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54화 (54/350)

제4편 그릇

“그런데 저 경비대원은 누구야?”

“아까 보니 대공자님의 호위인거 같은데…?”

“호위? 경비대원이?”

주변에서 사공자의 무사들이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지만, 탈명귀검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깊은 눈으로 바쁘게 돌아가는 자애원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자애원이라….'

대공자 자신의 돈을 들여 돌아가는 시설.

낙양 모든 곳에 있는 약선녀의 사당을 활용하여, 빈민가에서 무상으로 식량을 배급하고, 의술을 베푸는 장소.

“후후. 주인님의 위대함을 이제야 아시겠나요?”

“덕분에 내원에서 원각정은 찬밥 신세지만요.”

세쌍둥이 시녀들이 으스대며 그에게 말했다.

“…내원이 무슨 상관이길래?”

그러자 그녀들이 투덜거렸다.

“이 모든 운영자금이 나오는 곳이 내원의 예산이니까요.”

“내원은 가주와 그 직계혈족의 시중을 담당하는 부서이지요.”

“하지만 주인님은 내원의 시중을 받지 않으시니까요. 대신 원각정에서 가져올 수 있는 최대한의 예산을 가져와, 전부 이곳에 사용하시는 것이지요.”

“후후. 저희가 시녀 주제에 내원의 자금 흐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셨나요?”

“…사실 저희도 얼마 전에 시녀장님의 업무를 도와 드리다가 알게된 사실이지만요.”

“야…! 그건 굳이 말할 필요 없잖아.”

그는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래서였구나.’

정아의 외출복을 얻기 위해서 내원집사를 찾아갔을 때, 느꼈던 그 적대감.

아무리 상대가 무검자라고 불리는 연소현이라도, 그들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많았었다.

하지만 이제 깨달을 수 있었다.

연소현은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낙양검가에서 책정한 예산을 거의 전부 빈민들을 위해서 쓰고있었던 것이 아닌가.

“정말 터무니없는 사람이로군….”

그는 평소에 연소현이 입고 먹는 것을 떠올렸다.

양민들이나 입을 무명옷에, 양만 많을 뿐인 식사.

그가 소비하는 대부분이 원각정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것들이고, 그 외에는 선물로 들어오는 물건들로 충분했다.

굳이 사치라고 해 봐야, 그가 엄청나게 사들이는 서책들이 전부였다.

그는 연소현의 손과 발에, 그 옷깃에 입 맞추던 빈민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역시 그릇이 다르다는 것인가.'

이제는 그 소년의 모습에서, 산맥과도 같던 주군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점차 그에게 익숙한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 * *

사공자를 옆에 앉힌 연소현은 백발의 노(老)의원과 지팡이를 짚은 노파에게서 근황을 듣고 있었다.

“보고서를 보셨겠지만, 상황은 좋습니다. 이 '호두 마을'뿐만 아니라, 다른 빈민가들도 마찬가지지요.”

노의원은 이 호두 마을 자애원의 책임자였다.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봉지회의 특수(特需) 때문이겠군.”

“그렇습니다. 덕분에 부상자가 부지기수로 늘어 저희 허리가 휠 지경이지만 말입니다.”

그는 껄껄하고 웃었다.

옆에서 노파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호두 마을의 사당을 책임지는, 선녀교단의 무녀였다.

“그래도 아사자(餓死者)가 들끓던 시절보다는 낫지 않나. 그때는 길거리에 말라붙은 시체를 치우는 것도 일이었지.”

뒤에 서서 그 말을 들은 문사들의 안색이 안 좋아졌다.

“그리고 흑골파가 무너진 것도 나름 큰 도움이 되었사옵니다.”

노파가 연소현에게 말했다.

“그들이 운영하던 인육 공장들이 함께 문을 닫으면서, 원인 불명의 실종자도 줄게 되었사옵니다.”

“그리고 자식을 팔아넘기던 부모들도 줄었지요. 거리에 아이들이 늘어났습니다.”

문사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연소현이 혀를 찼다.

“그건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야. 특수로 인해 평소보다 주머니에 여유가 생긴 이들이 고기를 더욱 찾을 테니까.”

“아무래도 인육을 취급하는 가게들이 저렴한 편이지요.”

“요즘 암흑가의 다른 조직들이 앞다투어 인육 공장을 열고 있다는 정보가 있다. 돈 냄새를 맡은 게지.”

“자애원을 찾는 부모들을 대상으로 꾸준히 신앙 교육을 강화하고 있사옵니다. 자식을 팔아먹으면, 약선녀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지요.”

“그래도 죽은 자식을 나머지 가족들이 끓여 먹던 시절보다는 나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몇 명, 비위가 약한 문사들이 튀어 나갔다.

사공자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감쌌다.

“그 외에 건의 사항은 없는가?”

연소현의 물음에 조심스럽게 노의원이 말을 꺼냈다.

“저희의 손이 닿지 않는 빈민가들이 아직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할 수 있는 지원이 제자리 걸음이라….”

얼굴에 피로가 덕지덕지 붙었음에도, 다른 빈민가를 걱정하는 노의원이었다.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걱정하지 말게. 앞으로는 일이 많아지면 많아졌지, 줄어들 일은 없을 테니.”

그의 말에 노의원과 노파의 안색이 밝아졌다.

하지만 그들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묻는 일은 없었다.

그들에게 연소현은 신앙의 대상이며,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가 그리될 것이라 하면, 그리 될 것이다.

"아, 한 가지 특이한 일이 지속해서 생기고 있사옵니다.”

노파의 말에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례 보고서에서 확인했네. 빈민들을 돕는 의적(義賊)이 있다지?”

“예. 저희 호두 마을의 자애원에도 그가 남긴 재화(財貨)가 들어온 적이 있었사옵니다.”

“처분은 신중하게 했겠지?”

노의원이 미소를 지었다.

“물론입니다. 장물(贓物)은 추적이 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자애원과 연이 닿아 있는 전문가 여럿에게 분산하여 처리했습니다.”

“그들 전부 신실한 교인(敎人)들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옆에서 듣고만 있던 사공자는 혀를 내둘렀다.

유능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었다.

“마교(魔敎)는?”

그 물음에 좌중의 귀가 모여들었다.

“…그것은.”

노파가 주변을 의식했다.

연소현이 옆에서 얌전히 앉아 경청하던 사공자의 어깨를 안았다.

“내 동생은 귀엽기만 한 것이 아니라, 명석하기까지 하니, 밖으로 이야기가 새어 나갈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그의 말에 사공자의 코가 높아졌다.

그런 그를 잠시 미소와 함께 바라보던 노파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약선녀 신앙으로 마교가 침투하는 것을 막고는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사옵니다.”

“마음이 약한 이들이 충격적인 일을 겪으면, 더욱 급진적인 교리(敎理에 휘둘리기 마련이니 말입니다.”

“저희 교리를 좀 더 보완하고 강화해 나가고는 있사옵니다만….”

“그 부분은 내가 도와주지.”

그들의 대화에 주변인들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의 상식과는 달리, 선녀교단은 일반적인 종교 집단처럼 단순히 기복신앙(祈福信仰)을 기반으로 한 교단이 아니었다.

'큰형님은 약선녀 교리를 설계하여, 마교를 막는 둑의 역할을 하게끔 하고 계셨다는 말인가?!’

그 교리의 뒷면에는 백성들의 도덕적 타락을 막고, 급진적인 종교에 의해 낙양이 침식되는 것을 막기 위한 치밀한 설계가 있었다.

'이것이 큰형님의 그릇인가.’

사공자는 떨리는 눈빛으로 그가 결코 따라잡지 못할 존재를 바라보았다.

“다른 이야기는 서면으로 하기로하고….”

연소현은 자신의 동생을 바라봤다.

사공자는 정신을 차렸다.

이제 그의 큰형님이 본론으로 들어갈 모양이었다.

“만약, 호두 마을 전체의 주민들을 이주시켜야 한다면, 불필요한 유혈 사태 없이 가능하겠나?”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놀람의 연속들이 있었지만, 결국에 이것이 그들이 여기까지 온 이유 아니었던가.

쏟아지는 시선을 태연히 무시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두 노인은 몇 마디 의견을 소곤거리며 주고받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합니다.”

주변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물론 불필요한 유혈 사태는 피할 수 있지만, 소수의 불가피한 유혈 사태는 있을 것이옵니다.”

“그래도 호두 마을의 주민들은 신앙심이 깊고, 다들 온순한 편이니 말입니다.”

연소현이 접혀 있던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 정도 액수로도?”

그 액수는 사공자 측이 제시할 수 있는 한계였다.

종이를 펼쳐 본 노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너그러운 제안이군요. 이 정도라면, 호두 마을 지부의 운영자금까지 합쳐 계산할 때, 충분히 가능한 금액입니다.”

문사들이 환호성을 올렸다.

서로 부둥켜안거나, 어깨를 두드리고, 펄쩍펄쩍 뛰기까지 했다.

사공자의 시녀들도 격의 없이 웃음을 나누고, 서로 손뼉을 마주치며 좋아했다.

연소현이 그들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동생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쾌활하고, 꾸밈이 없으며, 솔직한 이들이었다.

용안을 지닌 정아도 그와 마찬가지 생각인지, 그들을 보며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들의 환성 속에서 연소현은 두 노인에게 말했다.

“후에 내가 몇 가지 상황을 줄터이니, 그에 맞춰 실현 가능한 계획들을 수립하고, 연습하게. 실수가 없도록.”

"예, 분부하신 대로.”

그 모습에 사공자가 급히 끼어들었다.

“큰형님! 아직 계획 단계일 뿐입니다.”

아직 땅을 본격적으로 매입하기는커녕, 투자 자금도 다 모으지 못한 시점이었다.

연소현이 그에게 미소지었다.

“걱정 말거라. 이 큰형님이 낀 이상. 계획은 실현되고, 성공은 보장되어 있단다.”

“큰형님….”

얼굴이 붉게 물든 사공자가 연소현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때 노의원이 자신의 무릎을 두드렸다.

“아! 그래서였군요!”

달려든 동생을 안아 주던 연소현이 물었다.

“무슨 말인가?”

노의원과 시선을 마주친 노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며칠 전부터 부쩍, 주변에서 보지 못했던 수준 낮은 흑도의 패거리들이 괜히 행패를 부리거나 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현재의 땅 주인들이 혹여 검가와의 거래가 엎어질까 두려 워..."

연소현이 말을 받았다.

“미리 선수를 쳐서 주민들을 쫓 아내려 한다?”

두 노인이 염려를 표했다.

“저희는 흑골파 이후에 새로 생겨난 조직들이 영역 표시를 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더욱 그들의 행패가 심각해질 가능성이 농후하옵니다.”

그때 연소현의 무릎 위에 앉아있던, 사공자가 끼어들었다.

“어르신들. 그건 지금쯤이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 *

낙양의 한 부잣집.

낙양검가의 사람이 방문했다는 소리에, 얼른 자신과 마찬가지로 호두 마을의 땅을 쥐고 있는 이들을 불러 모았던 그였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그 낙양검가의 사람 앞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오줌을 지린자도 있었다.

"...."

그 남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손에 든 비도(飛刀)를 던졌다가 받았다가를 반복할 뿐이었다.

단지 지주(地主)들이 고용했던, 흑도 패거리의 목이 방 안에 굴러다니고 있을 뿐.

자신이 무엇에 죽었는지도 모르 는 멍청한 표정을 한 머리통들이었다.

그리고 그 머리통들은 채 식지도 않은 피를 흘려 대고 있었다.

"...."

남자가 던졌다가 받는 그 비도에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푸른 광택이 돌았다.

코를 찌르는 알싸한,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냄새가 지주들을 더욱 떨게 했다.

머리들이 왜 하나같이 짙은 보랏빛의 안색을 하고 있는지, 흘러나오는 피가 왜 기이한 색을 띠고 있는지, 그 비도만 보아도 알 것 같았다.

남자의 시선은 독사(毒蛇)의 그것처럼 사납고 날카로웠고, 그의 숨소리조차도 차갑게 느껴졌다.

"...."

그는 비도를 던졌다가, 받을 뿐이었다.

무림인들이 내뿜곤 한다는 그 흔한 기세(氣勢)도, 살기(殺氣)도 없었다.

그저, 어둠 속에서 가만히 먹이의 숨통을 노리는 짐승처럼, 그들을 바라만 볼 뿐.

한 지주의 시선이 남자의 목덜미에 향했다.

낙양검가의 무복(武服) 위로 섬뜩한 뱀 문신이 머리를 내밀고,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었다.

'저것은…?!’

문파에 대한 지식에 조금만 해박하더라도, 결코 모를 수 없는 문신이었다.

'사, 사천당문(四川唐門)…!’

그들은 오늘.

질식할 것 같은 침묵 속에서.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을 배우고 있었다.

* * *

연소현이 연신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고, 역시 내 아우로구나. 어쩜 이리도 영특할꼬.”

사공자는 형님의 품으로 더욱 안겨들었다.

“더욱 칭찬해 주세요! 큰형님!”

그 앳된 얼굴에 가득한 미소는 순수하기 짝이 없었다.

티 없는 순수함을 보이는 피부 아래로, 알싸한 냄새를 풍기는 혈액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일찍이 사천(四川)의 패자(霸者)를 자칭했던 일족(一族)의 선명한 혈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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