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편 원흉(元兇)
염 장로의 딸, 염백하는 아버지와 대공자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녀 나름대로 좀 더 솔직해지자면, 아버지보다는 대공자를 기다리는 쪽이었지만.
아마 그들은 자신의 병증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리라.
그 대화에 자신의 운명이 바뀔지도 몰랐지만, 그녀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대범한 그녀였다.
염 장로의 수하들에게 집법희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그들의 외경을 한 몸에 받는 그녀다운 성격이었다.
그것보다는….
“어머, 귀엽네. 이름이 뭐니?”
자신의 발치에 엎드려 있던 작은 하얀 짐승, 백호가 쫄랑쫄랑, 사공자의 시녀에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안 돼 백호 돌아와!”
백호는 얌전히 다시 자신의 발치로 돌아왔다.
아쉬워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시녀를 보내고, 염백하는 백호를 내려다보았다.
“위험하다니까.”
백호는 귀를 팔랑거리고, 낑낑거리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안 되는 건, 안 돼.”
백호가 포기하고 턱을 괴고 앉으려는 찰나, 또 다른 시녀가 백호를 발견했다.
“어머, 귀여운 고양이네.”
백호가 발딱 하고 일어서자, 염백하는 손을 뻗어 백호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또 한 명의 시녀가 아쉬워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부터 이런 식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백호가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어휴. 이 장난꾸러기.”
그녀는 잠시 백호의 배를 간지럽히며 놀아 주었다.
아무래도 피 냄새가 많이 나는 곳이라, 백호의 야성(野性)이 자꾸 자극받는 모양이었다.
“저 사람들은 벌받아야 할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니 얌전하게 있자. 알았지?”
백호가 조금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다시 백호를 바닥에 놓아주었다.
“그래, 그렇게 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얌전히 있는 거야.”
그때 또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후, 주인님 말을 잘 들어야 착한 아이지.”
그러자 또 백호가 발딱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이 나서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꼬리를 흔들며, 다가가려던 백호였다.
“아이 참…!”
백호를 향해 명령하려던 염백하의 입이 멈췄다.
백호가 꼬리를 세우고 그대로 그 자리에 멈춰 섰던 것이었다.
“후후. 왜 그러니? 이리 와 보렴, 호랑아.”
여인은 그 자리에서 쪼그리고 앉아 백호에게 손짓했다.
하지만 백호는 꼬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호랑아? 저 시녀가 백호를 호랑이라고 불렀어?’
누가 봐도 '평소'의 백호는 하얀 고양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염백하는 놀란 눈으로 자신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원각정의 시녀복을 곱게 차려입은 그 여인은 염백하가 놀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는 특이하게도 눈동자의 색소가 아주 옅었는데, 햇빛에 반사되니 금안(金眼)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 이리 와 보래도.”
염백하는 순간 여인의 눈동자가 세로로 갈라지는 것을 본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백호가 꼬리를 내리고, 귀를 접은 채 얌전히 여인에게 다가가는 모습에 한 번 더 놀랐다.
“위, 위험…!”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다르게 백호는 얌전히 여인의 손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어머어머, 너 털이 참 보드랍구나.”
여인은 활짝 웃으며, 백호를 간지럽 혔다.
그러자 백호가 몸을 뒤집어 배를 보이고 재롱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백호야….”
그 순간 염백하는 놀라움과 함께 서운함을 동시에 느꼈다.
“어머, 이 아이의 이름이 백호(白虎)인가요? 네게 잘 어울리는 멋진 이름이네.”
여인이 칭찬하자 백호가 앞발을 휘저으며, 열심히 재롱을 부렸다.
여인은 그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멋진 모피를 가졌구나. 딱 주인님의 새 겨울 외투를 만들기 좋겠어.”
백호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 모습에 여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란다, 농담.”
하지만 백호는 이미 염백하의 발치로 도망친 뒤였다.
녀석은 염백하의 치맛자락에 숨어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여인을 노려봤다.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염백하에게 말했다.
“덩치가 큰 녀석이라, 밥 먹이기가 힘들겠네요.”
그 말에 염백하가 당황했다.
“저기, 혹시 우리 백호를 알아보시는 건가요?”
“아, 그건….”
여인, 정아가 대답하려던 참이었다.
“이 쓰레기 같은 검가 놈들아!”
한마디의 외침에 소란스럽던 장내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 * *
모두의 시선이 대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향했다.
깡마른 남자였다.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땟국이 줄줄 흘러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자였다.
그는 절뚝거리며, 안마당으로 들어오며 외쳤다.
“검가! 이 죽일 놈들아! 이 저주받을 놈들아!”
경계를 서던 무사들의 눈초리가 조금씩 사나워졌다.
“미친 자인가?”
염백하의 혼잣말에 정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친 사람은 아니에요. 그저….”
염백하가 정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 눈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네놈들이 입고 있는 옷! 네놈들이 허리에 차고 있는 칼! 그 하나만 가져다 팔아도 이 마을 전체가 하루는 굶어 죽을 걱정이 없을 것이다! 이 천벌받을 놈들!”
남자는 무사의 멱살을 잡았다.
“뭐? 도우러 와? 애초에 네놈들이 우리를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니냐?!”
무사의 눈이 가늘어지며, 그의 손이 슬금슬금 칼 손잡이를 향해 움직였다.
하지만 멀리서 사공자가 손을 들어 올리는 모습에, 그는 한숨을 삼키며 팔짱을 꼈다.
“네놈들이 우리를 이 낙양이라는 땅 안에 가두어 놓고 사육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대답해 보아라!”
남자는 침을 튀겨 가며 소리쳤지만, 무사는 묵묵부답이었다.
남자는 절뚝거리며 돌아서서 눈에 보이는 검가의 사람들에게 손가락질했다.
“너희가 저렴한 노동력이 필요해서 우리를 이 꼴로 만들어 놓고! 감히 돕니, 마니, 지껄이고 있어?!”
사공자의 의지에 따라 그의 사람들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남자는 이번엔 빈민들에게 다가갔다.
“거기! 자네! 지난달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나? 저놈들이 제대로 된 처방만 해 줬어도, 절대 돌아가실 분이 아니었지 않나?!”
남자의 말에 지목당한 빈민이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빈민의 반응에 입술을 깨물었다가, 고개를 돌렸다.
“거기! 아랫집 아주머니 아니오!”
그에게 지목당한 여인이 다른 이들의 뒤로 숨었다.
남자는 절뚝이며 그 여인에게 다가갔다.
"아주머니의 아이들이 왜 둘이나 죽었소? 이게 전부 저놈들 탓 아니오? 왜 가만히 저놈들이 주는 것이나 받아먹고 있는 것이오?!”
남자가 여인을 붙잡으려 하자, 다른 빈민들이 남자를 제지했다.
“어이, 자네 왜 이러나…!”
“좀 진정해! 이러다가 경을 치게 생겼구먼!"
남자는 격하게 몸을 뒤틀었다.
“너희 모두 병X 새끼들이야! 쌍 X신 새끼들이라고! 눈앞에 원흥들이 있는데! 눈앞에 원수들이 있는데!”
“어허! 이 사람이!”
남자의 저항이 너무 거칠어지자, 빈민들이 어쩔 수 없이 남자를 밀어냈다.
남자는 땅바닥에 보잘것없이나 뒹굴었다.
그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목이 터져라 외쳤다.
울부짖었다.
“놈들이 의도하는 대로, 목숨 걸고 죽어라 일하고! 그러고도 자기 가족 하나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면서! 그러면서 놈들이 주는 것을 받아먹으면서 엎드려 감사해하고…!”
남자의 목이 쉬어 터졌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너희는 개돼지들보다도 못한 놈들이다! 그러니 개돼지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사는 것이야!”
그가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여기에 검가의 대공자인가 뭔가 하는 놈이 있다는데, 내 그놈 면상을 한번 봐야겠다!”
사공자가 입맛을 다셨다.
“그놈은 극락 같은 곳에 살면서, 찻물로 목욕을 하고, 금종이로 똥을 닦는다면서?!”
이제 칼자루를 쥔 무사들은 그가 손을 내리기만을 기다렸다.
“나와라! 이 천하의 개자식아! 어미의 이름을 팔아 우민들을 현혹하는 이 개호X 자식아!”
사공자의 손이 점차 내려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선을 넘었다.
죽이진 않더라도, 제압해야만 하는 시점이었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이 겁쟁이 자식아! 이리 나와서 죽일테면 네놈이 직접 날 죽여…!”
굉음이 울려 퍼지며, 흰 연기가 자욱하게 몰아쳤다.
무사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넓게 포위망을 구성했다.
“호, 호랑이?!”
“백호다!”
흰 연기 속에서, 남자를 앞발로 가볍게 누르고 선것은 호랑이였다.
그것도 평범한 호랑이가 아니었다.
집채만 한 크기의 백호였다.
“으 으으… "
남자가 호랑이의 앞발을 붙잡고, 용을 써 보았지만, 소용이 있을 리 없었다.
호랑이가 으르렁거린 것만으로, 지붕이 흔들리고, 기와가 떨어질 정도였다.
혼비백산하여 도망가려던 빈민들이 전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고, 무사들조차 무릎이 떨려 오는 것을 느꼈다.
“참. 아버지의 당부도 있었건만, 더 이상은 도저히 참고 들어 줄 수가 없군요.”
놀랍게도 그 호랑이의 등에는 한 소녀의 모습이 있었다.
“염 소저!”
사공자의 외침에 염백하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어머, 사공자님. 계셨군요.”
소녀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감히 검가의 이름을 더럽히고, 모욕한 자입니다.”
여리기만 하던 그녀의 목소리에 지금은 범접하기 힘든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낙양검가의 집법사자(執法使者)가 가진 권한으로, 이 자리에서 현장법정(現場法庭)이 개정(開廷)됨을 선포합니다.”
호랑이, 백호가 아가리를 벌리자, 안에서 사람 손바닥만한 이빨들이 홍흉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현장법정의 선포에 사공자는 한숨을 쉬며 물러났다.
어차피 어떤 형태로든 검가의 위신을 세워야 하는 때였다.
집법희가 나선다면, 적어도 일벌백계(一罰百戒)의 효과는 확실하리라.
무사 중 하나가 백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사공자에게 물었다.
“주군. 저 소저가 본가의 집법사자가 맞습니까?”
사공자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그의 말에 모든 무사가 검을 거두고, 물러났다.
집법사자의 현장법정에 끼어들 정도로 미친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이제부터 본 사자가 너의 죄목을 밝히겠다. 첫째, 너는 백성들 앞에서 본가의 이름을 고의로 더럽혔으니, 이는...."
소녀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져 갔다.
“살벌하네.”
시녀장의 혼잣말이었다.
“영물(靈物)을 탄 집법사자라니. 저것이 그 집법희의 진짜 모습인가….”
통통한 시녀가 깜짝 놀랐다.
“그 집법희 말입니까? 그게 뜬소문이 아니라 실존 인물이었나요?”
“그래요. 병약한 탓에 외부에서 활동하고 있진 않아, 그저 뜬소문으로 여겨지지만.”
호랑이 아가리가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에 남자는 오줌을 지리며 발버둥 쳤다.
“아마 그녀가 건강했다면, 본가의 아랫것들 중에서 그녀를 모르는 이가 없었을 거예요.”
통통한 시녀가 마른침을 삼켰다.
집채만 한 백호를 타고 다니는 집법사자라니.
원래도 저승사자나 다름없는 집법사자가 저승사자를 타고 다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기까지가 너의 죄목이다. 반론이 있는가?”
들려오는 것은 남자의 비명뿐.
“없는 것으로 알겠다.”
이제 남은 것은, 선고뿐.
“그렇다면, 낙양검가가 본 집법사자에게 부여한 권한으로 판결을… ”
“멈춰.”
감히 집법사자의 현장법정을 방해하는 이가 있다는 말인가.
모두의 시선이 그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향했다.
“대공자님…?!”
염백하와 백호를 향해 다가온 것은 다름 아닌 연소현이었다.
그는 손을 들어 천천히 백호의 머리에 가져갔다.
놀랍게도 백호는 그의 손길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주줌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명백히 겁을 먹은 백호의 눈알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물러나라.”
나직한 그의 목소리에, 백호가 흰 연기와 함께 자그마한 고양이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꺅!”
염백하는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는데, 한 시녀가 몸을 날려 그녀를 받아서 내려 주었다.
세쌍둥이 시녀 중 첫째, 일령이 었다.
“고, 고마워요.”
“별것 아닙니다.”
그때 백호가 다다다 뛰어와 그녀에게 안겼다.
"야!”
그녀의 외침에도 백호는 그녀의 품에 고개를 처박고 덜덜 떨 뿐이었다.
“백호야…?”
백호가 이렇게 겁을 먹은 것을 본 것은 그녀도 처음이었다.
심지어 아버지가 진심으로 화를 내도, 그녀에게 숨어 빤히 그를 쳐다보던 백호였다.
염백하는 그런 백호를 안아 주며, 떨리는 시선으로 대공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뿐 아니라 모두가 대공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공자는 죽다가 살아난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깐 눌린 것뿐이었지만, 남자는 이미 피투성이였다.
심각한 상처는 없어 보였지만, 남자는 쉬이 일어나지 못했다.
“너…!”
하지만 놀랍게도 남자의 눈은 죽지 않았다.
연소현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네가 그 연가(淵家) 놈이구나…!”
백호에게 눌리며, 갈비뼈를 다친 것인지 남자는 제대로 소리를 치지 못했지만, 그의 눈에 깃든 증오는 진실되 었다.
연소현은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래.”
그의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낯설었다.
“내가 대공자 연소현이다.”
남자를 내려다보는 연소현의 눈에서 누구도 쉬이 감정을 읽어 낼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