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49화 (49/350)

제24편 여상(如常)

원각정, 이른 오후 시간.

연소현은 평소처럼, 손님을 맞이하는 빈각(賓閣)에서 자신을 찾아온 서적 중개인들과 만나고 있었다.

“흐음.”

연소현이 가죽으로 된 서적의 표지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동그란 안경을 쓴 서적 중개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대공자님! 학식이 높기로 누구도 따를 자가 없다는 분답사옵니다. 그 서책의 가치를 한눈에 꿰뚫어 보신 모양이옵니다!”

연소현이 내용을 훑어보며 말했다.

"아니, 표지가 인피(人皮)로 만든것 같아서 말이지.”

인피라는 말에 서적 중개인의 안색이 그만 핼쑥해졌다.

그는 급히 자신의 옆에 있는, 색목인에게 물었다.

주눅이 들어, 예의 바른 자세로 앉아 있던 붉은 머리와 붉은 수염의 사내가 조심스럽게 서적 중개인의 말에 답했다.

잠시 떠듬거리는 외국어로 대화를 주고받던 서적 중개인이 대번에 연소현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아이고, 대공자님! 불경한 물건에 옥체를 접하시게끔 만든 이 천한 놈을 죽여 주십시오!”

“옥체는 황실에서나 찾고, 다음 서책은?”

그의 말에 반색한 서적 중개인이 자신이 메고 왔던 자단목 궤짝을 뒤졌다.

“자아, 이 책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이자가 속한 상회(商會)의 중개인들은 다들 실력이 출중했지만, 하나같이 말이 너무 많았다.

“시끄럽고, 내놔 봐.”

연소현이 그의 손에 들린 보자기를 뺏어 들었다.

“하하, 역시 화통하십니다!”

연소현은 조심스럽게 은사(銀絲) 보자기를 풀어 안에서 낡은 서책을 꺼내 들었다.

그는 섬세한 손놀림으로 바스러져 가는 서책의 내용을 살폈다.

“이건……!”

연소현의 반응에 서적 중개인의 눈이 번쩍였다.

“후후. 역시 대공자님. 그 책이야 말로 제가 정말 어렵게 손에 넣은......”

연소현은 그를 무시하고 색목인에게 물었다.

그의 유창한 화란어(和蘭語)에 색목인이 깜짝 놀라더니, 이내 화색을 띠고 손짓 발짓까지 더해 가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러시겠지요. 역시 대공자 님. 화란어에도 능통하시군요.”

소외된 서적 중개인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자신의 까진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잠시 뒤.

“좋다. 모두 사지.”

서적 중개인이 펄쩍 뛰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성은은 무슨…….”

연소현이 계산서를 써 주었다.

“……이번에도 내원에서 대금을 수령하면 되겠사옵니까?”

연소현이 피식 웃었다.

“내원에서 잘 안 내주려고 하지?”

서적 중개인이 급히 고개를 저었 다.

“아니옵니다! 이게 다 제가, 그리고 저희 상회가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아 생기는 작은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대공자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는 이 천한 놈이......."

그가 떠들어 대는 동안, 연소현은 화란인 상인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연소현은 미소 지었고, 화란인 상인은 웃음을 터트렸다.

'다음에는 이 말 많은 중개인 없이 직접 찾아오라'는 말이었다.

물론 화란어가 짧아 알아듣지 못한 중개인은 땀을 닦으며 억지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 * *

그 시각.

정아는 두 노승(老僧)의 바리때에 넘칠 만큼 음식을 담아 주고 있었다.

다 낡아 해져,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도 알 수 없는 누더기 같은 가사(袈裟)를 입은 스님들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아이고, 고맙소. 복받으시게, 젊은 보살님.”

“여기만큼 나물이 맛있는 집이 또 없으니, 이게 다 보살님의 공덕 덕분이 아니겠소?”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승들은 정아에게 연신 합장을 했다.

“아닙니다, 스님들.”

그들의 몸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났고, 입에서도 썩은 내가 났다.

하지만 정아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정중하게 마주 합장해 보였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들르시지요.”

그러자 노승 중 하나가 은근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혹시 이 집의 젊은 주인이 대신 시주(施主)를 부탁한 것이 또 있었지 않소? 그 뭣이냐……"

정아가 손뼉을 쳤다.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 뒤, 노승들은 정아가 기름 종이에 싸 준 훈제 고깃덩어리까지들고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스님들, 부디 살펴 가십시오.”

스님들이 정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미타불.”

“복받으시게, 젊은 보살님들.”

“집주인에게도 안부 전해 주게.”

그들이 조금 멀어지자마자, 잠자코 있던 세쌍둥이 시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습니다.”

“스님이 고기를 시주 받다니요?”

“그 하얀 이빨은 보았습니까? 그 얼굴에 주름도 전부 역용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정아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저분들이 받아 가시는 고기는 절의 동자승들을 위한 것이다. 말을 삼가거라.”

그녀의 말에 소녀들이 움츠러들었다.

“그, 그렇습니까?”

그때 삼령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런데 애초에 저 늙은 스님들은 대관절 어디로 들어온 거랍니까?”

그러자 나머지 두 쌍둥이도 손뼉을 쳤다.

“그러고 보니, 그렇잖아?!”

“여긴 낙양검가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원각정인데, 난데없이 탁발승이라니요?!”

정아는 합장을 하면서 멀어져 가는 노승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는 저 멀리 보이는 산이 무슨 산인지 모르느냐?”

그녀의 말에 세쌍둥이 시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원각정 바깥으로 이어지는 정원은 숲이 되었고, 숲은 더욱 멀어지며 울창한 산림이 되었다.

그리고 산림 뒤로 험준하기 짝이 없는 거친 산맥의 모습이 보였다.

이령이 무의식중에 산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숭산(崇山)……?"

그때 일령이 깜짝 놀라 외쳤다.

“아니! 저 정신 나간 스님들이 금지(禁地)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령이 발을 동동 굴렀다.

“시녀장님! 저 금지는 어떤 고수라도 살아 돌아온 자가 없어, 금지로 지정된 마경(魔境)이지 않습니까?!”

그것이 원각정의 정원이 자연을 향해 트여 있으면서도, 그 방향으로 어떠한 방비도 없는 이유였다.

정아가 미소지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그녀가 말하는 사이에 노승들이 숲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저분들은 애초에 오실 때도 저곳에서부터 오셨으니.”

* * *

추운 겨울 날씨에 화창한 햇살은 마냥 반가울 만도 하건만, 원각정 정문에는 싸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대장.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직 처분은 너무 심한 것 아니오?"

어젯밤에 있었던 일에 관한 이야기였다.

탈명귀검이 아무 말이 없자, 경비대원으로 위장한 특임대원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아니. 그 녀석이 마음대로 염장로의 집사를 통과시킨 것은 잘못 한 것이 맞소. 그래도 겨우 그 정도 가지고 상부에 보고해 버리면 어떻게 해야 하오?”

벽에 기대어 서 있던 탈명귀검이 눈을 떴다.

“겨우 그 정도?”

그가 드디어 입을 열자, 특임대원이 열심히 징계받은 선임대원을 옹호했다.

“우리는 그냥 대공자를 한번 약 올리려고 했던 것뿐이오. 예전에도 가끔 그랬던 적이 있지 않았소?”

탈명귀검이 차갑게 미소 지었다.

“집사는 반쯤 죽어 실려 나갔고, 앞날이 창창한 젊은 무사 네 명이 오른팔을 잃었다.”

그의 시선이 특임대원을 향했다.

“그게 장난이었다고?”

“그건……

특임대원의 말문이 막혔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다른 특임대원들의 안색도 어두워졌다.

탈명귀검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전에는 그저 장난일 수 있었지. 그동안 대공자님이 화를 내는 걸 우린 본 적도 없었으니까.”

그가 특임대원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하인들이 전부 쫓겨난 날 뒤로 원각정이 변한 것을, 대공자님이 변한 것을 다들 느끼지 않았나?”

다들 묵묵부답이었다.

“여기 있는 이들 모두가 서로에 대해 잘 모르지.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이 있네.”

그들의 시선이 탈명귀검을 향했 다.

“우리가 모두 평생을 본가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싸워 왔고, 지금은 각자의 이유로 일선에서 물러난 사람들이라는 것이네.”

탈명귀검이 검집을 두드렸다.

“지금껏 쌓아 온 자신의 명예를 소중히들 하게.”

그가 짧게 덧붙였다.

“그리고 대공자님께 무례하지 않도록 다들 조심하도록 하게.”

그의 말이 끝나자, 그와 대화하던 특임대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지막 말만 아니면, 완벽했는데 말이지.”

다른 이들도 낄낄거렸다.

“이보게.”

탈명귀검이 뭔가 더 말을 하려 했지만, 특임대원은 돌아서서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더 이상 장난질 치지 말라는 것? 명령에는 따라야지. 명예를 생각하라는 것? 이해했네. 하지만 무검자에게 무례하지 말라고?”

다른 이가 피식하고 웃었다.

“그러고 보니 대장은 언제부터, 무검자를 대공자님, 대공자님하면 서 부르기 시작한 건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가 입을 열었다.

“나는 특수 임무를 맡아, 십 년간 운남의 산맥들을 지붕 삼고, 수림을 앞마당으로 여기면서 살았었지. 그러면서도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네.”

그가 자신의 검집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가락 두 개가 비어 있었다.

“그런데 부상을 입고 본가에 돌아오니, 주군께서는 쓰러져 계시고 본가는 혼란스러운데, 그 큰아들놈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군.”

“무공 못하는 것? 어쩔 수 없지 않나. 다 재능인데.”

항상 머리에 가죽 투구를 쓰고 있는 그는 과거 임무 도중 머리에 큰 부상을 입었었다.

“하지만 대공자로서 누릴 것은 다 누렸으면서도, 책임은 지지 않는 꼴은 도저히 못 봐 주겠네.”

정문에서 고정 근무만 서는 그는 한쪽 다리에 회복 불가능한 부상을 입었었다.

“주군께서 내리셨던 칩거 명령이 있었다지? 하지만 그건 내가 볼 때 다 핑계에 불과해. 자네라면 자신의 아버지가 쓰러졌는데, 집구석에 처박혀 있을 텐가?”

목에 입었던 상처 때문에 평소에는 말을 극히 아끼는 이까지도 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중, 아무 분의 피를 반만 물려받았어도, 그러진 못할 걸세.”

그들 모두, 낙양검가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져 희생했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바닥에 침을 뱉었다.

"......."

이번엔 탈명귀검의 말문이 막혔다.

사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들 전부, 예전 그가 연소현에 대해서 품고 있었던 생각들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 생각이 낙양검가에 소속된 무사들의 기저에 깔린 연소현에 대한 입장이기도 할 터였다.

여기 이 자리에서 무엇을 말해 볼 것인가.

연소현이 그 유명한 섬영찰나(閃影刹那)를 만들었다고?

어젯밤에 그를 보니, 연소현이 무공을 익혔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들이 말했다시피, 무공의 여부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었다.

게다가 대공자의 무공에 대한 부분은 그가 쉽게 입에 올려도 좋을 만한 사안도 아니었다.

비겁자이자 겁쟁이.

자신이 보았던 연소현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고, 말해 볼까.

하지만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한단 말인가.

그가 보았던 연소현의 언제나 당당했던 모습? 가끔 보여 주는 섬뜩한 눈빛? 주군을 떠오르게 했던 행동들?

겨우 그 정도로는 연소현이 그 긴 시간 동안 칩거를 해 왔던 것을 뒤집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애초에.

'……어째서 난 지금 대공자를 대변하려고 하는 거지?’

그때 바깥쪽에 서 있던 특임대원의 시선이 대로로 향했다.

“신원 미상 일인, 접근 중.”

“남자, 비단옷, 무장 없음.”

안력을 돋우던 특임대원이 접근하는 이를 알아봤다.

“어? 저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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