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56화 (56/350)

제6편 아버지와 장로

“염 장로라….”

한쪽 구석에서 자신의 수하들을 다독이던 사공자였다.

소년은 빈민들 사이에서 줄을 서 있는 염 장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본가의 장로쯤 되는 자라면, 황궁 어의(彳卸醫) 출신의 의원도 불러다 만날 수 있건만. 얄궂은 일이야.”

소년의 눈이 가늘어졌다.

염 장로는 일신의 무력을 바탕으로 수많은 공을 세웠으며, 훌륭한 처신과 판단력으로, 수라장과도 같은 검가 내부의 정계에 자리 잡는데 성공.

결국, 검가의 장로 자리에 올라선 인물이었다.

연(淵)씨 가문의 사람도 아니면서, 바닥부터 시작해 장로회에 당당히 들어선 그를, 낙양검가의 무사들은 입지전(立志傳)적인 인물로 회자하곤 했다.

“그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거검(巨劍)조차 소지하지 않았네요.”

그의 곁을 지키던 시녀장의 말이었다.

“수하들조차 거느리지 않고 말이지.”

심지어 검가의 장로라는 말에 두려움을 느낀 빈민들이 줄에서 벗어 나려하자, 그들을 만류하기까지한 염 장로였다.

“그리고 등에 업힌 것이 그 집법희(執法姬)로군요.”

“그래.”

그때 젊은 문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주군. 가서 인사를 나누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사공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되었다. 여기서 알은체해 봐야, 그를 더 곤란하게 만들 뿐이지.”

사공자는 이미 약왕과 염 장로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고 있었다.

“그보다는….”

그가 시선을 거두고는 손뼉을 쳤다.

“입이 살아서 나불거리는 것을 보니 이제 충분히 쉰 모양이구나.”

괜한 말을 꺼내 부스럼을 만든 문사를 향해, 주변에서 사나운 눈초리가 쏟아졌다.

“다들, 주인님의 말씀을 들었겠지요?”

시녀장의 말에 휴식을 취하던 사공자의 수하들이 일제히 환자들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중립파 장로와 큰형님의 만남이라:“

기대된다는 미소를 지어 보인 사공자였다.

* * *

소녀는 아버지가 불편할까 봐, 최대한 얌전히 그의 등에 붙어 있었다.

“…이렇게 대공자님을 직접 뵐 수 있다니, 꿈만 같아요.”

가녀린 딸의 목소리는 꿈속을 걷는 것 같았다.

'오늘만 도대체 몇 번째 들었던 말인지.'

염 장로는 고개를 내저었다.

“너라면 알아서 잘 처신하겠지만….”

“예. 명심하고 있어요.”

딸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만 벌써 몇 번째 듣는 말인지….”

"...."

그녀는 연신 아버지의 어깨너머로 연소현을 훔쳐보았다.

“…정말 잘생기셨어요. 화폭(畫幅)에 담겨 있던 모습 그대로예요.”

염 장로는 딸의 말에 작게 한숨 쉬었다.

“…백호(白虎)는 얌전히 잘 있느냐?”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소녀의 품 안에서 얌전하게 안겨 있던 작고 하얀 짐승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르릉 하고 작게 우는 소리에 소녀가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밖에 나와서, 기분이 좋대요.”

염 장로가 딸을 고쳐 업으며 당부했다.

“얌전하게 굴어야 한다.”

소녀가 하얀 짐승과 함께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요? 아니면 백호요?”

염 장로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너희둘 다.”

그는 시선을 대공자에게로 돌렸다.

대공자는 처음을 제외하고 자신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침음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검가의 장로인 자신이 대공자의 성정에 대해서 모를 수가 없었다.

특히나 낙양검가 내부에서 점점 후계 문제에 관한 이야기가 불거져 나오는 시점에서는 더욱.

지상낙원이라는 원각정에 틀어박혀, 그저 책이나 읽고, 소일거리로 빈민들을 돕는 것을 즐기는 소년.

'그런데….'

그런 대공자가 하인들을 쫓아냈다는 정보를 들었을 때만 해도, 신경도 쓰지 않았던 자신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 멍청한 집사 놈이 산송장이 되어 왔을 때, 그때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대공자가 직접 손을 쓴 것이라고 들었을 때는, 일순 두려움을 느끼기까지 했다.

지금 그 대공자는 성심성의껏 빈민들을 돌보는 중이었다.

그들에게 미소도 지어 보이고, 어깨를 두드려 주거나 하며, 능숙하게 의술을 베풀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의 딸이 꼼지락거리더니, 그의 어깨 너머로 다시 머리를 내밀었다.

“진짜 꿈꾸는 거 같아요.”

그는 한숨을 쉬고, 다시 대공자를 바라봤다.

딸의 말대로 대공자는 절대 쉽게 볼 수 없는 미소년이었다.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저 하얗고 섬세한 얼굴이 '가면'처럼 느껴지는 것인지.

* * *

순번이 되었지만, 연소현은 그에게 알은척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도 묵묵히 딸의 곁을 지킬 뿐이었다.

연소현은 그저 다른 환자들을 볼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딸을 침착하게 진맥(診脈)하고 있었다.

그의 반개(半開)한 눈동자는 무엇을 읽어 내고 있는 것인지.

길어지는 진맥에 염 장로는 억지로 초조함을 억눌렀다.

“이거라도 한 잔 드시지요.”

그가 안쓰러워서였을까.

아름다운 시녀장이 그에게 차를 한 잔 권했다.

“고맙군.”

그는 찻잔을 받아 들었지만, 그저 들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의 신경은 온통,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는 대공자에게 쏠려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대공자가 한숨을 깊이 쉬었다.

“제길….”

염 장로의 가슴도 철렁 내려앉는것 같았다.

“…이번에는 그 영감탱이의 진단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는데.”

어처구니없는 대공자의 혼잣말에 염 장로의 입에서는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솥뚜껑만 한 주먹에 힘이 들어가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이곳에서는 제대로 대화를 하기 힘들 것 같소.”

얼굴을 붉힌 채 자신의 얼굴을 계속 흘금거리는 소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며, 연소현이 말했다.

염 장로는 자신의 거대한 덩치로 딸의 앞을 막아서며 대답했다.

“…그러시죠.”

* * *

두 사람은 자리를 옮겼다.

그 작은 방에는 그들을 위해서 차와 다과가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연소현이 자연스럽게 상석(上席)에 앉아 그에게 권했다.

“앉으시오.”

잠시 그런 연소현을 바라보던 염 장로가 의자에 앉았다.

그의 눈에 혼란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것은 그가 알고 있는 대공자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대공자가 아닌 것만 같았다.

“영감탱이…, 약왕의 진단은 정확했소. 일단 지금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인 것 같소만.”

연소현은 자신의 말을 마치고, 찻잔을 들어 향을 즐겼다.

염 장로는 여기까지 들고 왔던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밖에서 시녀에게 받았던 찻잔이었다.

“…약왕께서 제 딸자식을 다시 봐 주시는 것은 어려우시겠지요?”

연소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영감탱이가 그럴 수 없다는것은 염 장로가 더 잘 알고 있지않소?”

염 장로가 한숨을 쉬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이미 자신의 집사가 압력을 가해 약왕을 움직이려던 순간, 약왕을 다시 보기는 글렀었다.

그것은 약왕 자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약왕을 보고 싶어라 하는, 그를 애타게 기다리는 수많은 권력자가 '같은 방법'을 쓰지 않게 하기 위한 규칙.

낙양검가의 장로라면 웬만한 권력자는 무시해도 좋을 대단한 권력자였다.

하지만 약왕의 방문을 기다리는 이들 중에 황가(皇家)의 어르신들까지도 있는 이상, 그것은 더 이상 권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천하에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집사 놈이….’

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 오는것을 보며, 연소현이 느긋하게 말을 꺼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이전에 영감탱이가 했던 것처럼, 그대의 딸에게 일어날 발작을 막는 처방을 해줄 수는 있소.”

탁자를 노려보던 염 장로의 시선이 연소현에게 향했다.

대공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대의 처지를 생각하면, 그조차도 쉽지 않은 일이겠지?”

“그것은….”

염 장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은 염 장로가 중립파로서 지켜 오던 정치적 입지를 흔드는 일이었다.

“애초에 그대도 알다시피, 영감탱이는 그대의 딸을 완치시킬 수는 있었지. 하지만….”

염 장로가 연소현의 말을 받았다.

“하지만 그러려면, 딸아이에게 발작이 일어나는 순간에 맞추어 치료해야만 했지요.”

그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약왕께서는 대륙 전체를 떠도는 분이시고, 제 딸아이는 그런 거친 여정을 함께할 수 없는 상태이니 말입니다.”

연소현이 편하게 뒤로 기대어, 다리를 꼬았다.

“알겠지만, 나라면 같은 방법으로 완치시켜 줄 수 있는데 말이오. 나야 검가에 사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의 말에 염 장로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연소현에게 날아가 꽂혔다.

“자신을 지지하지 않고 지지할 생각도 없는 중립파 장로의 딸을 고쳐 주시겠다는 말입니까? 자존심도 없는 사람이라 손가락질당할 텐데요?”

연소현이 발을 까닥거렸다.

“여기 있는 나는 한낱 의원일 뿐”

그러고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고작 남의 시선이 두려웠다면, 내가 지금까지 이리 내 마음대로 살았겠소?”

"...."

그의 시선이 염 장로에게 꽂혔다.

“게다가 지금 내 걱정을 할 때가 아닐 텐데?”

맞다.

염 장로는 연소현에게 화살을 돌려, 자신이 대답해야 할 질문을 피하려 했을 뿐이었다.

연소현에게 치료를 받는 순간, 그것도 연소현에게 딸아이를 맡겨 완치를 받는 순간, 자신은 지금까지 이뤄 왔던 정치적인 위치를 잃어버리게 되어 있었다.

누군가는 그의 결정이 가족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해 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의 권력을 가져가고 싶은 이들은 그리 말하지 않으리라.

“그것은 마찬가지로 대공자께서 염려할 바도 아니지 않습니까? 제 정치적 입지에 대한 문제는 어디까지나….”

몸을 일으킨 연소현이 탁자를 내리 쳤다.

“그 화법!”

그 소리는 그리 크지도 않았고, 애초에 연소현이 탁자를 강하게 내리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염 장로는 제자리에서 펄쩍 뛸 뻔했던 것을 겨우 참았다.

“검가의 같잖은 정치판에서나 쓸법한 화법은 집어치우시오.”

염 장로는 오랜 시간 다져 온 경험과 담력으로 연소현의 시선을 피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내 앞에서 정치적 미사여구나 수식어 따위는 필요 없소.”

연소현이 탁자 너머에서 그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 질문을 회피하지 마시오.”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그의 시선에는 감정이라고는 한점도 느껴지지 않았다.

염 장로는 마른침을 삼켰다.

“나는 한낱 의원이자 무검자일 뿐인데, 그대는?”

그의 앞에서, 그가 이제까지 몰랐던 대공자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그대는 그저 한 아이의 아버지일 수 있소?”

염 장로는 자신의 등에 닿은 등받이를 느낄 수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뒤로 몸을 피했던 것이었다.

그는 연소현의 시선에서 눈을 돌리지 않으려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그 수많은 전투와 강력했던 적들의 시신을 넘어서 이 자리까지 온 그였다.

다들 불가능할 것이라던 일들을 해내고, 정적(政敵)들이 무너질 때 까지 버텨 내고, 또 버텨 냈던 그였다.

"...."

그랬던 자신이, 고작 열일곱 살짜리 소년에게 형편없이 눌러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애써 무시하고 있던, 그저 어머니의 처소에 처박혀 책이나 읽고, 그림이나 그리며, 빈민들을 돕기 좋아하는 소년.

“하.”

소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명백한 조소(嘲笑)였다.

연소현은 걸음을 옮겨 밖으로 향했다.

“물론 그대의 처지는 이해하오. 급히 결정할 것 없소.”

나가는 길에, 뻣뻣하게 굳어 버린 염 장로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 차는 아까우니 꼭 다 마시도록 하시오.”

연소현이 문밖으로 나섰다.

염 장로의 뒤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향이 풍부하고 삽미(潞味)가 깔끔하여 훌륭하더군.”

염 장로의 시선이 탁자 위를 향했다.

연소현의 잔은 이미 비어 버린지 오래였다.

자신의 앞에는 입도 대지 못한 차가, 두 잔이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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