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편 패자(霸者)의 후예
원각정의 대문을 들어서던 약왕은 사공자와 그의 수하들이 숲길을 따라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약왕 할아버지!”
사공자가 웃으며 달려와 그에게 안겼다.
"어이쿠, 이 녀석. 다 큰 녀석이 아이처럼 굴기는. 이 할아비 허리 부러진다.”
말과는 다르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정하기 짝이 없는 약왕은 사공자를 번쩍 들어서 안아 주었다.
“그런데 벌써 가는 것이냐? 이 할아비랑 더 놀지 않고?”
사공자가 폴짝 뛰어 약왕의 품에서 내려섰다.
소년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당연히 그러고 싶은데, 갑자기 할 일이 너무 많아져서, 죄송해요.”
약왕은 사공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그래. 그럼 다음에는 망할 제자 놈 말고 이 할아비를 보러 오렴. 알겠지?”
사공자가 해맑게 웃었다.
“하하, 약왕 할아버지. 재미없는 농담이네요.”
“…아니, 농담이 아닌데.”
약왕이 중얼거렸지만, 사공자는 이미 대문에 이른 참이었다.
“그럼, 약왕 할아버지! 다음에 또 봬요!”
약왕은 허허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는 정중히 인사를 건넨 사공자의 수하들이 전부 대문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허 참.”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현이 그놈이 바람을 집어넣은것이 틀림없으렷다.”
그는 팔뚝에 솟아오른 닭살을 문질렀다.
“의욕이 넘치니 살기(殺氣)까지 철철 흘러넘치는구나. 역시 피는 속이지 못한다니까.”
그는 다시 숲길을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그럼, 나도 좀 더 힘을 내 봐야지.”
* * *
사공자는 어두컴컴한 복도를 따라 걸었다.
해가 저문 지 오래였지만, 그 복도에는 그 흔한 유등(油燈)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시녀나 하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전혀 인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공간이었다.
먼지 한 톨 없는 바닥과 어둠 속에서도 언뜻 모습을 드러내는 화려한 실내 장식이 아니었다면, 폐허로 착각하기 충분한 곳이었다.
사공자는 예의 바른 걸음으로 복도의 끝에 다다랐다.
"소자(小子), 비(翡)이옵니다.”
온기라고는 한 점도 없어, 그가 입을 열자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어머니.”
그러자 문풍지의 저편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너라.”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원래라면 당연한 듯이 시녀가 문을 열어 주고, 닫겠지만, 이곳 당(唐) 태상부인(太上婦人)의 처소에는 시녀도 하녀도 없었다.
“그럼 소자 들어가겠사옵니다, 어머니.”
실내로 들어선 사공자는 북풍이 부는 바깥보다도 더한 냉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더 다가가지 않고, 닫은 문 근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얼굴에 생기(生氣)가 도는구나.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이더냐?”
약왕에게는 살기로 비쳤던 것이, 당 태상부인에게는 생기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예, 어머니. 큰형님이 드디어 마음을 잡고, 칩거를 끝내기로 하였사옵니다.”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사공자는 자신의 할 말을 다 했다.
“그래서 이 소자도 본격적으로 움직일 생각이옵니다.”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사공자는 공손히 손을 모아 엎드린 채 어머니의 말씀을 기다렸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어둠 속에서 당 태상부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아이가, 소현이가, 소가주(小家主)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그 목소리에는 희미하지만, 놀람과 충격이 담겨 있었다.
그런 어머니의 목소리에 사공자도 놀랐다.
하지만 소년은 애써 내색하지 않고, 담담히 대답했다.
예 그렇사옵니다. 이 소자는 앞으로 최선을 다하여, 큰형님을 소가주로 추대할 생각이옵니다.”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사공자는 자신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하얀 입김을 보며, 어머니의 말씀을 기다렸다.
“…네가 그 아이를 잘 보필할 수 있겠느냐?”
사공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큰형님이 대붕(大鵬)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한낱 물총새(翡) 같은 소자도 잘 알고 있사옵니다만….”
당 태상부인의 말이 그의 말을 잘랐다.
“내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비아(翡兒)야.”
비아는 사공자의 아명(兒名)이었다.
사공자는 깊이 머리를 숙였다.
“소자, 어머니의 말씀을 경청하겠사옵니다.”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물었다.
“비아야. 너는 그 아이가 성정이 유(柔)하고 선(善)하기 짝이 없다여겨, 네가 그 아이의 칼이 되고, 독이 되려 마음을 먹은 것이 맞느냐?”
“제대로 보셨사옵니다.”
“너는 제대로 보지 못했구나.”
사공자는 고개를 숙였다.
“가르침을 주시옵소서.”
평소 사공자의 애교 넘치는 모습을 보던 이들은, 그런 그의 모습이 낯설다 할 터였다.
불빛이라고는 한 점도 없이 한기만이 들어찬 공간에서, 멀찍이 떨어져 냉정하게 느껴질 정도의 말투로 주고받는 대화라니.
허나 이 기묘한 모습이, 그들 모자(母子)만의 소통 방식이었다.
"비아야. 너는 네 형을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 오히려 보지 못하는 것이 있구나.”
사공자는 조용히 어둠 속에서 이어질 어머니의 말씀을 기다렸다.
“소현….”
연소현의 이름을 부르는 당 태상부인의 목소리에는 감정의 희미한 편린(片鱗)들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사공자는 삶의 경험이 짧아, 쉬이 그 감정을 추측할 수 없었다.
“그 아이의 삶은 끝없는 투쟁의 연속이며, 그 아이의 삶은 아수라도(阿修羅道)와 같으니, '그 아이가 걸어온 길에는 이미 시체가 산을 이루었고', 그 아이가 걸어갈 길에는 피가 바다를 이룰 것이야.”
사공자는 어머니의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과연 그가 아는 큰형님과 어머니가 말하는 이가 동일 인물이기나 한 것인가.
“비아야. 그 아이는 칼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독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 자신이 이미 가장 날카로운 검이며, 그 자신이 이미 가장 치명적인 독이니.”
하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 어머니의 말씀을 기억하려했다.
그것이 그의 효심(孝心)이었으며, 어머니를 향한 신뢰였다.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부서져 흩어지는 마음을 지탱해 줄 단단한 지지대란다.”
어머니의 말씀이 끝나자, 그는 머리를 깊이 숙여 대답했다.
“…소자, 어머니의 말씀을 깊이 새겨 절대 잊지 않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래. 그것이면 되었다.”
그것은 그에게 허락된 시간이 모두 끝나 감을 의미했다.
“그러면, 소자. 돌아가 보겠사옵니다.”
“그래. 이 어미도 약왕께서 부탁하셨던 일이 바쁘구나.”
사공자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방향을 향해, 성심성의껏 절을 올렸다.
“비아야.”
문턱을 넘어서던 아들을 향해 어머니가 말했다.
“큰일을 하려거든 네 집안부터 옳게 다스려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
그것은 어미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의 노파심이었다.
사공자의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걸렸다.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이미 소자는 청소를 시작했사옵니다.”
당 태상부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기억하거라. 네가 어떤 피를 물려받았는지.”
사공자는 허리를 깊이 숙여 답하고, 물러났다.
아들의 발걸음이 멀어지자, 어미에게 남은 것은 적막과 한기뿐이었다.
그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당 태상부인의 혼잣말이 쓸쓸히 흩어졌다.
“…내가 지키지 못했던, 소유(素愈) 언니와의 약속. 그리고 그이와의 약속.”
여인의 그림자가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그 약속들을 너라도 지킬 수 있기를...”
* * *
낙양검가 어딘가의 지하 공간.
의자에 앉아 발을 까딱거리며, 사공자가 물었다.
“큰형님을 직접 뵈니 어땠어?”
그의 시녀장이 고개를 숙여 답했다.
“제가 그분에 대해서 배우고, 공부했던 것이 무의미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지?”
소년은 기분 좋은 미소를 띠고, 두 손을 활짝 펼쳐 보였다.
“큰형님이 칩거를 끝내시기로 한 이상, 본가의 소가주 자리는 큰형님의 것이나 다름없지.”
그가 의자 위로 올라서서 손뼉을 쳤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해졌다.”
그곳에 모여 있는 수하들의 시선이 그를 향해 모였다.
소년은 이를 드러내며,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큰형님께서 소가주의 자리에 오르시는 그날. 그분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서는것은 바로 우리가 될 것이다!”
모두가 두 손을 모아 외쳤다.
“충(忠)!”
이견도, 항명도 없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지하 공간에서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물론 두 손을 모으지 못하고, 대답할 수 없는 이들도 있었다.
소년은 의자에서 사뿐히 뛰어내려, 그들 중 하나에게 다가갔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곳에는 얼굴이 가려진, 시녀가 있었다.
의자에 앉혀져, 온몸이 결박당한 그녀는 몸을 뒤틀며, 뭐라 외쳤지만, 입에 물린 재갈로 인해서 그 의미를 알 수는 없었다.
"그래, 그래. 너도 내 말에 동의 하는구나.”
사공자가 친히 그녀의 얼굴을 가린 두건을 벗겼다.
그러자 얼굴을 드러낸 것은, 오늘 온종일 그를 보필했던, 통통한 시녀였다.
그녀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그에게 뭐라 호소했다.
“응? 뭐라고?”
그는 그녀의 입을 막고 있던 재갈을 풀어 주었다.
“주인님! 주인님! 저는 아닙니다! 저는 결백합니다! 제가 어찌 감히 주인님께…!”
사공자의 앙증맞은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눌렀다.
“괜찮아. 알고 있으니까. 네가 걱정할 것은 없단다.”
사공자의 입술이 그녀의 도톰한 입술을 덮었다.
그녀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최선을 다해서 그에게 호응했다.
혀와 혀가 뒤엉키고, 타액이 뒤 였다.
사공자가 입술을 떼자, 그들의 입술 사이에 이어진 은색 실이 빛났다.
“후후, 귀엽구나.”
사공자가 그녀의 애교 가득한 얼굴을 쓰다듬었다.
“주인님. 저는…!”
그녀의 두 눈이 터질 듯이 커졌다.
실핏줄이 불거지더니, 투둑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 피눈물이 되어 쏟아졌다.
“커헉…?!”
그녀가 기침하자, 코와 입에서 피가 쏟아져 소년의 얼굴을 더럽혔다.
하지만 소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녀의 보드라운 뺨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녀의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려 왔고, 경련을 일으켰다.
몸 전체의 핏줄이 시퍼렇게 곤두 서고, 살결이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갔다.
이윽고, 그녀의 피부가 누런 연기를 피워 내며 녹아내렸고, 가죽이 부글거리며 끓어올랐으며, 그 아래로 검게 물들어 가는 골격(骨格)이 드러났다.
그렇게 그녀의 풍만하던 육체는 무너져 내려, 기이한 색의 피 웅덩이만을 남겼다.
소년은 코를 찌르는 지독한 냄새를 맡으며, 수하들에게 명했다.
“간자(間者)들을 모두 처형하라.”
“충!”
그 메아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의자에 결박당해 있던 이들의 목이 떨어지고, 피가 치솟았다.
그들 중엔 하인도 있었고, 시녀도 있었으며, 집사와 무사도 있었다.
소년이 피바다가 된 장내를 둘러 보며, 활짝 웃었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나서기로 한 이상, 쥐새끼들을 살려 둘 수는 없지.”
그동안은 이공자와 삼공자를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그대로 두었던 이들이었다.
그는 시녀가 앉아 있던 의자 위로 올라서서 선언했다.
“이것이 이제까지 나를 얕보았던 이들을 향한 경고다.”
어머니의 당부대로, 그는 자신의 안에 흐르는 핏줄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사천을 공포로 지배했었던 가장 잔혹한 가문의 후예(後裔)이며, 위대한 중원국의 황실 아래에서 가장 이름 높은 가문의 적통(嫡統)이다.”
그것은 각성이었으며, 제례였다.
“이제 이 검가는 우리의 존재를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광기와 살기가 뒤섞인 우렁찬 함성이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