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편 선(線) 밟기
“이런 제기랄!”
집어 던진 벼루가 박살이 나 흩어졌다.
집무실에 모여 있던 측근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역시 회의 중에 이공자님의 역정에 시달리신 모양이십니다?”
안 그래도 그놈의 소문 때문에 이공자의 심기가 묘하게 불편한 요즘이 었다.
벼루를 던졌던 이가 벌컥 화를 냈다.
“주군(主君)이라고 불러야지! 주군! 자네는 아직도 자네가 강남(江南)에서 떠도는 사냥개인 줄 아는가?!”
호통을 들은 이가 찔끔하여 고개를 숙이고 물러섰다.
눈치 싸움을 벌이던 이들 중 하나가 한숨을 쉬고 나섰다.
“결국, 금주가 실종되면서 잃어버린 검가동패(劍家銅牌)의 회수가 문제군요.”
지금 성질을 내는 그들의 상관은 다름 아닌, 금주에게 검가동패 수여를 추진했던 바로 그 책사였다.
“제기랄! 그 암천존자(暗天尊者)인가 뭔가 하는 놈은, 그년을 죽일거면 죽이지, 왜 동패까지 가져가고 지랄이야!”
그 때문에 상황이 매우 곤란해진 그였다.
이 낙양검가가 지배하는 낙양에서, 감히 검가동패의 소유자에게 직접 해를 끼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심지어 검가동패까지 실종되어 버린 상황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인지.
한참 혼자 성질을 내며, 값비싼 물건들을 부수던 그가 제풀에 지쳐,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한명휘의 이름을 걸고, 그 놈은 반드시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죽여 버릴 것이야.”
측근들은 슬금슬금 다시 한명휘의 옆으로 모여들었다.
“최고의 추적자들을 붙였으니, 곧 기별이 있을 겁니다.”
여1, 그렇습니다. 본가의 감찰부(監察部)가 나서기 전에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을 겁니다.”
현재는 이공자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감찰부의 움직임을 막아 놓은 상태였다.
이 문제가 공론화가 되면, 이공자의 이름이 여기저기서 오르내릴 터였으니.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인력을 동원해라.”
한명휘는 책상 위에 두 팔을 올리고, 얼굴을 감싸 쥐었다.
“예. 여유가 되는 모든 추적자를 투입하겠습니다.”
그는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 힘쓰며, 입을 열었다.
“그 무검자 놈의 소문에 대한 발원지 조사는 하고 있겠지?”
해당 사안을 맡은 측근이 앞으로 나서서 조심스럽게 답했다.
예 하지만 추적이 힘든 상황입니다. 여기저기서 전부 그 소문을 확인하려고 들쑤시고 다니는 통에….”
그들의 정보원들이 겁을 먹은 상황이었다.
“이건 틀림없이 전문가의 솜씨 야...”
한명휘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혹시 본가의 외부는 확인하고 있느냐?”
측근이 고개를 흔들었다.
“외부에서 도는 소문은 결국 본가에 근원을 두고 있지 않겠습니까?”
다른 측근이 팔짱을 끼고 답했다.
“하루에 본가를 들락날락하는 이들이 몇인데, 소문은 그들을 통해서 외부로 나갔겠지요.”
한명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랬다면 낙양 바닥에서 도는 소문은 틀림없이 과장되거나 없던 내용이 덧붙는 것 같은 왜곡(歪曲)이 생기기 마련이지.”
측근이 들고 있던 문서를 뒤적거렸다.
“…그러고 보면, 외부의 소문도 본가 내에서 도는 것과 대동소이합니다.”
한명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건 틀림없이 외부에서도 공작하는 놈들이 있다는 뜻이다. 그놈을 찾아내도록 하거라.”
"어, 하지만 지금 내부 조사에도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라….”
한명휘가 혀를 찼다.
“어차피 내부에서는 제대로 된 결과를 얻기 힘들다 하지 않았더냐?”
측근이 빠르게 한명휘의 뜻을 알아챘다.
“아! 그럼 현재 내부 조사 인력을 외부의 조사에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
다른 이가 나섰다.
“외부에 제가 친분이 있는 쓸 만한 놈들이 몇 있으니, 돕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넓은 낙양 땅에서 소문이 대동소이하게 돈다는 것은, 소문의 출처가 중분한 신뢰도를 가졌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음, 그럼 상인 조직이나 본가의 관계자, 혹은 정보상을 반드시 확인해야겠군요.”
“훌륭해.”
한명휘의 심기가 조금 풀리는 듯했다.
실력 있는 이들만을 고르고 골라 구축해 낸 자신의 사단이었다.
그들이 기민하고 노련한 모습을 보여 줄 때마다 그의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가 몸을 뒤로 기대며 물었다.
"...회의에서 듣자 하니, 사공자에게 심어 두었던 귀들이 모두 떨어져 나갔다는 정보에 대한 검증이 끝났던 모양이구나.”
측근 하나가 나섰다.
“예, 저희도 확인했습니다. 전부 한날한시에 실종되었답니다. 시신 또한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한명휘가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어려도, 그 당가(唐家)의 피를 이은 뱀 새끼다. 시체 따위를 남길 리가 없지 않나.”
“그러고 보니….”
즉근 중 하나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최(堆) 책사가 회의에서 엄청나게 깨졌겠군요.”
“사공자는 최 책사의 사단(私團)이 책임지고 있었지 않습니까?”
그 말에 한명휘가 킬킬거렸다.
“거의 대가리가 터질 뻔했지.”
다 같이 화기애애하게 웃음을 교환했다.
다른 사단(私團)의 실패는 그들 사단의 성공은 될 수 없을지언정, 적어도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수는 있었다.
“주목(注目).”
한명휘가 책상을 두드렸다.
모든 측근들이 웃음기를 거두고, 시선을 그에게 향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모두 잊지 않도록 하여라.”
한명휘가 몸을 일으켰다.
“우리는 언제나 빠른 정보 습득과 정확한 상황 파악을 통해, 문제가 커지기 이전에 선제적 조치를 취한다.”
그것은 한명휘 개인의 신조이기도 했으며, 그의 사단의 신조였고, 또 이공자 측 책사들 전체의 신조기이기도 했다.
매우 많은 자원을 요구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현재 삼공자와 마찬가지로, 외가(外家)로부터 엄청난 지원을 받는 이공자이기에 가능한 방식이기도 했다.
“더 이상의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알겠느냐?”
다들 우렁차게 대답했다.
“좋아. 그러면…."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공자 측의 문사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와 한명휘에게 쪽지를 건넸다.
쪽지를 펴 본 한명휘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무검자에 대한 또 다른 소문이라…."
그가 문사에게 물었다.
“이번에도 소문의 근원은 파악되지 않았겠지?”
그러자 문사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저는 직급이 낮아 잘은 모르지만, 이 소문은 출처가 확실하다고 들었습니다.”
“뭐?”
* * *
수습 시녀복을 입은 여인이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사실이란 말입니까?”
비단옷의 청년이 한숨을 쉬었다.
“불행히도 그렇소.”
여인이 주변의 다른 수습 시녀들과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그러면 어떻게 한답니까?”
“대공자님의 서적 대금을 어찌….”
“내원의 분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것일까요?”
내원에서 연소현의 서적 중개인에게 대금 납부를 거절했다는 이야기였다.
비단옷의 청년이 다시 한번 한숨을 깊게 쉬고 말했다.
“원래라면 다른 곳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되지만, 그대들과는 인연이 있기에 내 속을 터놓는 것이오.”
“물론입니다.”
“저희는 낙양검가 이전에 낙양의 사교계에서부터 인연이 있던 사이가 아닙니까?”
그녀들은 얼마 전, 집사부 앞에서 정아에게 혼쭐이 났던 부잣집 출신의 여인들이었다.
현재 그녀들은 다시 수습 시녀로 강등되어 재교육을 받는 중이었다.
“하아. 이 몸이 몇 번을 거듭하여 당부를 드렸었건만. 결국에 이런 일이 생기고 말았소.”
비단옷 청년은 슬픈 눈으로 먼 산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 일을 어쩌면 좋을꼬.”
수습 시녀들은 낙담한 그를 최선을 다해 위로해 주고서, 교육 일정을 핑계로 그를 뒤로했다.
충분히 거리가 멀어지자, 무리의 여왕벌이 썩은 미소를 지었다.
“흥. 우리 앞에서 원각정의 시녀 장이라고 잘난 척이나 하더니.”
다른 수습 시녀들도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직계혈족을 시중들어야 할 내원에서 무시를 당하다니요?”
“이 검가에서 대공자의 지위가 어떤지 잘 알겠습니다.”
“대단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꼴이 우습게 되었습니다.”
그때 일단의 무리가 지나가자, 그녀들은 급히 옆으로 비켜서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떠들어도 좋을 말과 안 될 말 정도는 구별하는 그녀들이었 다.
“그나저나 저분은 날이 갈수록 잘생겨져 가는 것 같습니다.”
방금 헤어졌던 비단옷 청년에 대 한 이야기였다.
“예전부터 낙양의 사교 모임에 참석하시기만 하면, 인기가 대단했던 분이시니까요.”
“개봉연가의 직계 출신이시기도 하지요.”
“외원의 의전 담당 고문이시기도 하구요.”
“아, 저런 분과 혼약할 수 있다면…."
그때 다시 일단의 무리가 그녀들을 지나쳤다.
그녀들은 다시 옆으로 비켜서, 고개를 숙였다.
* * *
“연하응이라. 한번 진영으로 모셔 와 대화라도 나눠 볼까요?”
“고작 방계 출신의 명예직이라면, 이공… 아니, 주군의 전각을 보자마자 오줌을 지릴 겁니다.”
“다그쳐 물어볼 것도 없이 줄줄 뱉겠지요.”
한명휘의 수하들이 낄낄거리며 웃어 댔다.
“그럴 필요 없다.”
한명휘가 고개를 저었다.
“놈은 원래부터 원각정에 수시로 들락거리던 이들 중 하나다. 내부 사정을 알고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어.”
이미 원각정의 고정 방문객 정도는 전부 신원을 파악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게다가 놈의 별명부터가….”
한명휘가 떠듬거리자 얼른 측근이 말을 받았다.
“'다리 달린 소문'이지요.”
한명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좀 특이하긴 하지만, 근본은 호사가(好事家)에 불과하다. 괜히 외원(外院)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도록 해라.”
이번 소문은 그들의 업무와는 관계가 없어 보였다.
“그럼, 찾아가서 간단히 확인 절차만 거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하지만 무례하지 않도록. 아무리 자신의 가문에서 쫓겨난 몸이라도, 어쨌든 현 개봉연가 소가주(小家主)의 형이니까.”
* * *
그 시각, 원각정의 정문.
언제나처럼 무명백의를 입은 연소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그의 뒤로는 화려한 외출복의 정아와 세쌍둥이 시녀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녀들의 낯빛은 빈말로도 좋다고 하기 힘들었다.
“외출하십니까?”
정문의 대기실에서 몸을 녹이고있던, 탈명귀검이 서둘러 빠져나왔다.
그가 외출한다면, 호위인 자신이 빠질 수는 없었다.
“아니다. 굳이 따라올 필요 없다.”
그 말만 남겨 두고, 연소현은 훌쩍 정문 밖으로 나섰다.
굳은 낯빛의 정아와 시녀들이 그를 따랐다.
세쌍둥이 중 삼령이 시녀장의 눈치를 살피고, 남아서 그에게 상황을 전해 주었다.
“내원에서 대공자님의 서적 대금 결제를 거부해…?”
탈명귀검의 입이 벌어졌다.
주변의 동료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노골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을 매섭게 쏘아보아, 웃음을 멈추게 만든 삼령이 고개를 내저었다.
“다행히 본가 밖으로 소문이 퍼지기 전에, 서적 중개인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어요.”
탈명귀검이 낮게 한숨 쉬었다.
“그건 다행이군.”
내부에서는 연소현의 이름이 더 떨어질 곳도 없었다.
하지만 외부에서까지 지금보다 연소현의 이름이 더 떨어지는 것은 달가울 수 없었다.
“그럼 지금 대공자님이 향하시는 곳은...?”
삼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원으로 가시는 것이에요.”
탈명귀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어, 어쩌시려고…?”
“저도 잘 모르겠어요.”
삼령의 어깨를 으쓱였다.
“주인님께서는 그저 '선을 밟으러 간다'고 말씀하셨을 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