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편 발 있는 말
“아니, 이런 선물을 다 주시고.”
“별것 아니니, 다들 즐거운 하루 보내시오!”
비단옷의 청년은 원각정 정문의 특임대원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안으로 들어섰다.
특임대원들은 하나같이 입가에 환한 미소를 띠며 그에게 마주 손을 흔들었다.
그런 그들은 전부 하나같이 작은 술 항아리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웬일로 대장이 주는 술을 다 마다하시오?”
탈명귀검이 선물로 받은 술 항아리를 동료에게 건네주었다.
“……검을 당장 뽑진 않더라도, 더 녹스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였지만, 술 항아리를 하나 더 얻은 특임대원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보였다.
* * *
약왕은 원각정의 숲길을 걸어 나가고 있었다.
잠시 들어와 원각정 식구들과 함께 점심을 해결한 뒤였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약왕어르신 아닙니까?”
비단옷의 청년이 넙죽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약왕도 얼떨결에 인사를 받았다.
“어어. 반갑네. 그런데 내 갈 길이 바빠서……
“아이고, 그러시다면 다음번에 꼭 찾아뵙고 인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게나. 그럼.”
예, 약왕 어르신 살펴 가십시오.”
그를 지나친 약왕이 한참을 걷다가 중얼거렸다.
“……누군데 나를 아는 게지?”
* * *
“당신은 누구신데, 원각정에서 얼쩡거리는 것인가요?!”
정체불명의 노승들에 이어서 웬 어리바리하게 보이는 청년이 얼쩡거리는 모습에 쌍둥이 시녀, 일령(一鈴)이 그를 제지했다.
“당장 거기 정지하도록 하세요!”
어젯밤의 화난 연소현을 보았던 그녀들은, 돌아가며 숲길의 입구를 지키는 중이었던 것이었다.
“침입자인가요?!”
“정체를 밝히시죠!”
전음을 받고 순식간에 나타난 나머지 두 쌍둥이 시녀, 이령(二鈴)과 삼령(三鈴)이 그를 포위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큰 신장.
전혀 위협적인 인상과는 거리가 먼 비단옷의 남자는 세쌍둥이 시녀를 보더니 환히 미소 지었다.
“당신들이 그 집사부의 갑종 특수반에서 원각정에 배속받았다는 시녀들이 시군요! 반갑습니다!”
“어어? 반갑습니다?”
마주 인사하는 삼령의 옆구리를 찌른 이령이 소리쳤다.
“어떻게 우리 정체를 아는 것이지?!”
비단옷의 남자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어라? 원래 갑종 특수반의 교육생들은 유별난 만큼 뛰어나기로도 소문이 자자해, 집사부에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없는 유명인들이 아닙니까?”
그녀들이 받는 '특수한 교육'이 기밀이었지, 그녀들의 존재 자체는 비밀은 아니었으니, 청년의 말은 틀린 데는 없었다.
“우리가 유명인? 후후.”
일령이 우쭐해하는 이령의 옆구리를 찌르며, 비단옷 청년에게 물었다.
“……혹시 집사부에서 오셨습니까?”
그러자 비단옷 청년이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저는…….”
그때 소란을 파악한 정아가 다가왔다.
“손님이 오셨으면, 안으로 모실 생각을 해야지, 이게 무슨 소란들인 것이냐!”
정아의 나지막한 호통에 세쌍둥이 시녀들이 대번에 움츠러들었다.
정아는 그런 그녀들을 한번 쏘아 본 후, 비단옷의 사내에게 인사했다.
“원각정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 다. 혹시 어디서…….”
그때 비단옷 청년이 손뼉을 치고, 정아를 가리켰다.
“아! 당신이 바로 접객원의 일화(一花)이자 빙화(氷花)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그 소저로군요!”
정아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일단 제가 말씀하시는 그 인물이 맞는 것 같사온데…….”
비단옷 청년이 정아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야, 원각정의 시녀장이 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감축드립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비단옷의 청년은 과장된 몸짓으로 주변을 살피더니 작은 목소리로 정아에게 말했다.
“이공자님과 삼공자님이 그렇게 체통을 못 지켰던 이유가 있었군요. 정말 절세가인(絶世佳人)이십니다.”
정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동시에 세쌍둥이가 외쳤다.
“이놈! 지금 시녀장님께 농을 던지는 것이냐?!”
“그 이야기는 아는 이가 드문 비밀이거늘!”
“당장 포박하도록 하죠!”
세쌍둥이 시녀가 눈에 불을 켜고, 점차 다가오는 모습에 비단옷의 청년이 급히 손을 내저었다.
“으, 으앗! 저는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본가에서 말직(末職)을 맡고 있는 연하응이라고 합니다!”
잠시 후, 세쌍둥이가 동시에 외쳤다.
“연 씨?!”
* * *
“외원(外院)의 의전(儀典) 담당 고문(雇頁問) 이시라고요?!”
연하응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청년의 직위는 그가 말했던 것과는 다르게 말직은커녕 꽤나 상급직이었다.
그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별것 아닌 자리입니다. 제가 방계가문의 직계혈족 출신이다 보니, 명예직에 불과한, 허울 좋은 자리를 하나 꿰찬 것뿐이지요.”
"직계혈족이시라고요?!”
“어……, 그게 아실지 모르겠는데, 개봉연가(開封淵家)라고……"
“개봉연가?!”
세쌍둥이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가는 모습이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연소현이 손을 내저었다.
“시끄럽다. 저놈 말대로, 고문 자리라 해 봐야 그저 명예직일 뿐이다. 게다가 저놈은 허구한 날 낙양의 사교 모임이라는 사교 모임에는 다 얼굴을 내밀고 다니는 한량일뿐이니, 너희는 신경 쓰지 말거라.”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럼요, 그럼요.”
노골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지만, 연하응은 그저 하하, 하고 사람 좋은 웃음소리를 낼 뿐이었다.
“그나저나, 소현 형님.”
그가 사근사근하게 말을 붙이자, 연소현이 혀를 찼다.
"넌 항상 왜 날 소현 형님이라 부르는 것이냐?”
그가 붙임성 좋은 미소를 지었 다.
“대공자님이라고 부르면, 정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그래도 먼 친척인데. 그러니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이십 대 후반의 연하응은 그렇게, 언제나 배알도 없는 사람처럼 웃고 다녔다.
잠시, 그가 원각정의 찻잎에 대해서 늘어놓는 칭찬을 들어 주던 연소현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연소현이 그의 눈을 바라봤다.
"네놈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또 뭔가 주워들은 것이 있기 때문이겠지?”
연하응이 손뼉을 쳤다.
“그러고 보니, 소현 형님. 혹시 사공자와 만날 약속을 잡으셨습니까?”
정아의 눈썹이 다시 꿈틀거렸다.
세쌍둥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연소현이 약왕을 통해 사공자와 서신을 주고받은 것이 오늘 오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 수상쩍은 남자는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연소현이 다시 시녀들에게 손을 내저었다.
“신경 쓰지 말라니까. 비(翡) 녀석이 내가 만나 준다니까, 또 신이 나서 아랫것들에게 자랑한 모양이구나.”
비(翡)는 사공자의 이름이었다.
“예예, 맞습니다. 사공자의 시녀들이 다들 바빠 죽으려고 하더군요.”
아무리 사공자가 아랫것들에게 떠들었다고 해도 사공자 진영의 내부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남자는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의심쩍은 눈초리를 연하응에게 보내는 시녀들의 모습에 연소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이놈의 별명부터가 '다리 있는 말(有脚言)'이다. 달리 '다리 달린 소문(有脚風聞)'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지.”
“하하, 유각풍문. 그게 바로 소생의 별호올시다.”
“별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자랑스럽게 떠드는 모습에 연소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서.”
연소현이 다시 그에게 물었다.
“사공자와 내가 만나기로 한 것이 무엇이 걱정되어 온 것이냐?”
연하응이 손사래를 쳤다.
“걱정이라니요. 소생은 그저 소현 형님을 언제나 가장 존경하고 따르는 동생으로서……"
연소현이 그의 말을 끊었다.
“내가 칩거를 깰까 봐 걱정인 것이냐?”
“칩거를 깬다니요?!”
연하응이 펄쩍 뛰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 풍파(風波)를 싫어하는 형님이 한창 후계자 다툼의 한가운데 있는 사공자와 어울리실 예정이시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내 형제의 일은 네 알 바가 아닌 것 같다만?”
연하응이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지요. 맞습니다. 제 주제에 맞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헤헤.”
그가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오늘도 소현 형님이 거래하시는 상회의 서적 중개인이 내원에서 곤욕을 치른 모양이더군요.”
“그래?”
그것은 불과 한 시진 전의 이야기였다.
과연 유각풍문의 이름에 어울리는 남자였다.
“아이고, 소현 형님.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계산서를 제 앞으로 끊어 주시면 제가 다 알아서 해 드린다니까요? 그러면 불쌍한 그 상인들도 덜 고생할 것이 아닙니까?”
연소현이 코웃음을 쳤다.
“네 걱정은 상인 쪽이 아니라, 내가 내원과 마찰이 점점 커질까, 그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더냐?”
그가 고개를 급히 저었다.
“아닙니다. 내원 따위가 감히 소현 형님과 마찰이라니요? 그런 불경한 것들이 있답니까?”
“또 들은 것이 있겠지?”
“……염 장로의 집사 하나가 지난밤에 염 장로에게 맞아 죽었답니다. 염 장로가 격노한 모양이더군요.”
“그래?’,
“혹시 호위제대를 물리시고, 낙양 거리에 나서지 않으셨습니까? 소현 형님을 담당하던 호위제장이 결국 교체된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가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공자와 삼공자가 소현 형님의 시녀장 때문에 심기가 매우 불편한 모양입니다. 잠자리 시중을 들던 시녀 몇이 죽어 나간 모양이더군요.”
그는 애써 정아 쪽으로 시선을 향하지 않았다.
“그렇군.”
태연하게 대답하는 연소현의 모습에 그가 울상을 지었다.
“소현 형님…… 요즘 심기가 왜 이리 사나우십니까?”
그는 간곡한 어조로 연소현에게 말했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면서 인생을 즐기자고 하셨던 것은 소현 형님이 시지 않습니까?”
정아는 용안을 통해, 연하응이 대공자에게 보내는 진심 어린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
연소현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아니다.”
“그러니 형님, 이제부터라도…….”
그가 멍청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었다.
“예?”
“이제 주어진 거에만 만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연소현이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러니 이제 너도 내게 협력해라.”
연하응이 벌벌 떨었다.
“하하.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 소생은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연소현이 손짓을 하자, 분위기를 눈치챈 세쌍둥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자. 공자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이제부터 저희와 함께 작은 작업을 시작해 보도록 하겠어요.”
“혹시 정보망 구축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세쌍둥이에게 팔을 붙잡힌 연하응이 외쳤다.
“사, 살려 주세요!”
“유각풍문이라니, 듣자마자 감탄 했답니다.”
“아주 쓸모가 많은 공자로군요.”
“호호, 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된답니다.”
세쌍둥이가 교소를 터트리며 그를 끌고 갔다.
“소현 형님! 형님!”
연소현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앞으로 그녀들에게 얌전히 협력하도록 해. 네게 해가 가는 일은 없을 거다.”
그가 끌려가며 울상을 지었다.
“……형님 말씀이라면 소생은 따라야지요.”
그는 포기하고 자신의 신장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시녀들에게 끌려 사라졌다.
정아가 연소현의 찻잔에 다시 뜨거운 물을 부으며 말했다.
“특이한 자였습니다.”
연소현이 킬킬거렸다.
“앞으로 많은 도움이 될 거야.”
그는 약왕에게 받은 사공자의 답신을 다시 펼쳤다.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비 녀석. 엄청 신이 난 것이 여기까지 보이는구나.”
제암진천경 - 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