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59화 (59/350)

제9편 못난 사람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낙양의 길거리.

듬직한 아버지의 등에 업힌 소녀가 끊임없이 떠들고 있었다.

"...그래서 대공자께서 제 눈을 들여다보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니까요. '집법사자, 본인이 마음대로 끼어들어 그대의 판결을 막은것은 유감이오. 용서를 구하오.’ 그래서 저는 우아하게 대답했죠. ’괜찮습니다, 대공자. 본가를 위해서도 훌륭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염백하는 꺄악 하고 얼굴을 가렸다.

“들으셨어요? 들으셨어요?”

그녀의 품에 안겨 졸던 백호가 깜짝 놀라 그녀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렸다.

“너무 멋지지 않아요? 너무 낭만적이었어요. 저는 제가 유명 연애담(戀愛談) 속에 들어와 있는 줄 알았다니까요?”

염 장로는 도저히 어디가 낭만적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자신은 굳이 벌통을 건드려 벌을 확인하는 멍청이가 아니었으니까.

"어디가 낭만적이냐면요. 그 아름다우면서도 차가운 외면(外面)과 반대로 가슴 안에는 빈민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품고 있는 분이 실존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낭만적이지 않나요? 그렇죠? 그렇지 않나요?”

물론 벌 중에는 벌집 근처에 가지 않아도 튀어나와 공격하는 벌들도 있었다.

“…그래서 그분이 저를 이렇게 쳐다보시면서…."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마음이 조금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딸아이와 함께 해가 저무는 낙양거리를 걷는 것이, 도대체 얼마 만인지.

그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피 할 수 없는 문제를 입 밖으로 꺼내들 수 있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녀는 뭐가요? 라고 되묻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그 어려운 집법사자 시험을 통과할 만큼 명석한 아이였다.

밖에서 그 임무를 행하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안에서 내렸던 그 어떤 판결도, 한 점이라도 잘못된 것은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평생을 쌓아 온 것들이, 자신 하나 때문에 전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께 바라는것은 단 한 가지뿐이에요.”

딸아이의 목소리가 귓가를 통해 너무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저를 핑곗거리로 삼지 말아 주세요.”

그 목소리는 너무나 단호했다.

마치 그녀가 집법희로서 판결을 내릴 때처럼.

“…내가 너를 말이냐?”

그의 물음에 염백하는 그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저는 본가의 장로 아래 외동딸로 태어났어요. 그리고 부끄럽게도 집법사자이기도 하지요. 저는 제 위치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았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녀 자신이 누려 왔던 것에 대한 감사함이 깃들어 있었다.

“저는 그 권리만을 누린 채, 의무를 등한시하는 못난 딸이 아니에요.”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는 본가의 장로로서, 그리고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오롯이 판단하도록 하세요. 외로워도 어쩔 수 없어요. 괴로워도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딸아이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말은, 그 말만은 필요 없어요.”

“너는...."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저는 장로의 영애로서, 아버지의 딸로서 그 뜻이 어떻게 되었든 따를 뿐입니다.”

“그러냐….”

그녀는 아버지의 어깨가, 그 넓은 어깨가 조금씩 떨려 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저 거리에서 평범하게 볼 수 있는 딸과 아버지처럼 그렇게 걸었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겠다. 그리하마.”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의 목을 껴안았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리고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저와 공식적으로 의절(義絶)을 표명하시는 것이에요! 그리고 저는, 의지할 곳 하나 없는 몸이 되어, 원각정의 시녀로 들어 가는 거예요! 그리고 시녀 업무 중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못난 저는 선배 시녀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거죠! 저는 창고에 숨어서 달을 보며 눈물을 지어요. 그때! 대공자께서 창고에 들어오셔서 저를 발견하시는 거죠! 아아. 완벽해요! 완전 낭만적이에요! 또 하나의 완벽한 연애담이에요!”

"...."

그는 발걸음에만 집중했다.

당분간은 백만 마리쯤 되는 벌에 쏘이면서라도 걸어야 했다.

별수가 있겠는가.

어디서 이런 이야기를 떠들 친구 하나도 없는 것이 자신의 딸아이였다.

자신의 위치를 알고, 처신을 누구보다도 잘하는 아이였다.

그러니 별수가 있겠는가.

그것이 과분한 딸을 가진, 못난 아버지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별것 아닌 역할인데.

* * *

달이 휘영청 떠오른 원각정.

잔자갈이 깔린 넓은 마당에는 여기저기 화톳불이 타올라, 사방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 아래서 한 여인의 날렵한 그림자와 한 남자의 듬직한 그림자가 격돌했다.

화톳불에 반사된 검광이 사방으로 번뜩였다.

이윽고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어이쿠, 이런….”

사공자의 무사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채, 충격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좋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약간 거칠어진 숨소리와 함께, 손을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원각정의 시녀장, 정아였다.

“아니. 오히려 내가.... 아니지.”

무사는 상대를 무사로 인정했다.

그는 흔쾌히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의 몸을 일으켰다.

그는 그녀에게 정중히 포권했다.

“오히려 제가 한 수 배웠습니다.”

멀찍이서 둘러싸고 있던 사공자의 무사들이 박수를 치며 다가왔다.

“이야! 오랜만에 진짜 대단한 비무를 봤소. 개안한 기분이야!”

“시녀장께서 쓰신 무공이 그 유명한 섬영찰나(閃影刹那)가 맞소? 그 난해하다는 상승무공을 그 정도로 성취하다니 정말 대단하구려.”

자신들의 동료가 한낱 시녀에게 패했지만, 그들에게서는 조금도 나쁜 감정을 느낄 수는 없었다.

오늘 내도록 느꼈지만, 사공자의 수하들은 기본적으로 대단히 유쾌하고 시원시원한 사람들이었다.

정아는 고개를 숙여 그들의 칭찬에 답례했다.

“별것 아닌 재주입니다.”

그녀와 비무했던 무사가 그녀의 겸양에 펄쩍 뛰었다.

“아니, 시녀장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나는 뭐가 되오?”

“뭐긴 뭐야. 실력이 떨어지는 자가 지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패배자는 얼쩡거리지 말고, 저리 비키게.”

"그래, 그래. 우리는 이 시녀장님과 상승무학에 대한 이야기를 좀 나눠야겠으니.”

“이야기를 나누기는커녕 가르침을 받아야겠지만.”

우르르 몰려든 동료들에게 밀려 난 무사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난 아직 복기(復碁)도 못 했는데.”

이미 그의 말을 듣는 동료들은 없었다.

검가에서 가장 까다롭다는 상승무공을 익힌, 미인 시녀장은 그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다.

“것 참."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는 바닥에 떨어진 그의 검과 소검(小劍)을 주웠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바닥에는 그가 뿌렸던 철질려(鐵燕藜)와 침들, 그리고 비도(飛刀)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비무에서 사용할 수 없는 독(毒)을 빼고, 그가 아는 모든 절기(絶技)를 동원했었다.

“…이게 하나도 안 통한다고?”

그는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난장판이 된 마당을 보며, 그는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 * *

밖에서 왁자한 환호성과 떠들썩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사공자가 미소 지었다.

“소제, 아주 훌륭한 식사를 즐겼습니다. 역시 원각정의 식재료는 낙양 최고가 틀림없어요.”

“다행이구나.”

상 위가 정리되고, 통통한 시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공자와 온종일 붙어 다녔던 그녀 였다.

그녀는 정중히 인사를 올린 후, 입가심을 위한 식후 차를 탁자 위에 올렸다.

“고마워.”

사공자의 감사에 그녀는 애교 있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 방을 나섰다.

“아직 원각정에 사람이 부족하여, 미안하게 되었구나.”

“아닙니다, 큰형님. 이럴 때 서로 도와야지요. 형제가 좋은 것이 또 뭐겠어요?”

문이 닫히고, 인기척들이 멀어졌다.

이제 형제가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었다.

“이 사업은 보이는 것 이상으로, 소제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사공자는 의젓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말투 또한 달라졌다.

“큰형님께서 오늘 베풀어 주신 가르침과 저를 위해서 해 주신 일들을 이 소제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연소현은 손을 저었다.

“...다른 두 놈이 치고 나가는 것이 너의 입지를 흔들고 있는 모양이구나.”

사공자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습니다. 이 사업은 그 규모도 규모이지만, 실상 가장 중요한것은 후계 자리다툼에서 나가떨어 지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하니까요.”

“소가주(小家主)가 되고 싶은 욕심이 있느냐?”

"...."

연소현은 가볍게 향을 즐기고 찻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가 던진 물음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사공자는 어느 때보다도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이공자와 삼공자에게 검가를 넘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연소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큰형님.”

사공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이제라도…?”

연소현이 그의 말을 끊었다.

“사천에서 온다는 그 투자가들 말이다.”

사공자는 즉시 고개를 숙였다.

“예, 큰형님.”

“너를 곤란하게 만드는 이들도 있다고 들었다. 맞느냐?”

사공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말도 못 합니다. 아무리 설득을 해도, 굳이 사업단 전체가 움직이는 것과는 별개로 낙양을 돌아보겠다고 하는데….”

그가 탁자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었다.

“뭐, 어쩌겠습니까. 아쉬운 것이 제 쪽이니 어떻게 해 봐야겠지요.”

게다가 그들은 당장의 투자 금액과 상관없이, 이 사업의 중장기적 성공 여부에 큰 영향을 끼칠 중요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에 대한 사공자의 설명을 듣던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들을 내가 맡도록 하마.”

그의 말에 사공자의 움직임이 멎었다.

“…큰형님.”

“왜?”

사공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거기까지' 하시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겁니다.”

소년은 말라 오는 입술을 핥았다.

“빈민들의 이주는 그저 큰형님께서 막냇동생을 위해서 잠시 도와주신 정도에 불과합니다. 큰형님께 드리고자 하는 지분도, 일종의 고문료(顧問料) 같은 것이지요.”

“그렇지.”

사공자가 식어 가는 차를 들이켰다.

“그런데, 그보다 더 하시겠다는 것은, 이제 이 사업에 저와 함께하 시겠다는 뜻이 됩니다.”

“검가의 대공자와 사공자가 함께 진행하는 사업이 되는 것이지.”

연소현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내가 새로운 조건을 제시하려는 것이기도 하고.”

사공자는 머리가 아찔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큰형님.”

소년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제 칩거를 끝내시려는 겁니까? 이공자도 삼공자도 그리고 큰 형님을 싫어하는 이들이 벌 떼처럼 일어나 막아설 것입니다.”

연소현이 역으로 물었다.

“너는 소가주가 되고 싶은 욕심이 있느냐?”

사공자가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내팽개쳐졌다.

“아니요!”

소년이 식탁을 내리쳤다.

“절대 아닙니다!”

그가 소리쳤다.

“본가의 소가주는 반드시 큰형님만이 오르실 자격이 있는 자리입니다!”

연소현이 활짝 웃었다.

그는 자신이 몇 남지 않은,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을 더는 잃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 실패할 것이 분명한 사업'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했다.

이 귀여운 동생이 못난 큰형님을 위해서, 그 많은 고생을 했던 '미래'를 그는 알고 있었다.

“나는 이제 이 칩거를 '공식적'으로 끝낼 생각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이 못난 큰형님은, 앞으로 누가 보아도 가장 자랑스러운 큰형님이 될 생각이었다.

“나와 함께하겠느냐?”

그것은 하나 마나 한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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