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사공자(四公子)
소년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뽀얀 피부에 커다랗고 순한 눈매, 혈색 좋은 귀여운 얼굴의 소년은 낙양검가의 사공자, 연비(淵翡)였다.
“큰형님이 곧 오실 거야.”
그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귀여운 소년의 모습을 보는 주변 시녀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준비! 준비는 다 되었겠지?”
그의 시녀장이 무릎을 굽혀 그와 시선을 맞추고 미소 지었다.
"네, 물론이랍니다.”
삼십 초반 정도로 보이는 부드러운 미색(美色)의 시녀장은 자신의 주인을 깨물어 주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각기 다른 지방의 최고급 명차(名茶) 육(六)종, 그리고 다향방(茶香幫)에서 조달한 각종 주전부리, 그리고 신선한 과일들….”
사공자가 손뼉을 쳐 그녀의 말에 끼어들었다.
“흔한 과일은 빼도록 해. 원각정에는 갓 수확한 신선한 과일이 흔할 테니까.”
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남방(南方)의 희귀한 과일들로만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듣던 소년이 다시 손뼉을 쳤다.
"그러고 보니 형님이 걷다가 다리가 아프시면 어쩌지? 형님은 내공이 없으시잖아. 가마! 가마는 준비됐어?”
“물론이지요.”
시녀장이 한쪽을 가리키자, 시녀들이 물러나며, 가마꾼들과 가마의 모습이 드러났다.
“최고의 장인이 최고의 소재로 제작한 가마랍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 가마를 살피던 소년이 다시 손뼉을 쳤다.
“아! 만약 큰형님이 외부의 시선 이 부담스러우시면 어쩌지? 큰형님에게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많잖아. 이런 형태의 가마 말고, 벽과 천장이 있는 가마는 없어?”
과연 그 정도까지 가자, 시녀장도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마는 준비하지 못했지만, 무사들이 엄하게 호위하면, 누구도 감히 대공자님을 쳐다보지도 못할 겁니다.”
“큰형님이 그 무사들을 싫어하면…?!”
그러자 시녀장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자아, 진정하시고 심호홉을 하세요. 저를 따라서 하나, 둘. 하나, 둘.”
소년은 시녀를 따라서 열심히 심호홉했다.
“주인님도 대공자님을 아시잖아요? 그분은 절대 까탈스러운 분이 아니니까요. 오히려 그분은 너무 많은 준비를 하면 부담스러워하실겁니다.”
큰형님을 사랑하는 사공자 덕분에, 자신이 섬기지도 않는 대공자에 대해 준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쌓은 시녀장이었다.
“그렇지. 시녀장의 말이 맞아. 내가 너무 홍분한 것 같아.”
그는 시녀장을 꼬옥 안아 주었다.
시녀장은 호호, 하고 웃으며, 사공자를 마주 안았다.
“우왓! 시녀장님만 부럽게!”
“저도 안아 주세요!”
그러자 우르르하고 주변의 시녀들이 달려들어 다 함께 껴안았다.
사공자 진영에서는 익숙한 광경이라, 주변의 호위들은 조금의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아직도 저러고 있네.”
겨우 땅에 내려올 수 있었던 사공자가 말했다.
그의 시선의 끝에는 일단의 젊은 문사(文士)들이 서로 침을 튀겨 가며, 육탄전을 방불케 하는 토론을 벌이는 중이었다.
아니, 실제로 육탄전을 벌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것도 그들에겐 흔하다면 흔한 풍경이었다.
“너무 진지한 분들이니까요.”
시녀장은 사공자의 흐트러진 매무시를 고쳐 주며 말을 이었다.
“저들도 자신들의 업무를 열심히하고 있을 뿐이니, 너무 미워하진 말아 주세요.”
사공자는 코웃음을 쳤다.
“미워하진 않아. 단지 애송이들이라고 생각할 뿐이지. 결국에 진짜 현실도 모르는 책상물림들끼리 도토리 키 재기를 하는 것뿐.”
그의 눈에는 나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현기(玄機)가 깃들어 있었다.
“자신들을 책사(策士)니 모사(謀士)니 떠들어 대도, 결국 한낱 범인(凡人)에 지나지 않아.”
그의 최측근들은 각자의 임무에 충실한 중이라, 이 자리에는 함께 하지 못했다.
대신 이번 사업의 주축을 이루고있는 젊은 실무진들이라도 데려온 것이었다.
그는 그것이 내심 아쉬웠다.
“내 최측근들이 큰형님을 만나 봐야 하는데….”
시녀장은 조심히 그를 타일렀다.
“주인님.”
그녀가 모시는 주인은 순진한 아이의 얼굴과 비범한 천재의 머리를 동시에 가진 사람이었다.
“그들은 이미 대공자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를 다 알고 있잖아요.”
그녀 또한 무검자라고 업신여겨지는 대공자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얼마나 놀란 적이 많았던가.
“그저 아는 거랑 직접 보는 건 다르다니까.”
소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시선이 여전히 격론 중인 무리를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저치들은 큰형님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지.”
그는 혀를 차고, 시녀장에게 말했다.
“시녀장. 결국, 저치들이 나한테 뭐라고 할지, 내가 먼저 알려 줄까?”
“네, 부디 알려 주세요.”
시녀장이 무릎을 꿇고, 그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잠시 후, 토의를 끝낸 젊은 문사들이 다가와서,
"저희는 대공자님께서 이 사업에 필요한 이유를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라고 했을 때, 시녀장이 무심코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자신에게 쏠린 시선들에, 가볍게 사죄를 하며 뒤로 물러섰다.
헛기침을 몇 번 해 보인 문사가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칩거 중이신 대공자님께서 대외 활동을 하시는 것에 대해서 태상가주님이나 최고 운영 회의가 어떻게 반응을 할지….”
소년이 한차례 손뼉을 쳤다.
“그건 너희 주제에 상관할 것이 못 된다.”
“죄송합니다."
찬바람이 휘날리는 것 같은 반응에 문사는 얼른 다음으로 넘어갔다.
“사업 계획 내에서만 말씀을 드리자면, 몇 가지 세부 사항에서는 분명 납득할 수 있는 여지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사공자가 다시 손뼉을 쳐, 그의 말을 끊었다.
“결국엔 큰형님이 고문으로 참여 하시는 것만으로 지분을 너무 많이 가져가신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거지?”
그러자 자신이 할 말을 빼앗긴 문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그렇습니다. 정확하십니다. 물론 저희는 주군께서 결코 감정에 치우친 결정을 하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소년의 현명함과 뛰어난 지능에는 그들도 이미 익숙한 바였다.
“단지 철저히 사업적인 측면에서 접근했을 때, 대공자님께서 직접 금전적 투자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리 큰 지분을 가져가시는 것은, 다른 투자자들이 생각할 때…."
다시 소년의 손뼉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희의 주장은 알겠다.”
소년이 팔짱을 끼고 그들의 앞으로 나서자, 모든 이가 소년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를 갖추었다.
“이제부터 너희가 놓치고 있는 사항들을 말해 주도록 하마.”
그들 사이에서 이 사공자라는 소년이 얼마나 거대한 존재인지 보여 주는 한 측면이었다.
“일단 무엇보다도 먼저, 큰형님은...."
그때 외곽에서 대기하던 시녀 하나가 큰소리로 외쳤다.
“본가의 대공자님께서 당도하셨습니다!”
소년은 그대로 뒤돌아서서, 달렸다.
“큰형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 * *
“이게 누구냐!”
연소현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귀여운 동생을 번쩍하고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빙글빙글 돌아 주었다.
“아하하! 그만둬 주십시오, 큰형님! 저는 이제 꼬맹이가 아닙니다!”
라고 말하면서도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는 사공자였다.
“하하, 그렇구나. 그럼 이제 다 큰 어른 대접을 해 주어야겠구나!”
연소현은 사공자를 높이 던졌다, 받기를 시작했다.
“형님! 이것이 바로 어른 대접이로군요! 신세계예요! 재밌어요!”
“그렇지?”
사공자는 허공에 뜰 때마다 꺅꺅 거렸다.
시녀들은 그런 그들을 훈훈한 미소와 함께 지켜보았다.
두 형제는 그렇게 뜨거운 해후를 나누었다.
'녀석….'
연소현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너무도 오랜만에 만나는 정겨운 피붙이였다.
* * *
“그래서요, 그래서요, 큰형님. 제가 결국 큰형님이 집필하신 경혈진서(經穴眞書)를 전부 읽었습니다!”
“그랬구나. 그런데 왜 하필 의서(醫書)를 읽었던 것이니?”
“저도 큰형님처럼 되고 싶으니까요!”
천막 안에 자리 잡은 그들은 차와 다과 등을 즐기며, 소소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이번에 방문하셨던 약왕(藥王) 할아버지께 칭찬도 받았어요! 당장에 의원을 개업해도 충분하겠다고 하셨어요!”
“하하, 그렇구나. 만약 개업하면 이 큰형님과 함께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오오, 영광입니다. 지상 최고의 명의(名醫)이신 큰형님과 함께라면, 중원국 최고의 의원이 되겠군요! 그러고 보니 약왕 할아버지도 함께 하시면 어떨까요?!”
“하하, 그런 늙은이는 쓸모가 없단다.”
연소현은 연신 귀여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옆에 찰싹 달라붙은 소년은 한도 끝도 없이, 쌓였던 이야기들을 정신없이 늘어놓았다.
연소현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받아 주는 모습에, 결국 시녀장이 헛기침을 하며 나서야 했다.
“흠흠. 대공자님, 그리고 주인님. 사업 계획 설명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좋아. 그러면 이제 남은 이야기는 일이 끝나고 하는 것은 어떻겠니?”
“오오! 그래도 되나요?”
“그래. 오늘은 원각정에서 저녁 식사라도 함께하자꾸나.”
“와아!”
사공자는 벌떡 일어나서 두 손을 펼쳐 들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 귀여운 모습에 연소현이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그렇게 큰형님 앞에서 한동안 재롱을 부리던 사공자가 시녀장에게 말했다.
“들었지? 오늘 이 일 이후의 모든 일정은 취소다.”
어마어마하게 밀려 있는 일정들에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도, 그녀는 앞에선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입니다.”
그녀는 물러서서, 연소현과 함께온 그의 시녀장에게 작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렇게 되었으니, 오늘은 신세를 지게 되었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아뇨, 신세라니요. 우리는 모두 검가의 가족 아닙니까?”
부드럽게 미소 짓는 대공자 측 시녀장의 눈부신 미모에, 사공자의 시녀장은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면 자세한 이야기를 조금 해 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일단 방문 인원은….”
두 사람은 모시는 주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함께 계획을 맞춰 보기 시작했다.
“자, 그럼!”
사공자가 손뼉을 쳤다.
“시작해 보자!”
그러자 좌중이 일순 조용해졌다.
사회자 역할을 맡은 사공자의 젊은 문사 하나가, 임시로 마련된 연단에 서서 좌중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박수를 받은 그는 몇 번의 헛기침으로 목을 풀고 입을 열었다.
“자, 먼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우리 낙양검가의 대공자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이 사업 설명회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연소현을 향해 주변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편하게 몸을 기대앉은 연소현이 손을 들어 보이는 것으로 답했다.
그러자 일순 박수 소리가 커졌다가 자연스럽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런 여유 있는 연소현의 모습에 좌중의 몇몇 문사들이 소곤거렸다.
“대공자는 역시 듣던 것과는 다른 것 같군. 결국에 소문은 소문에 불과하다는 것인가.”
“자네도 그리 느꼈나? 흠. 아직 정확히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군중앞에서 보여 주는 여유만으로도 이제까지 들었던 소문은 잊어도 되겠어.”
사공자 측 시녀들도 속삭였다.
“뭐랄까? 자신감?”
“맞아. 예전에 한번 대공자님을 멀리서 뵀을 땐, 그저 유(柔)하기만 한 분이라고 느꼈는데.”
좌중의 긍정적 반응에 연소현의 뒤에서 대기 중이던 정아가 내심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동시에 기대했다.
이런 첫인상의 변화는 겨우 시작일 뿐이었으니.
“현 사업의 취지를 설명해 드리는 것에 앞서, 사업의 배경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때 사공자가 손뼉을 쳤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순서에 왜 이렇게 쓸데없는 게 많나? 이 자리에 누가 이 사업의 배경을 모르는 사람이 있어?”
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설마 용봉지회(龍鳳之會)를 모르는 사람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