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55화 (55/350)

제5편 의원(醫員)

모두가 자리를 비운 곳에서 두 노인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들었소, 영감?”

“물론 들었지, 할멈.”

두 사람은 크게 웃었다.

노의원이 떨리는 손을 들어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분께서 드디어 움직이시려는 것이 틀림없어.”

“분명 그분께서는 이제 더 바빠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소. 내 귀가 점점 먹고 있지만, 그 말씀만은 정확히 들렸지.”

노파, 선녀교단의 무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예언의 때가 오고 있구려.”

노의원이 무릎을 내리쳤다.

“온 낙양이 그분의 진면목을 보게 될 걸세!”

* * *

경계를 서던 사공자의 무사가 혀를 내둘렀다.

“대단한데.”

그와 한 조를 이루는 동료도 고개를 내저었다.

“대공자님의 시녀들이로군.”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세쌍둥이 시녀들의 모습이 있었다.

그녀들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골절 환자의 환부를 소독하고,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았다.

고름을 짜내고, 환부를 신중히 확인하고, 고약을 붙였다.

얼굴에 피가 튀고 고름이 옷에 묻어도 그녀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들의 정확하고 재빠른 처치에 이곳에서 잔뼈가 굵은 의녀들도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검을 차고 있는 것을 보니, 무사들인가 보군.”

“그럴 거야. 거의 한 시진 동안 쉬지도 않고, 움직이고 있어. 기초체력이 우수하군.”

“게다가….”

무사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엄청 예쁘기까지 한 소저들이야...”

만약 그들이 세쌍둥이 시녀들의 속마음을 알았다면 평가가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후후. 우리가 주목받고 있어요.'

'제가 바로 갑종 특수반의 야전 응급조치 교육에서 표창까지 받았던 몸이랍니다.’

'저는 본가의 수습 의녀들과 함께 기본 교육까지 수료한 몸이라고요.’

그의 동료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렀다.

“아니, 이 사람아. 예쁜 것으로 치면, 저 시녀장이 더 대단하지 않은가?”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정아의 모습이 있었다.

그녀는 피가 터져,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환부에서 정확히 혈관을 잡아 지혈했고, 염증을 일으킬 수 있는 작은 뼛조각들을 순식간에 골라냈다.

그 모습에 그녀와 함께 처치에 임했던 의원들마저 감탄하고 있었다.

“아니, 저분은 감히 똑바로 바라 볼 수가 없어서….”

순진한 동료의 모습에 무사가 껄껄하고 웃고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저 시녀장도 검을 차고있군. 대공자님의 시녀들은 모두 무사들인가?”

“…검을 차고 있으니, 소저들이 한층 더 아름다운 것 같지 않나?”

“이 친구, 단단히 빠졌구먼.”

무사가 다른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조금 안 좋아졌다.

“그에 반해서 우리 사람들은….”

그의 동료도 그의 시선을 따라가더니, 머리를 긁었다.

그곳에서 사공자의 문사들이 고통에 날뛰는 환자 하나를 붙잡지 못하고, 자빠져 나뒹굴고 있었다.

그들은 나은 편이었다.

몇몇 비위가 약한 이들은 그저 구석에서 구토나 하고, 노랗게 질린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사공자의 시녀들은 사방이 피와 고름 그리고 비명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핼쑥한 얼굴로 잔심부름에 전념 중이었다.

그나마 사공자의 시녀장만이 능숙한 손길로 의녀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으음….”

“음….”

두 무사는 일제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그래도 저게 일반적인 모습이겠지.”

"그건 그렇지.”

분명 대공자의 시녀들 쪽이 특이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무사가 한 방향을 가리켰다.

“가장 대단한 것은 역시 저쪽이지.”

그들의 시선이 중한 환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야외에 마련된 침상 위에 딱 봐도 용태가 심상치 않은 환자가 의식을 잃고 있었다.

다리가 뒤틀려 반쯤 찢겨 나갔고, 온몸이 피투성이 상태로 업혀온 환자였다.

그 환자가 처음 대문을 지나 업혀 왔을 때, 그들은 고개를 가로저었었다.

내공을 지녀, 그 육신이 초인의 영역으로 접어든 무림인이 아닌 이상, 가망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처음 달라붙었던 세 명의 의원도 마찬가지 의견으로 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침상 주변에 서서, 감히 끼어들 생각조차 하지못하고 있었다.

“대공자님이 의술에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예전에 들었헜지만….”

연소현의 손이 현란하게 움직일때마다, 환자의 상태가 급속도로 호전되고 있는 것이 그들의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그의 손에 들린 금침(金針)이 햇빛을 받을 때마다 반짝였는데, 쉴새 없는 반짝임 때문에 눈이 부실 정도였다.

“…저 정도 솜씨는 본가의 의예원(醫藝院)에서도 본 적 없지 않나?”

무사들은 허구한 날 다치는 것이 일이라, 대부분이 의예원의 단골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야. 저건 본 적 없을 정도 가 아니라….”

무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저건 신기(神技)다.”

연소현의 주변으로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모든 의원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감탄하기도 하고, 무언가 열심히 기록하기도 하며, 연소현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들의 귀는 연소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강의(講義)를 하며, 동시에 분초를 다투는 시술을 한 점 흐트러짐도 없이 완벽하게 마무리해 나가고 있었다.

“주군의 평소 말씀대로, 결코 뒤에서 험담을 들을 분이 아니로군.”

“맞아. 오늘 직접 뵈니, 이제까지 소문으로 들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분이시지 않나?”

“역시, 소문이란….”

그때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큰형님의 옆을 지키던 사공자의 환호성이 가장 크게 들렸다.

절대 살릴 수 없어 보였던 환자가 안정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대단하군.”

* * *

연소현은 자애원의 뒤편에 마련된 우물가에서 손을 씻는 중이었다.

그의 손에서 씻겨 내린 피가 물과 섞여 배수로를 타고 흘러갔다.

“후우….”

그의 입에서 한숨이 홀러나왔다.

아무리 제암진천경으로 초인의 신체를 얻었다지만, 집중력의 소모는 무시할 수 없었다.

'죽이기는 그토록 쉬웠지만, 살리는 것은 여전히 어렵구나….’

암천존자가 한번 손을 내저을 때 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졌었다.

그가 내뱉은 언령은 순식간에 백(百)이 넘는 이들을 죽음으로 끌고 들어갔었다.

하지만 연소현은 어떠한가.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

문득 인기척을 느낀 그의 시선이 뒤를 향했다.

낡고 커다란 피풍의(披風衣)를 뒤집어써 전신을 가린 두 개의 인영(人影)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연소현의 시선을 받으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다가왔다.

“명불허전(名不虛傳). 과연 훌륭한 솜씨였습니다.”

손을 들어 얼굴을 드러낸 것은 한쪽 눈을 가린 안대조차 미모를 퇴색하게 하지 못하는 가인(佳人)이었다.

“주군.”

그녀는 무릎을 꿇어 보였다.

“그저 별것 아닌 잡기(雜技)였다.”

연소현이 미소 지었다.

“보고서 말고 직접 얼굴을 보는것은 오랜만이군. 현월각주(弓玄月閣主).”

그녀는 다름 아닌 세아였다.

그녀의 옆에서 깊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는 것은 세아의 호위무사인 규였다.

* * *

인적이 없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세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명하신 대로, 이곳의 책임자에게 대공자님께서 오실 것을 미리 알렸었습니다.”

한동안 연소현의 명에 따라 사공자의 사업에 대한 것들을 모두 조사했던 현월각이었다.

“잘했다. 연출이 조금 과하긴 했지만.”

연소현의 말에 세아가 손을 내저었다.

“연출이라니요 주민들의 반응에 저도 놀랐습니다. 두 노인이 주군께서 오실 것을 알리자, 주민들이 우르르 골목으로 몰려 나가는데….”

규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심지어 저도 조금 무서울 정도였습니다.”

연소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신앙의 힘이지.”

세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주군께서 자애원을 운영하고 계신 것도 알았고, 친분이 있는 명사(名士)들에게서 기부금을 유치하신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실제로 보니 엄청나군요. 감탄했습니다.”

그저 말뿐이 아니었다.

매일같이 방구석에만 앉아서 책이나 보던 무검자 시절의 그가 묵묵히 이루어 놓은 일이라고는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였으니.

“암흑가에 대한 전문가라는 사람은?"

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접촉에 성공했습니다. 힘들었지요. 워낙에 신출귀몰한 사람이고, 항상 암흑가에 추적을 당하는 인물이라...”

“쫓기기만 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그녀가 이제까지 사냥한 암흑가의 두목들이 두 손으로는 셀 수도 없을 정도니까요. 게다가 다들 목에 힘 좀 준다는 이들이었지요.”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데려오도록.”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찾아뵐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연소현은 뒤로 돌아섰다.

"그럼 그때 보도록 하지.”

“아, 좀 전에 급전(急傳)으로 분류된 정보가 하나 들어왔습니다.”

연소현의 걸음이 멈췄다.

“검가의 염 장로가 낙양검가의 정문을 벗어났다고 합니다. 목적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 방향은 이쪽입니다.”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염 장로가? 수하들과 함께?”

세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정도 수준에 이른 고수를 들키지 않고, 관측하기는 힘들지요. 현재 그의 경로에 있었던 목격자들에게 탐문 중입니다만, 당장엔 그게 전부입니다.”

연소현이 턱을 쓰다듬었다.

“염 장로라….”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곳으로 온단 말인가.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세아에게 말했다.

어차피 곧 도착할 테니, 알 수 있겠지.”

수하들을 잔뜩 이끌고 적대적인 용건으로 나타날지, 아니면….

“예. 보고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나중에 보….”

그때 규가 급히 끼어들었다.

“저도 용건이 있습니다.”

“뭔가?”

규는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번에 제게 말씀하셨던, 이적제의 아직도 유효한….”

세아가 그녀의 뒷덜미를 잡아끌고 나갔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주군.”

“놓으십시오! 이건 고용주의 폭거입니다!”

“시끄러워! 내가 진짜 남부끄러워서 정말….”

연소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여전히 사이좋은 두 사람이었다.

* * *

가장 먼저 그를 발견한 것은 정문에서 경계를 서던 사공자의 무사들이었다.

그들은 놀란 와중에서도 정확하고 공손한 자세로 예를 표했다.

“본가의 장로님을 뵙습니다!”

그 우렁찬 목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대문으로 향했다.

그를 발견한 사공자의 문사가 황급히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

“본가의 장로님을 뵙습니다.”

장정들보다도 머리가 두 개는 더 커서 거인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내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더욱 거대해 보이는 것은 그가 낙양검가의 장로라는 직책을 가졌기 때문일까.

“장로님. 이곳을 어떤 일로 찾으셨는지,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염 장로의 눈썹이 치켜 올랐다.

“내가 이곳에 밥이라도 얻어먹으러 왔겠나?”

젊은 문사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 아니, 그런 말씀이 아니오라….”

염 장로가 말했다.

“대공자께서는 계시느냐?”

그의 물음에 문사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대공자께서는 지금 저쪽에서 진료를 보고 계신 중이십니다.”

마침 이쪽을 바라본 연소현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제가 대공자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되었다.”

그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그는 대공자에게로 이어진 환자들의 줄 맨 끝에 섰다.

“본인 또한 환자를 진료받게 할 목적으로 온 것이니, 이들과 같이 줄을 서겠다.”

“자, 장로님?”

그를 바라보던 연소현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염 장로의 거대한 등판에는 대략 십 대(十代)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가 얌전히 업혀 있었다.

병약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시선이 연소현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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