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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진천경-48화 (48/350)

제23편 값

마당에는 염 장로의 집사라는 자와 그를 호위하는 네 명의 무사 그리고 원각정의 모두가 있었다.

“다시 말해 보거라.”

문을 걷어차고 나타난 연소현의 모습에 염 장로의 집사라는 자가 무의식중에 마른침을 삼켰다.

“다시 말해 보라지 않느냐.”

나직하게 다그치는 연소현의 목소리는, 그가 소문으로 들어 왔던 무검자의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모시는 장로의 이름값을 믿었다.

장로는 검가에서 최상위에 속하는 지위(地位)였으니까.

“염 장로님이 약왕 어르신을 모셔 오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 말에 세쌍둥이들이 코웃음을 쳤고, 정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연소현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로 물었다.

“누가 누구에게 명령을 내렸다고?”

집사는 급히 헛기침했다.

“헛험. 물론 본 집사에게 내리신 명입니다.”

연소현이 다시 물었다.

“본 집사?”

집사는 허둥거렸다.

“아니, 본 집사가 아니고…….”

“아니고?”

“본 집사가 아니오라……. 그것이......."

말이 꼬이는 모양새가 우습기 짝이 없어, 시녀들이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이 집사를 단단히 자극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무검자에게 조롱당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던가.

“무례하다! 어디서 한낱 시녀들이……!"

연소현이 그의 말을 자르며, 손을 치켜들었다.

“무례한 건 네놈이다.”

뺨을 한 대 후려칠 참이었다.

“대공자, 멈추십시오!”

네 명의 호위무사가 일제히 칼자루를 쥐었다.

“감히……!”

정아를 위시하여 시녀들도 일제 히 칼자루를 쥐었다.

그 순간이었다.

칼자루를 쥐었던, 호위들의 손목이 일제히 바닥에 떨어졌다.

손목을 잃은 그들조차 손목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눈치를 챌 정도로 예리한 검기(劍技)였다.

"으, 으아악!”

집사가 그 모습에 대경하여 펄쩍 뛰었다.

오히려 호위들은 검가의 무사답게 침착하게 혈도를 눌러 지혈을 하며, 물러섰다.

“정신 나간 놈들……"

경비대원 복장의 사내가 손에 검 한 자루를 들고 서 있었다.

놀랍게도, 호위들의 손목을 베어 낸 그 검에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게다가 그 검은 날이 서 있지 않은 연습용 검이었다.

“감히 본가의 대공자님을 향해 칼자루를 쥐어 보여……?"

탈명귀검(奪命鬼劍)의 손에 들린 검이 다시 한 번 번뜩였다.

이번에도 그 검은, 소리가 없었다.

그림자도 없었다.

제각각 물러서 경계하던 호위들의 팔뚝이 일시에 잘려나갔다.

그의 검엔 사각도 없었다.

“뭐 해? 이 미치광이 역도(逆徒) 새끼들아.”

역도라는 말에 무사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워낙에 무검자를 평소 무시하던 무사들이다 보니, 말도 안 되는 짓거리들을 벌이고 만 것이었다.

탈명귀검이 이를 드러내며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었다.

온화한 원각정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의 살기였다.

“그래도 무사였다면, 검은 쥐고 죽어라.”

그의 검이 다시 움직이려고 할 때, 연소현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그만해라.”

탈명귀검은 검을 멈췄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향한 검을 거두어들이지는 않았다.

연소현은 그 모습을 보며 다시 말했다.

“누구도 이 원각정에서 목숨을 빼앗지 않는다. 그것은 내 어머니이자 이 가문의 대부인이 정한 지엄한 법도이다.”

탈명귀검은 즉시 검을 거두었다.

집사가 입에 거품을 물었다.

“대, 대공자! 염 장로의 무사들을 해하고도 아무 일 없이 넘어갈 것 같으시오?!”

“그래.”

연소현은 집사의 멱살을 잡은 후에 그대로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아무리 내공을 싣지 않았다지만, 그는 제암진천경의 연자였다.

약왕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 아닌 존재였다.

완력으로만 사람을 잡아 뜯고, 찢어발기는 것이 가능한 그였다.

집사의 뺨이 터지고, 이빨이 후두둑 허공을 가로질렀다.

연소현은 멱살이 잡혀 매달리다시피 한 집사를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죽이지만 말라고 하셨지.”

그의 손바닥이 한 번 더 집사를 후려갈겼다.

겨우 남아 있던 이빨들이 피 안개와 함께 허공에 휘날렸다.

“그리고 나는 무사뿐만 아니라, 분수도 모르는 집사 새끼를 병신으로 만들어 줘도, 염 장로가 아무 말 안 할 거라고 확신한다.”

그의 손바닥이 또다시 집사를 후려 쳤다.

이제 집사의 얼굴 반쪽이 피범벅이 되고, 광대뼈가 내려앉고, 한쪽 안구가 파열된 채 흘러내렸다.

“어째서인지 아느냐?”

분명 그 물음은 집사에게 하고 있었지만, 집사는 이미 정신을 잃은 뒤였다.

“모, 모르겠사옵니다.”

자신의 사라진 팔뚝을 쥐고 지혈 하던 무사가 대신 답했다.

연소현이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염 장로는 자기 이름값을 알거든. 아무리 내가 모자라 보이지만, 내 이름값에 비하면 본인 이름값이 모자란다는 계산 정도는 충분히 하고도 남을 위인이지.”

연소현이 무사들을 향해 이를 드러 냈다.

“그렇다면 결론은 뭐다?”

무사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연소현의 손바닥이 다시 또 한 번 집사를 후려갈겼다.

귀가 찢어져 날아가고, 가죽이 뜯겨 나가 이미 골절된 광대뼈가 드러났다.

“이놈이 거짓말을 했다, 그거지.”

연소현은 말을 잊은 무사들에게 집사의 멱살을 붙잡은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만약 거짓말이 아니라도 상관없어.”

그의 살기가 새어 나오자, 탈명귀검의 살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한기가 몰아쳤다.

“장로고 뭐고 이놈이랑 똑같이 만들어 줄 테니까.”

모두가 자리에 얼어붙었을 때, 정아가 나섰다.

“……주인님.”

연소현이 한숨을 쉬며, 살기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는 집사를 놓지 않았고, 무사들에게 말했다.

“내가 어머니 말씀을 어길까 봐 걱정되느냐? 그런 걱정은 하지마.”

연소현이 낄낄하고 웃었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중원 최고의 의원이 두 명이나 있거든.”

그때 이번에는 약왕이 나섰다.

“염 장로의 수하가 공을 세울 욕심에 과잉 충성을 한 모양이구나.”

그는 연소현에게 다가오면서 말했다.

“염 장로의 딸이 난치병을 앓고 있어, 내가 낙양에 들를 때면, 봐 주고는 했었지.”

약왕이 사방에 피범벅이 된 마당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대공자. 염 장로와 친분이 있는 본인을 봐서라도, 아니면 마당을 가꾸었던 자당(慈堂)을 생각해서라도, 이제 이들을 보내 주는 것이 어떻겠소?”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뒤바뀐 손자의 모습에 복잡하고 답답한 속을 연소현이 짐작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연소현은 손에 들린 반송장을 무사들에게 집어 던졌다.

약왕이 그들을 향해 말했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으니, 더는 그의 딸을 살피기 힘들다고 전하게나.”

그것은 사고를 친 이들에겐 사망 선고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염 장로의 성격을 아는 그들이었으니.

하지만 그들은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고개를 깊이 숙여 보이고는, 집사를 함께 메고 원각정을 떠났다.

탈명귀검이 대문까지 그들을 따라가, 그들이 원각정을 완전히 떠나는 것을 확인했다.

마당은 침묵 속에 있었다.

잠시 후, 연소현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약왕에게 말했다.

“이것 또한 내 책임이오.”

약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연소현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내가 어리석고 둔해 멸시를 사고도 방치했던 탓에, 미래가 창창한 본가의 무사 네 명이 그 값을 치러야 했소.”

마당에는 그들의 손목과 팔뚝이 뒹굴고 있었다.

약왕은 한숨을 쉬며, 연소현에게 다가갔다.

“……아니야. 놈들은 그저 자신들의 멍청함에 대한 값을 지불한 것뿐이다.”

그는 연소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자, 오늘은 이 할아비와 함께 새벽까지 달려 보자꾸나.”

연소현이 피식하고 웃었다.

“아니, 그 나이에 '달리자'가 뭐요? 품위 없게.”

“이놈이? 그러고 보니, 아까 중원국 최고의 의원이 두 명이라고? 내가 잘못 들은 거 맞지? 최고는 이 약왕뿐 아니던가?”

“잘못 들은 거 맞소. 약왕은 중원국 최고고, 나는 이 대륙 최고거든."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며, 다시 방으로 들자, 정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주인의 감정이 격양되어, '그것'이 튀어나올까 걱정했던 그녀였다.

대량의 학살 이후, 침식되어 가던 주인의 정신이 안정을 찾은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그녀는 손뼉을 쳤다.

“다들 뭘 하고 있느냐? 어서 이 난장판을 정리하고, 술안주를 더 준비해라.”

아직도 연소현의 살기가 미친 여파에 얼어 있던 세쌍둥이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뭐라고?”

엄청난 크기의 대검(大劍)이 거듭하여 지면을 강타했다.

“다시 말해 봐라.”

그 검이 충돌할 때마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이 땅이 흔들렸고, 천둥이라도 치는 것처럼 굉음이 울려 퍼졌다.

“다시 말해 보라니까?!”

전각이 흔들리고, 보이지 않던 곳에 쌓였던 먼지가 흩날렸다.

“왜 대답이 없어?!”

지면이 움푹움푹 파였다.

주변인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장로님.”

“뭐?”

보다 못한 그의 종관이 나서서, 그에게 말했다.

“보시다시피 이미 죽은 지 오래 입니다.”

염 장로가 식식거렸다.

그가 그의 거검(巨僉I])으로 연신 내리치던 것은 반송장 상태로 돌아왔던 그의 집사였다.

그의 시신은 참혹하게 으깨어져, 원래 사람이었는지 짐승이었는지도 구별되지 않았다.

피범벅의 고깃덩어리가 함몰된 지면에 처박혀 있는 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염 장로는 한숨을 쉬었다.

그가 어깨 너머로 자신의 거검을 던지자, 그의 검이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고정되어 있던 검집에 꽂혔다.

어검술(御劍術)이었다.

그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제길, 성질대로 죽여 버렸잖나. 또 잔소리 좀 듣겠군.”

그리고 자신의 앞에서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네 명의 무사들을 바라봤다.

“네놈들은 가서 집법희(執法姬)에게 죄를 고하고 처벌을 받아라. 억울한 놈은 결투재판(決鬪裁判)을 벌여 달라고 하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무사들이 큰 소리로 외쳤지만, 어째서인지 염 장로가 화를 낼 때 보다 더 떨고 있었다.

그들 중 감히 결투재판을 청할 사람은 없어 보였다.

염 장로는 손을 내저었다.

“이제 참모진만 남고 다 꺼져.”

일단의 인원들이 전부 자리를 비우자, 그가 참모진이라고 일컬은 소수의 인원만이 남았다.

“약왕께서 더는 방문하지 않는다고 하셨다고?”

“제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더는 아가씨를 살피기 힘들다'라고 하셨습니다.”

염 장로는 그게 그 말이잖아, 같은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 정도의 위치라면, 작은 표현 하나가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오는지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

“안 그래도 용봉지회(龍鳳之會)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염 장로는 커다란 곰 발바닥 같은 손을 들어 머리를 감싸 쥐었다.

“……무검자, 무검자, 그놈의 무검자!”

그가 맨손으로 바닥을 내리치자, 바닥의 포석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갔다.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랫것들이 단단히 착각하는 점이 있어…….”

총관이 말을 받았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염 장로가 답했다.

“대공자는 무검자여서 무시당했던 것이 아니라, 무시당해도 가만히 있었기 때문에 무검자라고 불렸다.”

그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놈이 가만히 있지 않으면, 그건 무검자가 아니야. 그럼 놈은 뭔가?”

“그렇다면 대공자겠지요.”

염 장로가 벌컥 소리를 질렀다.

“그래! 대공자라고! 대낙양검가의 대공자! 여기 대공자가 본가의 법전 상 의전 서열이 몇 번째인지 모르는 새끼가 있나?! 그 이름값이 얼마나 무거운지 모르는 새끼가 있어?!”

“……면목이 없습니다.”

참모진이 일제히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런데 밑의 집사 새끼들 교육을 어떻게 하는 것이야?!”

그가 참모진에게 외쳤다.

“내 밑의 모든 인원에게 서열 교육 다시 하도록 해! 특히 대가리에 검술밖에 없는 무사 놈들에게는 두배로 교육해! 안 되면 세 배로!”

그의 참모진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어떻게 약왕 어르신을 다시 모실지, 방법을 찾아라!”

그가 산군(山君)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계획이랍시고, 자기가 책임질 수 없는 인물을 끌어들이는 방식을 가져오는 놈은……"

그가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구덩이 속의 고깃 덩어리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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