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63화 (63/350)

제13편 내원 방문

세쌍둥이 시녀들은 대공자가 직접 내원의 본관(本館)을 방문하면, 다들 벌벌 떨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입구에서부터 빗나가기 시작했다.

“오오 본가의 대공자님을 뵙사옵니다.”

정문을 지키는 경비대원에게 방문을 알리자, 곧 정문을 담당하는 집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는 과장된 목소리와 동작으로 연소현에게 예를 표하고는, 그들을 쪽문으로 안내했다.

그 모습에 정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찌 본가의 대공자께서 친히 방문하셨는데, 한낱 쪽문으로 안내를 하는 것이냐?”

그러자 늙수그레한 집사의 두 눈이 커졌다.

14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세쌍둥이 시녀들이 기가 찬다는 목소리로 다그쳤다.

“본디 본가의 직계혈족이신 대공자께서 방문하셨으니, 정문을 개방하고 예를 갖추어 맞이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리고 정문을 담당하는 집사가 아니라 의전집사(儀典執事)가 나서야겠지요?”

“고작해야 이계(二階)의 집사가 본가의 대공자님을 모신다니, 제정신인가요?”

늙수그레한 집사의 허리께에는 금실로 만든 술이 두 개가 걸려 있었다.

낙양검가의 다른 부서와 다르게 내원은 업무 특징상, 고위급 인원들이 대부분 '집사'였다.

그렇기에 그들의 서열을 일목요연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술의 개수를 이용했다.

술의 개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내원에서 높은 직위에 있음을 상징했다.

“아이고, 대공자님. 한 번만 사정을 봐주시지요.”

늙수그레한 집사는 허둥거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요즘 내원의 재정도 어렵고, 인원도 감축되어, 제대로 된 예를 올리기 힘든 것을 아시지 않사옵니까?”

그 꼴이 과장되어 믿음이 가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정아가 코웃음을 쳤다.

“원래라면 직계혈족을 지근거리에서 모셔야 할 내원이, 의전조차 하지 못하겠다는 말이더냐!”

나지막한 정아의 호통에도 집사는 그저 굽실거릴 뿐이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이게 다 소인이 부족하여….”

연소현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되었다. 넘어가자.”

그러자 굽실거리던 집사가 허리를 펴고는 헛기침을 했다.

“허험. 대공자님께서도 이리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지요.”

시녀들은 이를 악물었다.

“자 자, 다들 인상 쓰지 마시고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가 작게 낄낄거렸다.

“주름은 미모의 적이지 않습니까?”

“헛소리 말고, 안내나 하거라.”

연소현이 가볍게 다그치자, 그는 다시 굽신거리며 일행을 안내했다.

“아이고, 제가 주책을….”

연소현 일행은 다른 방문객들과 섞여, 내원의 안마당으로 들어서야 했다.

방문객들은 미모의 시녀들을 몰고 다니는 연소현을 흘금거렸지만, 그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연소현의 신분을 밝혀 봐야, 망신살만 뻗칠 것이 뻔했기에, 시녀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어야 했다.

정아의 한기가 서린 눈빛이 굳게 닫혀 있는 정문을 스쳤다.

용안으로 바닥의 자국을 살피니, 근래에도 몇 번이나 개방했던 흔적이 분명히 남아 있었다.

분명히 다른 직계혈족이 방문했을 때, 사용했던 흔적이 분명했다.

“신경 쓰지 말거라.”

연소현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안다는 듯이 사람 좋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허리께를 두드려 주었다.

“예, 주인님.”

일행은 다른 방문객들이나 내원의 인원들과 섞여 넓은 안마당을 빙 돌아서 본관으로 향해야 했다.

안마당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대로는 직계혈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길이었다.

“이미 아시겠지만, 이곳이 내원의 본관이옵니다.”

안마당에 진입했을 때, 이미 보았지만, 내원의 본관을 이루는 전각은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원각정에 존재하는 모든 전각을 합쳐 보아도, 내원 본관의 절반도 되지 않으리라.

“자, 안으로 드시지요.”

이번에도 그들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쪽문을 이용해야 했다.

본관의 안으로 들어서자, 화려하기 짝이 없는 넓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높은 천장으로 인해 환하게 들어 오는 햇살이 화려한 실내를 중후하게 비추고 있었다.

“자, 그럼 이쪽으로….”

“잠깐.”

정아가 그들을 대기실로 안내하려는 집사를 막았다.

“주인님께서는 원각정의 계산서를 거절한 책임자를 만나고자 하신다. 그 책임자를 불러내거라.”

그녀의 말에 집사가 의뭉을 떨었다.

“원각정의 계산서, 말입니까?”

“본가 내에 소문이 파다하거늘. 감히 네가 모른다 하겠느냐?”

정아가 다그쳤음에도 그는 태연자약했다.

“그렇습니까? 그런 일이 있었다니, 큰일이로군요.”

그녀가 기세라도 뿜지 않으면, 권력자들 사이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늙은 집사를 위압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내원이라는 조직이 워낙 거대하고, 바쁘기 짝이 없어 크고 작은 일이 쉴 새 없이 벌어지곤 합니다.”

하지만 그의 말과는 다르게, 내원을 오가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 바빠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가주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주가 쓰러진 상황에서 그들의 업무가 과다할 리가 있겠는가.

“…헛소리는 그만하고, 당장 책임자를 데려오지 못하겠느냐?”

시녀들의 눈이 점점 세모꼴이 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는 당혹스러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으음. 제가 지금부터 최선을 다해서 찾겠지만, 시간이 조금 걸릴지도 모르니, 대기실에서 편안하게 기다리시는 것이 어떠실는지…?”

그의 눈알이 연소현을 흘끔거렸다.

연소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대기실로 안내하거라.”

“아이고, 감사하옵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사옵니다.”

그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그들을 대기실로 안내했다.

“여기가 대공자님의 품위에 어울리는 가장 훌륭한 대기실이옵니다. 곧 접객을 담당할 집사가 올 것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사옵니까?”

"...."

그곳은 최상급 대기실은 맞았다.

하지만 직계혈족을 위한 의전 대기실이 분명 따로 있었음에도, 그는 연소현을 이곳으로 안내한 것이었다.

게다가 접객을 담당해야 할 인원들이 먼저 대기하고 있어야 함이 당연한 이치가 아니던가.

하지만 따지기도 전에 늙수그레 한 집사는 벌써 자취를 감춘 뒤였다.

연소현이 부들거리는 시녀들을 향해 미소지었다.

“되었다. 차나 한 잔 내어 오너라.”

연소현은 화려하기 짝이 없는 의자에 몸을 묻었다.

“주인님. 송구하오나….”

“음?"

세쌍둥이 시녀가 그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찻잎이 없사옵니다.”

“찻잎뿐 아니라 다기(茶器)도….”

연소현은 웃음을 터트렸다.

* * *

내원 본관의 한 집무실.

중년의 여(女)집사가 들여다보고있던 서류를 놓았다.

과거 정아의 외출복 건으로 원각정에 방문하였던, 바로 그 여집사였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그녀의 허리께에는 황금 술이 네 개가 걸려 있었다.

내원 본관 안에 별도의 집무실을 가질 만큼 상급에 속하는 사계(四階) 집사였다.

“대공자님께서 지금 본관의 대기실에 계신다고 합니다.”

“그자가?”

그녀의 서슬 퍼런 눈빛에 시종이 절절맸다.

"예. 그렇습니다. 원각정의 지불 요청이 거절된 것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녀의 이마에 주름이 갔다.

“…그 천한 중개인 놈 때문이라고?”

대공자와 내원의 갈등은 한두 해의 것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대공자는 가주직인을 내세웠고, 내원은 마지못해 그의 요청을 들어주곤 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시종이 거듭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만, 이야기를 전해준 것이 우리 파벌(派閥) 쪽 사람이 아니라서….”

그녀가 혀를 찼다.

“현재 정문 담당은 삼공자 쪽이었지.”

그때 그녀를 보필하던 삼계집사가 입을 열었다.

“그자가 직접 방문했다지만, 심려하실 것이 있겠습니까?”

집무실에 있던 다른 집사들도 앞 다투어 동의했다.

“아마도 본가 내에 소문이 돌았던 것이 원인이겠지요.”

“그자에게도 체면이라는 것이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한 집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무검자에게 체면이 있다고?”

“하인들을 전부 쫓아내고, 꽃처럼 아름다운 시녀들로 주변을 채우다 보니, 없던 체면도 생겨난 것이 아니겠는가?”

다들 껄껄거리며 연소현을 비웃기 바빴다.

그들의 계속되는 농담에 사계 여집사가 손을 내저었다.

“농은 그 정도로 하고. 그 서적 중개인이라는 놈을 담당했던 것이 누구냐?”

한 젊은 여집사가 여유롭게 손을 들었다.

“서문집사님, 접니다.”

서문집사라 불린 사계의 집사가 젊은 여집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의 허리에는 술이 두 개가 걸려 있었다.

젊은 나이에 이계에 오를 만큼, 능력이 출중하여, 서문집사가 어여삐 여기는 여인이었다.

“너라면 제대로 처리할 수 있겠지?”

젊은 여집사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부디 맡겨 주십시오.”

서문집사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방심은 금물이다. 그자의 칩거에 관련된 소문이 도는 것과 그자가 우리 내원을 방문한 것에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니.”

젊은 여집사가 서문집사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뒤탈이 나지 않도록, 제대로 처리해 두겠습니다.”

다른 집사들이 거들었다.

“우리가 지금 당장 그자와 충돌을 일으킬 것도 아니고, 별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무언가 착오로 문제가 생겼으니, 다시 서적 중개인을 불러 대금을 치르겠다고 하면 끝이겠지요.”

“그자가 달리 무검자겠습니까? 원각정의 정신 나간 아랫것들을 족치지도 않고 쫓아내기만 했던 것이 그자입니다.”

그들이 만약 염 장로의 집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긴장을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염 장로는 자기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게 둘 만큼 서툰 사람이 아니었다.

젊은 여집사가 서문집사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최악이라 해 봤자, 제가 그자의 발치에 엎드려 빌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녀가 입가를 가리고 미소 지었다.

“그래도 부족하다 싶으면, 눈물이나 한두 방울 흘려 주면 족할 것입니다.”

서문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자에 대한 것은 너에게 맡기마.”

* * *

연소현이 있는 대기실 가까이에 도달한 젊은 여집사는 안에서 들려 오는 높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찌 본가의 대공자님께 올리는 찻잎을 하품(下品)으로 준비할 수가 있지?!”

“당신들. 접객 하녀로서 기본이 되질 않았군요!”

“게다가 본가의 대공자님을 모시는 일에 고작 하녀들이라니요?! 당신들의 상관을 당장 불러오도록 하세요!”

세쌍둥이 시녀의 목소리가 끝나자, 쫓겨난 접객 하녀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복도로 뛰쳐나온 그녀들은 하나 같이 입가에 미소를 억지로 숨기고 있었다.

젊은 여집사의 모습을 발견한 그녀들은 고개를 깊이 숙여 보이며, 그녀의 옆을 지나갔다.

'내원의 인원 중에 대공자를 좋게 생각하는 이는 하나도 없지.'

그들은 그녀와 같은 파벌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내원 내의 어떤 파벌에 속한 이라도 연소현에 대해서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젊은 여집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잘됐군. 아주 판을 잘 깔아 뒀어.’

지금 그녀가 들어가서 진심으로 사죄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생각이상으로 일이 쉽게 풀려 나갈 것이 예상되었다.

그녀는 얼굴에 드러나려는 자신감을 애써 감추며, 대기실의 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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