실상 부드러운 명령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벌써 끝이네.'
싱거웠다.
방 집사는 속으로 작게 한숨 쉬었다.
“…주인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하는 수가 없겠사옵니다.”
역시나 자신의 생각대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그녀가 이야기했던 문제의 서류들만 확인하도록 하겠사옵니다.”
"...!"
방 집사의 몸이 굳었다.
“그, 그것이….”
“또 무엇이냐?”
전부 거짓부렁이었는데, 그런 서류들이 실재할 리가 없잖은가.
그녀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 서류들은 문제가 있었기에 지금 전부 소각되어 찾기가 어렵사옵니다.”
약간 허점이 있지만, 무검자와 한낱 시녀들이라면 찾지 못할 터였다.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겠구나.”
역시나 무검자는 무검자였다.
하지만 그저 평범한 시녀들로 여겼던, 옆의 시녀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렇다면 문서 소각을 증빙하는 서류가 있을 테니, 그것을 확인하면 되겠군요.”
“시녀장님, 일령의 말이 맞사옵니다. 주인님은 직계혈족이시니, 아무리 사소한 내용이라도 관련 문서를 소각하려면 책임자의 허가가 필요한 일이옵니다.”
이 시녀들은 겨우 시녀 주제에, 어떻게 업무에서 전문 영역에 속하는 서류 절차에 대해 알고 있다는 말인가.
“그러면 그것을 당장 가져오도록 하여라.”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더 이상 거짓말을 이어 나가려 했다가는 위험할 수 있었다.
저 시녀들은 결코 평범한 자들이 아니었다.
그녀들이 어떤 지식과 배경을 가졌는지 모르는 채, 말을 꾸며 낼 수는 없었다.
“다, 당장 설명을 올릴 수 있는 인원을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황급히 물러났다.
뒤에서 당황한 대공자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 * *
“뭐라고…?”
사계의 서문집사가 물었지만, 방 집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못 알아들어서 하는 말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들어 보니, 그 정아라는 계집이 뒤에서 부채질한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녀의 보고를 함께 들었던 다른 집사들이 혀를 찼다.
“그리고 근래에 새로 원각정에 들어갔다는 시녀들도 뭔가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러면 일이 지저분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서문집사가 눈가를 문질렀다.
“그런데 네가 전달한 대공자의 반응에는 한 점 거짓도 없는 것이 분명한 것이냐?”
방 집사가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무, 물론입니다! 감히 제가 서문 집사님 앞에서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서문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 집사는 하나부터 열까지 그녀가 직접 가르친 아이였다.
그리고 일을 그르쳤을 때, 스스로의 잘못을 덮으려 헛소리를 하지않기 때문에 여전히 총애하는 아이기도 했다.
“대공자의 반응이 뭔가 이상하십니까?”
“저는 원래 대공자의 성격에 큰 차이가 없어 보였습니다만.”
그들의 말이 맞았다.
그가 보였다는 반응은 예전부터 알고 있던 대공자와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대공자는 잘못을 저질러도, 이유부터 묻는다.
그것이 일부러 저지른 잘못 같아도,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으며, 일을 키우는 일도 없었다.
이제까지 이쪽에서 선을 넘어도, 적당히 받아치는 정도로 끝내 왔다.
단지.
자신이 그 정아라는 시녀의 일로 원각정을 방문했을 때, 보았던 대공자는 어딘가 조금 달랐던 것 같기도....
“…아니. 별것 아니다.”
파벌이니 뭐니, 요즘 과하게 예민한 탓이리라.
그때 그가 보였던 반응도 이전의 그와 대응 방식이 변한 것은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에 내가 직접 나서야겠구나.”
지금 겨우 서적의 대금으로 시작된 문제를 키우고 있는 쪽은 명백히 대공자 쪽이었다.
정아라는 시녀가 한 번에 큰 권력을 얻게 되자, 폭주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 애송이에게 권력이라는 것이 사실 '양날의 검'임을 느끼게 해 줘야 했다.
* * *
서문집사는 자신을 따르는 집사들을 이끌고 기세등등하게 대기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직위는 고작해야 집사였지만, 그것은 내원이란 조직의 특수성 때문일 뿐.
실제 그녀의 지위는 낙양검가 내에서 소규모 조직의 수장에 가까웠 다.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제 소개를 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무료한 듯이 턱을 괴고 있던 대공자가 입을 열었다.
“음. 얼굴은 알고 있지. 이름은 모르지만.”
심기가 불편해진 그녀의 수하들이 헛기침을 연발했다.
그 헛기침 소리에 연소현의 시녀들은 코웃음으로 대응했다.
정아라는 시녀장은 그저 대공자의 뒤에서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서문집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제 이름은….”
연소현이 손을 내저었다.
“되었다. 나는 네 이름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으니.”
순간 서문집사의 말문이 막혔다.
'이건, 내가 알던 대공자가 아니야!’
그렇다면 방 집사가 곧 들킬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뒤로 향했다.
방 집사의 시선이 혼란스러운 것을 확인한 그녀는 자신 또한 혼란스러워짐을 느꼈다.
"그래서… 내 계산서를 처리하지 않은 이유가 뭔지 설명하려고, 직접 무거운 걸음을 하셨나?”
서문집사는 뭔가 잘못되어 감을 확신했다.
지금은 후퇴할 때였다.
“아니옵니다, 대공자님. 제가 뭔가 착각을 한 것 같사옵니다.”
그녀는 방 집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아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저는 잘 모르겠사옵니다.”
그녀가 꼬리를 자르려 하고 있었다.
방 집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여기 온 것은 이 아이의 처분을 대공자께 맡기기 위함이옵니다.”
그녀가 물러설 기미가 느껴지자, 나머지 집사들도 잽싸게 행동했다.
그들은 이미 복도로 나가 있었다.
방에는 고개를 숙인 방 집사만이 남겨져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연소현이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저런. 겨우 이 정도 일로 우는 것이냐?”
이미 한번 들었던 말이었다.
그가 미소 지으며 눈물이 맺힌 그녀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방 집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손이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서문집사가 돌아섰다.
“그럼, 저는 일이 바빠….”
그때 그녀의 뒤에서 연소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나는 이 일에 대해서 책임이 있는 자의 설명을 듣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그녀는 무시하고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럼 내원총관에게 직접 묻는 수밖에.”
그의 목소리는 그녀의 가장 큰 약점을 꿰뚫었다.
내원총관에게 이 이야기가 들어가는 순간, 그녀의 처분은 확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방 집사에게 했듯이, 내원총관은 그녀를 내버릴 것이다.
어찌할 여지도 주지 않고.
그녀가 돌아섰다.
“…그 정도 이야기라면 저도 충분히 해 드릴 자격이 있는 것 같사옵니다만.”
“그래? 나야 좋지.”
연소현은 이미 그녀가 돌아설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상석에가서 앉아 있었다.
그는 방 집사의 손을 잡고, 자신의 옆에 앉혔다.
“그 전에 말이야….”
그가 미소 짓자, 그의 시녀장이 입을 열었다.
“본가의 대공자께서 직접 방문하셨는데, 차라도 한 잔 내어 오는 것이 어떻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